경험은 관념의 씨앗

'까망세상' 탄광촌 고한에서 다른 세상을 보다

고한 박심리 전경. 당시 사진이 없어서 1996년 사진을 빌려왔다. 이 무렵만 해도 동네가 비교적 밝은 느낌이다. '까망세상'에서 벗어 나고 있는 것 같이 보인다. 이 동네에 '동원탄좌 영일 덕대 1096항'이 있었다. 이후에 '스몰카지노'가 생겼다가 사북의 '본카지노' 개장과 함께 문을 닫고 현재는 '하이원 리조트'가 영업 중이다.

 

1979년 말, 대한민국은 극도로 혼란한 상태였습니다.

두어 달 전에 박정희 대통령 저격 사건과 12.12 사태 등으로 한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혼돈이 우리 사회를 짓누르고 있던 시기입니다.

청량리 역에서 심야 열차에 몸을 싣고 새벽에 내린 곳은 강원도 정선군 사북읍 고한리(지금은 고한읍)입니다.

1979년 말에는 기차 안에서도 담배를 피웠는데, 친절하게도 객석 마다 재떨이가 붙어 있었고 겨울에는 열차 안이 늘 담배 연기로 자욱했던 시절입니다. 심야열차를 타면 술과 담배를 나눠 마시고 피우며 낯선 이들과도 쉽게 어울릴 수 있었던 특유의 '서민문화'가 있었지요.

강원랜드가 들어 선 사북과 똬리굴(추전터널)로 유명한 추전의 중간에 위치한 고한은 전형적인 탄광촌입니다.

고한역은 고한의 양쪽으로 늘어 선 야산 중 한쪽의 중턱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동네를 기준으로 야산이지, 해발 고도는 서울 근교의 산 정상쯤 됩니다.

새벽공기는 차가우면서도 신선합니다. 대부분 불이 꺼진 고한역 아래 시장의 '여인숙'에 들어갔습니다. 그렇게 해서 몇 개월 간의 '까망세상'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탄광촌 여인숙, 옆방의 잠꼬대 소리까지 들리는 개방형 방음시설

 

여인숙은 2층구조였고, 1층에는 접수창구와 일하는 사람들이 쓰는 공간, 2층에 10여개의 작은 방들이 객실입니다.

방과 방 사이의 벽은 두 장의 목재 합판 중간에 스틸로폼을 채운 '샌드위치 판넬'입니다. 옆 방에서 잠꼬대하는 소리까지 들리는, 매우 개방적인 환경이었습니다.

점심 무렵에 약속이 되어 있는 'O'를 만나기 위해 여인숙을 나서자마자 별천지의 풍경이 펼쳐졌습니다.

마을 전체가 까만색입니다. 산도 거리도 도로도, 심지어는 개천에 흐르는 물까지도 온통 까만색인 '까망세상'인 것입니다.

본래는 흰털을 가진 강아지들도 모두 '쥐색'입니다.

오가는 사람들 가운데 주로 여성들의 옷 만이 색감을 가지고 있다는 '별천지'가 바로 말로만 듣던 탄광촌의 모습이었습니다.

시장을 중심으로 형성된 '고한 번화가'에는 유난히 술집이 많았습니다. 지방색이 나는 '요정'도 있고 룸쌀롱을 비롯해서 고깃집까지 마치 '술꾼의 세계'를 보는 것 같은 풍경입니다.

베이지색 바지에 콤비 상의와 감청색 코트를 입고 있던 저는 한 눈에 봐도 이방인이었습니다. 까망세상의 이방인에게 베이지색 옷이 검은 '탄 때'로 얼룩지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아마 이런 모습이었을 것

 

'O'로부터 탄광 소개를 들었습니다. 경험 삼아 하기에는 만만치 않다는 것과 그런 만큼 수입은 제법 짭짤하다는 설명을 들었습니다. 당시의 일반 근로자 수입에 비해 평균 1.5배, 많게는 두배 이상의 수입도 가능하다는 내용입니다.

탄광촌은 세 개의 반으로 나뉘어 1일 3교대로 일합니다.

'갑을병' 세 개의 반이 역순으로 교대를 하는데, 갑반은 오전 여덟시부터 오후 네시까지, 을반은 네시부터 열두시까지, 병반은 열두시부터 다음날 오전 여덟시까지 일하는데, 일주일에 한 번씩 갑반이 병반으로, 병반이 을반으로, 을반이 갑반으로 작업시간이 바뀝니다. '가다 가와리'라고 불렀던 '반 교대'가 일주일 간격으로 이루어 지는 것입니다.

일반 근로자의 두배 이상의 고소득을 올리려면 '만근'을 해야 됩니다. 한달에 이틀만 빼고 출근하는 것이 바로 만근입니다.

거기에 '채탄실적'이 가감됩니다. 정해진 채탄량 보다 많으면 '성과급'으로 추가 수입이 생기는 것입니다.

월 58만원에 연탄 백장 교환권, 당시 사무관급 공무원 월급이 40만원 안팎이었던 점을 생각하면 결코 적지 않은 수입입니다. 일이 얼마나 고되고 위험한지에 대한 생각 없이 "와~~ 많다"고 했으니, 이 또한 얼마나 어리숙하고 천진한 백면서생 다운 모습인지요.

일할 탄광과 기거할 하숙집을 정해 놓고 내일 여인숙으로 오겠다는 'O'와 헤어져 돌아와 외출한지 두어 시간 만에 얼룩무늬가 된 베이지색 바지를 벗어서 여인숙 여종업원에게 세탁소에 맡겨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O'가 내일 올 때 임시로 입을 옷가지를 챙겨 오겠다고 했기 때문이죠.

'O'는 다음날 오지 않았고 그 다음날도 오지 않았습니다. 그 시절 고한의 세탁소는 옷을 맡기면 3~4일 뒤에 찾을 수 있었습니다.

방 안에서 꼼짝도 못하고 주야로 들리는 옆 방의 소음을 음악 삼아 주인 아주머니와 여종업원이 '양은 쟁반'에 얹어다 주는 조촐한 밥을 먹으면서 지낸 3일, 까망세상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소위 '창녀'로 불리우던 이 고마운 여종업원과는 훗날 잊혀지지 않는 추억이 만들어집니다.

3일 뒤에 'O'가 왔습니다. 제가 일하게 될 곳은 '박심리'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곳에 있는 '동원탄좌 영일 덕대 1096항'이라고 합니다.

덕대란 당시의 대표적인 석탄 채굴권자인 동원탄좌 또는 삼척탄좌로부터 하청을 받아서 운영하는 영세 채탄업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동원탄좌나 삼척탄좌에 비해 작업 환경이나 조건이 매우 나쁘다는 사실은 나중에야 알게 됐지만 일단 기대감과 호기심에 설레었습니다.

하숙집은 후불제로 월 만오천원에 여섯명이 한 방을 쓰고 도시락도 싸 주는 조건입니다.

'O'가 가져온 옷은 요즘 같으면 재활용에도 내놓기 어려울 만큼 헌, 파랑색 바탕에 양 팔과 다리 측면에 본래는 흰색이었을 잿빛 두줄이 박힌 '츄리닝' 한 벌입니다. 이 츄리닝으로 까망세상의 일원이 된 것입니다.

 

야호~ 내일이면 나도 막장 후산부다!


탄광 막장 작업은 석탄을 캐서 운반해 나오는 일입니다.

선산부 두명, 후산부 두명의 총 4명이 1개 반을 이룹니다. 선산부는 다이너마이트 발파 작업과 동발 설치 작업을 전담하고 후산부는 선산부를 보조하는 동발 등 작업 자재 나르기와 다이너마이트 발파작업으로 쏟아져 내린 석탄을 삽으로 퍼서 '광차'에 싣고 갱도 밖 '조구'까지 운반하는 일을 전담합니다.

선산부는 비교적 전문적인 일을, 후산부는 막일을 담당하는 것입니다.

두 명의 선산부 중 한 사람이 '반장'입니다.

작업에 들어가기(입항) 전에 '고야집(본항 입구에 설치된 두평 가량의 목조 함석지붕의 가건물)'에 모여 가방을 내려 놓고 반장으로부터 그 날의 작업 계획을 듣는 것으로 일과가 시작됩니다.

 

"오늘은 네 칸 도리"

 

네칸은 세워질 동발의 칸수 입니다. 동발은 한 개의 무게가 40~50K쯤 되는 통나무인데 양 옆에 기둥 두개를 가로질러서 질러서 위에 한 개, 총 세 개의 통나무를 사용합니다. 세 개의 통나무가 바로 '한 칸'의 기준이 되는 거지요.

한 칸의 동발을 세우고 나면 위에 널판지('다루끼'라고 부름)를 촘촘히 올려서 지붕을 만들어 줍니다. 위에서 떨어지는 석탄과 잡석들을 막아 주고, 그 것들이 쌓이고 채워지면 하중에 의해 동발의 지탱력이 강해진다는 것입니다.

못이나 철제는 사용하지 않습니다. 도끼와 톱과 끌만으로 조립하는 일종의 '대목 작업'이 선산부의 기술입니다.

기본 작업량이 세 칸이라고 합니다. 세 칸 이상부터 '성과급', 가외 수익이 생기는 것입니다.

한 칸 작업에 보통 4톤~5톤, 광차 2~3대 정도 분량의 석탄을 실어 냅니다.

동발 <자료출처 : 한겨레신문>

 

동원탄좌나 삼척탄좌 같은 큰 업체는 갱도 입출항 및 채탄 운반 작업을 모두 '전차'로 하지만 '덕대'는 사람이 광차를 직접 밀고 다닙니다.

쇠붙이로 된 작은 수동기차, 광차의 자체 무게가 1톤이 넘는데 한번에 2톤 가량의 석탄을 삽으로 퍼 담고 본항 밖의 '조구'까지 운반하는 것이 '후산부'의 일입니다.

처음 작업을 시작한 '동원탄좌 영일덕대 1096항'은 '본청'인 동원이나 삼척탄좌와 달리 본항 갱도의 높이가 160cm정도인데, 왠만한 남자 어른은 안전모를 쓴 채로 똑바로 서지를 못하고 양 다리를 벌리고 고개를 30도 정도 옆으로 숙여야 걸어 다닐 수 있는 환경입니다.

'본항'은 중간에 두 갈래로 갈라집니다. '크로스'라고 불렀던 이 지점에서 하나는 탄맥을 찾아서 굴을 파는 '굴진작업' 막장으로 가고 하나는 찾은 탄맥에서 석탄을 캐는 '채탄작업' 막장으로 가게 됩니다.

 

덕대 탄광 막장 후산부의 복장

막장 광부의 장비 <자료출처 : 석탄박물관>

 

막장 선산부의 뒷모습(방진 마스크는 없었음. 작업복도 실제는 방수복을 겉에 입었음) <자료출처 : 석탄박물관>

 

덕대 탄광 막장 후산부의 복장은 위로부터 ①안전모(광부는 노랑색, 감독은 백색 안전모) ②안전모 전면에 거는 캡램프('캐프 불'이라고 불렀음) ③목에 두르는 땀 닦는 수건 ④방수복('탄가루' 방진용으로 입은 '땀복'과 비슷한 옷) ④충전용 축전지(허리벨트 뒤에 착용, 캡라이트와 고무피 전선으로 연결, 무게 약 2kg, 한번 충전으로 20시간 정도 사용한다고 했지만 하루 여덟시간 이상 사용해 본 적은 없음) ⑤면장갑 ⑥면장갑 위에 끼는 고무장갑 ⑦고무장화

방진 마스크나 안전화가 지급되지 않았고 의무화 되어 있지도 않았던 때라 진폐증과 안전사고에 노출된 채로 하루 여덟시간 씩 작업을 했던, 그야말로 '막장 광부'의 복장인 셈입니다.

 

 

다음에 이어질 글 : 막장에서 본 세상 ② '막장의 빛'

 

 

 

 

 

Posted by 망중한담

댓글을 달아 주세요

"우리가 남이가"

중국 친구들은 의례적으로 "우리가 남이가" 선창에 "함 해보자"를 외쳤다

 

 

수년 전, 사업의 중국 진출과 함께 북경에 법인을 설립할 당시의 일입니다.

목적 사업이 중국 정부의 정책과 관련한 S.O.C 유관 사업이었기 때문에 외형상으로 '중국법인'의 형식을 갖추어야만 했습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한국이나 외국이나 대부분 국가의 소위 '국책사업'에 있어서는 외국 기술과 자본을 도입하더라도 시행자는 내국인 또는 내국법인이어야 합니다.

자금과 기술은 우리 쪽에서 투자하고 영업과 대관업무를 중국 친구들에게 위임하는 형태로 '외자법인'을 설립하는 과정이었습니다.

'중국법인'의 외형을 갖추기 위해 소유지분 또한 중국 측 51% 대 우리 측 49%로 결정했습니다.

 

사업 참여자 중 중국 측 인사들은 중국 중앙정부의 고위직 인사들이었습니다.

'만만디'라는 말, 중국과의 거래를 해 보신 분이라면 익히 아실 일이지만 그들의 사고방식과 일하는 스타일은 우리와는 매우 다릅니다.

 

같은 주제를 놓고 질릴 정도로 같은 회의를 반복합니다.

그 과정에서 대부분의 외국, 특히 한국 사업가들은 의심을 하기 시작하며 대부분 중도에 포기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만만디'에 중국 특유의 저력이 숨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오늘 회의에서 마라톤 회의를 합니다. 그리고 "참 좋은 내용이었다. 나머지는 2차 회의에서 얘기하자." 라는 말로 마무리합니다.

다음날 회의합니다. 상식적으로 전에 진행했던 회의 내용에 이어서 새로운 내용으로 진행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상식입니다. 하지만 중국 사람들은 같은 얘기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합니다. 새로운 주제에 대한 회의는 당연히 짧아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또 얘기합니다. "오늘 참 좋은 시간이었다. 다음 회의에서 나머지를 얘기하자."

그 과정이 다섯번, 열번 계속 반복되면 차츰 의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 자들이 과연 사업에 뜻이 있는 걸까..?"

과거에 중국에 진출했던 한국 기업들이 100% 실패했던 기간이 있습니다. 대기업이나 중소기업을 막론하고 전패를 기록한 기간이 이십년 가까이 됩니다.

그 이유는 몇 가지로 분석되었지만 가장 첫번째 벽이 협의 단계에서부터 한국의 실무자들을 좌절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위와 같은 그들의 태도입니다.

 

중국인과 기업은 왠만해선 협력관계를 바꾸지 않는다.

 

그렇게 해서 일단 '파트너쉽;이 결정되고 나면 좀처럼 바뀌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위와 같은 과정을 통해서 생긴 신뢰가 크기 때문이기도 하고 파트너를 바꾸기 위해 또 같은 과정을 반복해야 되기 때문에도 그렇습니다.

 

영화 '친구'의 한 장면. '펑요우 朋友'는 '친구'라는 의미의 중국어.

 

그리고 위와 같은 과정을 통해 생긴 신뢰를 '펑요우 朋友'라고 합니다. 친구라는 의미의 이 펑요우는 중국인들에게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중국인들은 '펑요우'가 아니면 쉽게 문을 열지 않습니다.

 

이처럼 지루하고 의심스러운 회의를 반복하고 나서 '법인 설립과 협업'에 대한 기본 합의를 했습니다. 그 무렵부터 제가 제안합니다.

"내가 선창하면 당신들은 복창하시오."라고 하면서 우리 말의 뜻을 설명했습니다. 그들은 흥미롭다는 반응과 함께 저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그 다음 회의 때나 회식 때는 의례적인 사전행사를 했습니다.

"우리가 남이가!" 저의 선창에 "함 해보자!"라는 중국 친구들의 복창으로 말이지요.

 

동류의식과 집단주의

 

네덜란드의 사회심리학자 홉스테드(G. Hofsted)가 전 세계 56개 국가의 문화를 몇 가지 지표로 분석한 결과로 보면 한국은 아시아 평균인 24점에도 미치지 못하는 18점을 받아 강한 집단주의 성향을 보였다. <자료출처 주간경향>

 

이 '우리가 남이가'라는 말에는 '동류의식'이 숨어있습니다.

중국에서는 '펑요우'라는 의미로 사용했고, 경상도에서는 '문디'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것 같습니다.

동류의식은 인간관계의 공통분모에 대한 공감대입니다.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낸 어느 정치인도 과거에 복국집에서 부정하고 불의한 내용의 모의를 하면서 '우리가 남이가"를 연발했다고 합니다.

이렇듯 동류의식은 그 구성원의 면면에 따라서 각기 다른 집단주의로 나타납니다.

일제 강점기의 독립투사들에게도 '우리가 남이가'의 종류의식이 있었을 것이고 반대편에 선 매국노들에게도 비슷한 의식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 동류의식은 '패러다임'으로 고착되고 이어집니다. 오늘날에도 '우리가 남이가'의 집단주의 유형은 극과 극입니다.

 

당신은 어떤 유형의 동류의식, 집단주의에 속해 있습니까?

 

 

 

 

 

 

 

Posted by 망중한담

댓글을 달아 주세요

아가야

 

 

엄마가 너를 세상에 부르려 커튼 드리워진 방으로 들어 간 후

아빠는 이쪽에서 57시간 동안 너를 기다리며 눕지도, 앉지도 못한 채 서성거렸단다.

 

숨 죽이는 숭고한 기다림.

큰 엄마의 양 팔에 안겨 네가 다가 왔을 때

아빠는 양 볼에 뜨거운 물이 흘러 내리는 급성 안질에 걸리고 말았지.

 

 

샛별 처럼 반짝거리는 너의 두 눈 망울과

유난히 길고 새까만 너의 머리카락을 대하고

아빠는 마치 터져 버릴 것 같은 희열의 심장병도 생겼고,

 

 

어느덧 스무 해가 지나

네가 2막을 향해 첫 걸음을 시작하는 순간.

아빠는 하늘 아래 가장 행복한 자아도취의 정신병까지 얻었구나.

 

아가야

세상의 한 걸음 앞에서 너를 기다린 그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아빠는 이제 너의 뒷 편을 갈무리 해야겠구나.

 

 

꼭꼭 접어

깊은 품 안에 넣어 다니고 싶었던 20년.

아빠는 오늘 이름 모를 병에 걸려 구름 위를 걷는구나.

 

 

 

 

 

 

Posted by 망중한담

댓글을 달아 주세요

영상 : 친구에게



 

여보게 친구

 

떨어지며 부딛는

눈발의 아우성을 들어 보았나?

 

달리기 경주하듯

앞만 보고 뛰어 온 자네 뒤안을

숨가쁘게 쫓아 온 저 깊은 속의 자네를 기억하나?

 

 

헐떡이는 가슴을 쉴 겨를도 없이

어느덧

살아 온 날들보다 살아갈 날들이 많지 않은

마루턱에 가까이 있네..

 

세상에 오직

엄마밖에 모르던 시절

저녁이면 피어오르는 매케한 굴뚝 연기가

오히려 향기롭고 행복했던 그 겨울들..

 

 

여보게 친구

 

이만큼 뛰었으니 이제

가쁜 숨 잠재우고 헐떡이는 가슴도 쉬이며

고구마라도 하나 구워 놓고

저 깊은 속의 우리를 불러 보세나..

 

Posted by 망중한담

댓글을 달아 주세요

내일도 스물여덟, 영원히 위대한 서정시의 탄생

 

시인 윤동주(1917~1945). 사후에 단 한편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남겼다. 윤동주의 시는 내일도 스물여덟살이다. 빼앗긴 시대, 괴로워하던 스물여덟이 괴로우나 괴로운 줄 모르는, 괴롭다고 고백할 수 없는 오늘날에 찾아왔다. <한겨레> 자료사진

 

동주가 돌아왔다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숨진 윤동주의 장례가 1945 36 뒤늦게 치러졌습니다. 올해는 윤동주 서거 71주기입니다. 윤동주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 초판본이 지난 224~31 교보문고 종합 베스트셀러 4위에 올랐고, 시인의 일대기를 그린 저예산 영화 <동주> 조용한 흥행몰이 중입니다. 몰락한 시대, 끝없이 부끄러워했던 윤동주의 시가 어깨 곁을 스치고 지나갑니다. 그의 시가 다시 불어오는 것은 부끄러움을 잊고 사는 탓일까요.

 

황혼이 짙어지는 길모금에

하루 종일 시든 귀를 기울이면

땅거미 옮겨지는 발자취 소리.

발자취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나는 총명했던가요.

이제 어리석게도 모든 것을 깨달은 다음

오래 마음 깊은 속에

괴로워하던 수많은 나를

하나둘 제 고향으로 돌려보내면
거리 모퉁이 어둠 속으로

소리 없이 사라지는 흰 그림자,

흰 그림자들

연연히 사랑하던 흰 그림자들,

내 모든 것을 돌려보낸 뒤

허전히 뒷골목을 돌아

황혼처럼 물드는 내 방으로 돌아오면

신념이 깊은 의젓한 양(羊)처럼

하루 종일 시름없이 풀포기나 뜯자.ㄹ

 

이름 잃은 사내가 잃은 거리를 서성이다 모퉁이 속으로 사라지는 그림자를 바라본다. 사랑하는 그림자를 어둠 속에 소리 없이 보내고 뒷골목을 돌아 찾아온 . 시들어간 귀를 안고 황혼으로 물드는 작은 방에 앉는다. 양처럼 풀포기를 뜯자. 그제야 소리 없이 중얼거린다. 이름 잃은 사내는 히라누마 도주(25). 시인 윤동주.

일본 도쿄 이케부쿠로역 근처에 자리한 릿쿄대학 영문과 선과(先科) 1학년 윤동주는 1942 414 일본인들 사이를 서성이다 돌아와 시를 쓴다. 12 입학한 신입생은 어쩐지 괴롭고 그립다.

 

태극기 날리는 간도 명동소학교

잃어버린 조국 밖의 조국

윤동주, 송몽규, 문익환은

나라 잃은 설움에도 꿋꿋했다

몽규와 동주는 문학을 사랑했다

열일곱 몽규가 신춘문예 등단

동주는 시에 날짜를 적기 시작했다

몽규는 열여덟에 무장투쟁 위해

중국으로 떠나고 동주가 남았다

잃어버린 완고하던 형'이 그립다

 

시 '십자가' 육필 원고.

 

흐르는 거리

 

윤동주는 1942 129 이름을 잃었다.

조선총독부는 1939 1110 총독부 제령 19호로 '창씨개명' 공포하고 참여가 저조하자 소설가 이광수 등을 동원해 1940 8 창씨율을 79.3% 끌어올린다. 1941 11 개명을 거부한 조선인에게 제재조치를 공표한다. '자녀는 학교 입학과 진학을 거부한다. 행정기관은 모든 민원 사무 취급을 한다. 비국민·불령선인으로 단정해 경찰 수첩에 기입해 철저히 사찰한다….' 윤동주는 1942 129 창씨개명계를 연희전문학교( 연세대) 제출한다.

유학을 결심한 윤동주와 고종사촌 송몽규는 창씨개명을 하지 않고선 일본 대학에 입학할 없었다. 창씨개명계를 제출하기 닷새 그는 시를 원고지에 적는다.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만 이십사년 일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온다.


-'참회록', 1942.1.24.-



 

그가 '참회록' 쓰고 원고지 아랫부분 왼쪽에 끄적거려본다. '詩人의 告白'(시인의 고백). 연필이 쉬이 그를 놓지 않는다. 아래 적는다. '渡航 證明'(도항 증명). 일본으로 떠나는 도항을 증명한다. 시는 길을 일러주지 않는다. 그가 종이 위에 답한다. '詩란 不知道'(시란 부지도). '시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동주는 1942 고종사촌 송몽규와 일본행 배를 탔다. 언제인지 정확한 날짜는 확인되지 않는다. 교토제대 사학과에 입학한 송몽규, 릿쿄대 영문학과생 윤동주는 미리 유학와 있는 당숙 윤영춘을 만난다. "나는 둘의 손목을 잡고 우에노 공원과 니혼바시를 뜨락처럼 쏘다녔다. 문학과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가운데서 (…) 시와 조선이라는 이름은 말버릇처럼 동주의 입에서 자주 튀어나왔다."(윤영춘, '명동촌에서 후쿠오카까지', <나라사랑> 23 1976 여름호)

넉넉한 집안의 아들 동주는 대학노트를 끼고 강의실에 들어간다. 어느 바닥에 그려진 낯선 그림자처럼 부끄러움이 그를 길게 따라다닌다. 그런 동주는 잠이 들지 않고 원고지에 자신을 써내려갔다. 창밖으로 밤비가 속살거린다.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天命)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

생각해보면 어릴 때 동무들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沈澱)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쉽게 쓰여진 시', 1942.6.3.-




일본으로 건너오기 윤동주와 송몽규는 1938 언더우드 선교사의 아들 원한경이 교장으로 재직하는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했다. 일본의 탄압 정책으로부터 거리를 유지하며 자유로운 학풍 가운데 공부하고자 했다. 윤동주는 '어제도 가고 오늘도 / 나의 새로운 '('새로운 ') 잠시 그려보지만 중일전쟁이 확대되면서 다시 수난의 시간을 맞는다. 1941 3 조선어가 교육과정에서 완전히 사라진다. 1940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폐간된 이어 이듬해 4 문학잡지 <문장> <인문평론> 폐간된다. 윤동주가 존경한 한글학자 최현배 교수는 1938 11 강제 해직됐다가 도서관 직원으로 복직된다. 연희전문은 이제 수탈된 조국에서 숨을 트는 호흡기가 아니다. 대학 4학년 가을, 시인은 잃어버린 위에 섰다.

 

잃어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아갑니다.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

길은 돌담을 끼고 갑니다.

담은 쇠문을 굳게 닫아

길 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쪽에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길', 1941.9.31.-




꿈은 깨어지고

 

고향에 돌아온 날 밤에

내 백골이 따라와 한방에 누웠다.

어둔 방은 우주로 통하고

하늘에선가 소리처럼 바람이 불어온다.

어둠 속에 곱게 풍화작용하는

백골을 들여다보며

눈물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백골이 우는 것이냐

아름다운 혼이 우는 것이냐.

지조 높은 개는

밤을 새워 어둠을 짖는다.

어둠을 짖는 개는

나를 쫓는 것일 게다.

가자 가자

쫓기우는 사람처럼 가자

백골 몰래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에 가자.

-'또 다른 고향'-




 

 

 

윤동주는 중국 만주 간도의 명동마을에서 자랐다.

 

1917 1230 명동마을에서 태어나 1945 216 일본에서 옥사하기까지 그는 본토를 떠나 타지로 갔다. 만주 간도에서, 경성으로, 다시 일본으로. 그가 태어나고 자란 명동마을을 고 문익환 목사는 1976년 4월 <월간중앙>에서 이렇게 기억한다. 윤동주, 송몽규, 문익환은 1925 명동소학교에 입학했다.

 

"안수길의 '북간도'를 읽어보면, 한국인들은 북간도에서 중국인들에게 행패를 당해 망국민의 설움을 톡톡이 당한 것처럼 되어 있다. 물론 그런 곳도 적지 않았고 그런 사건도 있었다. 명동만은 그렇지 않았다. 명동에서 이야기된 일이 밖으로 새는 일이 없을 정도로 전 주민이 민족애로 뭉쳐 있었다. (…) 동주와 내가 졸업하던 1931년까지 명동학교는 행사 때마다 태극기를 걸고 애국가를 불렀다. 작문시간에는 어떤 제목이 나오든 조선독립으로 결론을 끌고 가지 않으면 제대로 점수를 못 받았을 정도였다. 망국의 울분을 짓씹으면서도 우리는 조국의 품 안에 안겨 있는 느낌이었다. 거기는 우리 선조들이 쌓았던 성터가 남아 있었고 땅속에서는 우리 선조들이 쓰던 활촉들이 무더기로 나왔고 절구 같은 생활도구들이 땅을 가는 보습에 걸려 나왔다. 거기는 남의 나라가 아니었다. 거기만은 조국이 살아 있었다."

 

윤동주의 아버지는 중국 베이징에 유학을 다녀온 명동학교 교원이었다. 그의 외삼촌은 김약연 목사. 김약연 목사는 1918년 한일병합 이후 최초의 독립선언서인 '무오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9인 중 한 명이다. 천주교 신부들로부터 협조를 거부당한 안중근이 명동마을 뒷산에서 권총 사격 연습을 할 수 있도록 돕기도 했다.

이준익 감독의 영화 <동주>에 두 명의 주인공이 출연한다. 동갑내기 고종사촌 송몽규와 윤동주. 둘은 명동소학교, 은진중학교, 연희전문학교, 일본 유학,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까지 함께했다. 시인과 무장투쟁 독립운동가, 가고자 하는 길은 달랐지만 그 길 끝은 죽음이었다. 둘은 문학을 사랑했다. 명동소학교 동급생인 시인 김정우의 기억에 따르면 윤동주와 송몽규는 5학년 때 잡지 <새 명동>을 몇 호 발간했다. 몽규는 동주보다 먼저 두각을 드러냈다. 1934년 12월 은진중학교 3학년, 열일곱 나이에 동아일보 신춘문예 콩트 부문에 '술가락'으로 당선된 것. 몽규가 당선된 그해 12월24일부터 동주는 시에 날짜를 기록한다.

 

"동주는 '대기(大器)는 만성(晩成)이지'라는 말을 가끔했다. 몽규를 의식하는 말이었다."

(고 문익환 목사, 1976년 4월 <월간중앙>)




송몽규, 윤동주, 문익환. 세 사람은 은진중학교에서 한 명의 은사를 만난다. 동경제대에서 동양사를 전공한 명희조 선생. 명희조 선생은 유학 시절 일본인에게 돈을 주지 않으려 전차를 타지 않았다. 명희조 선생은 몽규를 눈여겨봤다. 민족주의 정신과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세워진 은진중학교는 교실마다 태극기를 걸고 삼일절과 단군 기념일을 지켰다.

 

"명 선생이 몽규를 중국으로 보낸 일이 있었다. 그것이 중학교 3학년 때의 일이 아니었나 싶다. 나는 끝내 그가 무슨 사명을 띠고 중국으로 갔었는지 묻지 못하고 말았다. 그 일로 해서 몽규는 몹시 고생했고 기어이 은진중학교를 못 마치고 같은 용정에 있는 대성중학교를 마치고 연전(연희전문)으로 올라온다. 일본 경찰은 동주보다 몽규를 주목하고 있었으리라."

(문익환)




송몽규는 1935년 4월 4학년으로 진급하지 않고 난징에 있는 중앙군관학교 낙양분교의 한인반으로 떠났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 김구 선생이 반일 민족독립전쟁에 나서려는 군사 간부를 양성하는 학교였다. 명희조 선생의 소개였다. 몽규는 신춘문예 당선으로 열린 출세의 길 대신 다른 길을 택했다.

 

"1935년 은진중학교에 다니던 윤동주, 문익환, 송몽규는 각기 다른 선택을 한다. 3월에 윤동주는 용정중앙교회의 주일학교에서 유년부 학생을 가르치기 시작했고 문익환은 상급학교 진학에 대비해 5년제인 평양숭실중학교로 먼저 편입했다. 당시 연희전문 같은 상급학교에 진학하려면 5년제 중학교를 졸업해야 했다. 4년제 중학교를 나오면 상급학교에 진학하기 불리했다. 송몽규는 중국으로 떠났다."

(김응교, <처럼>, 문학동네, 2016)




윤동주는 문익환보다 늦은 1935년 9월 편입시험을 보고 평양 숭실중학교에 입학한다. 민족애국주의 학교를 다녔던 두 사람은 침략된 조국의 좌절을 처음 맞닥뜨린다. 당시 기독교는 신사 참배파와 반대파로 갈등을 겪었고 1935년 12월4일 숭실중학생들이 신사 참배를 거부하고 해산했다.

 

"학생들은 모두 와카마쓰 신학교 앞에 모였다. 서울 남산의 조선신궁 다음으로 크고 장엄하게 지었다는 평양신궁은 모란봉 산정 부근에 위치했다. 신궁에 올라가기 위해서 가파른 돌계단을 한참이나 올라가야 했다. 돌계단을 오르고 있을 때 이미 참배를 마친 다른 학교 학생들이 찡그린 표정으로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숭실학교는 참배 대열의 맨 꼴찌였다. 계단의 한가운데쯤 올라갔을 때였다. 당시 5학년이었던 학생장 임인식 형이 갑자기 '제자리에서' '뒤로돌아' 고함쳤다. 학생들은 마치 일시에 전류가 통한 듯 '와' 하는 함성과 함께 그대로 돌계단을 뛰어 내려오고 말았다. 그것은 이심전심의 무서운 결속이었다. 이 일로 숭실학교의 조지 S. 매퀸 교장(한국명 윤산온)은 다음해인 1936년 1월20일 파면됐다. 그 며칠 후 2월 초였다. 윤 교장의 파면 소식을 듣고 학생들이 두 명씩 세 명씩 교정에 모여들었다. 새로 학생장이 된 유성복 형의 인솔로 교장을 내놓으라며 데모가 시작됐다. (줄임) 이 일로 인해 숭실학교는 무기 휴교가 되고 나를 포함한 주동 학생들이 피검되었다. 당시 급우였던 애국 시인 윤동주는 광명학교로 옮겨야 했다."

(김두찬, '혹독했던 신사참배 강요', <동아일보> 1982년 8월16일)




열아홉 윤동주는 깊은 겨울밤 꺼진 화독을 품에 안았다. 재만 남은 가슴으로, 문풍지 소리에 떠는 가슴으로 시를 쓴다.

 

소리 없는 북

답답하면 주먹으로 뚜드려보오

그래 봐도 후-

가-는 한숨보다 못하오.

-'가슴 1', 1936.3.25.-




불 꺼진 화독을

안고 도는 겨울밤은 깊었다.

재만 남은 가슴이

문풍지 소리에 떤다

-'가슴 3', 1936.7.24.-




윤동주와 문익환은 1936 3 평양 숭실중학교를 자퇴하고 간도의 용정으로 돌아온다. 둘은 경영난에 허덕이다가 일본인에게 매각된 광명학원 중학부에 입학한다.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자퇴한 학생들이 조선인의 황국화를 위해 세워진 학교에 입학한 것이다. 문익환 목사는 "솥에서 뛰어내려 숯불에 내려앉은 "이라고 회고한다. 한달 중국 산둥성 지난(濟南)에서 지난 주재 일본 영사관 경찰부에 체포된 송몽규는 일본 경찰 블랙리스트에 기록된다. 함경북도의 어느 교도소에 투옥된다.

 

'이런 날에는/잃어버린 완고하던 형을/부르고 싶다.'

('이런 날', 1936.6.10)




자유로운 학풍, 연희전문에 입학

곧 조선어 교육이 금지되고

암흑의 시기에 오래 침묵한다

시인은 창씨개명계를 내고

'참회록' 시로 부끄러워한다

동주는 시집을 출간하려다

원고를 후배 정병욱에게 맡긴다

후배는 시집을 어머니에게 부탁하고

땅속 항아리에서 기다린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무서운 시간

 

1938년 윤동주와 송몽규는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한다. 윤동주는 기숙사와 하숙 생활을 번갈아 했는데 1940 학년 아래인 정병욱을 기숙사에서 만난다. 윤동주가 4학년, 정병욱이 2학년으로 진급하던 1941 , 기숙사를 떠나기로 하고 누상동 마루터기에 있는 하숙방을 구했다. 달이 지나고 하숙집 사정으로 떠나야 신세가 되어 하숙을 구하러 길을 나선다.

 

"누상동에서 옥인동 쪽으로 내려오는 길목 전신주에 우연히 '하숙 있음'이라는 광고 쪽지를 발견했다. 누상동 9번지였다. 그길로 우리는 그 집을 찾아갔다. 그런데 집주인의 문패는 김송이라 씌어 있었다. 우리는 서로 바라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설마 하고 대문을 두들겨 보았더니 과연 나타난 집주인은 소설가 김송씨 바로 그분이었다. 1941년 5월 그믐께 우리는 소설가 김송씨의 식구로 끼어들어 새로운 하숙 생활이 시작되었다. 김송씨의 부인 조성녀 여사는 성악가로서 아름다운 목소리를 우리에게 가끔 들려 주셨고 저녁 식사가 끝나면 대청마루에서 홍차를 마시며 음악을 즐기고 문학을 담론하기도 했었다.

 

연희전문학교 학생 시절의 윤동주(왼쪽)와 정병욱. 정병욱은 1942년 4월 윤동주가 일본 릿쿄대학에 입학하기 전에 건네받은 자필 시고를 고향의 어머니에게 맡겼다. 이 시집은 1948년 윤동주 사후에 출간된다.

 

동주의 시집 제1부에 실린 많은 작품들이 1941년 5월과 6월에 쓰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 비록 쓸모는 없어도 마음을 주고받는 글벗이 곁에 있었고 우울한 세태 속에서 환대하는 하숙집 주인 내외분을 만난 기쁨 가운데 시를 쓸 수 있었다. (…) 빈틈없고 알찬 일상생활에 난데없는 횡액이 닥쳐왔다. 당시에 요시찰 인물로 되어 있었던 김송씨가 함흥에서 서울로 옮겨온 지 몇 달이 지난 후인지라 일본의 고등계(지금의 정보과) 형사가 거의 저녁마다 찾아오기 시작했다. 하숙집 주인이 요시찰 인물인데다가 그 집에 묵고 있는 학생들이 연희전문학교 문과 학생들이기 때문에 그들의 눈초리는 날이 갈수록 날카로워졌다. 무시로 찾아와서는 서가에 꽂혀 있는 책 이름을 적어가고 고리짝을 뒤지고 편지를 빼앗아가는 법석을 떨었다."

(정병욱, <바람을 부비고 서 있는 말들>, 집문당, 1980)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가슴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슬히 멀 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별 헤는 밤', 1941.11.5.-




사람은 1941 가을학기가 시작될 소설가 김송씨의 집을 나와 북아현동의 하숙집에 살았다. ' 헤는 ' 이때 쓰인 시다. 윤동주는 정병욱에게 시를 보였다. "어쩐지 끝이 허한 느낌이 드네요." 윤동주는 정병욱의 말을 듣고 마지막 줄을 썼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게외다.

 

"현재 시집의 제1부에 해당하는 부분의 원고를 정리하여 '서시'까지 붙여서 나에게 한 부를 주면서 '지난번 정형이 별 헤는 밤의 끝부분이 허하다고 하셨지요. 이렇게 끝에다가 덧붙여 보았습니다' 하면서 마지막 넉 줄을 더 넣어주는 것이었다. 내 말을 듣고 이 마지막 넉 줄을 덧붙인 것이 과연 이 시를 살렸는지 사족이 되게 하였는지는 독자들이 판단할 일이려니와 나의 하찮은 충고에도 귀를 기울여 존중할 줄 아는 태도란 시인으로서는 매우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에 동주의 너그러운 아량에 다시금 머리가 수그러지고 존경하는 마음이 새삼스레 우러나게 된다."

(정병욱, 위의 책)




윤동주는 연희전문을 졸업하면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엮은 자필 시고 3부를 만들었다. 부는 이양하 선생에게, 부는 정병욱에게 주고 나머지 부를 본인이 가졌다. 시집의 이름은 '병원'으로 지으려다 바뀐 것이다. 세상이 온통 환자투성이여서 앓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는 뜻이다. 이양하 선생은 검열에 통과할 없다며 출판 보류를 권했다.

윤동주가 1942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고 독립운동 혐의로 검거된 반년이 지나 정병욱도 학병으로 끌려갔다. 정병욱은 어머니에게 시집을 맡기며 "나나 동주가 살아서 돌아올 때까지 소중히 간수" 달라고 부탁한다. 혹시 죽고 돌아오지 않더라도 조국이 독립되면 시집을 연희전문학교로 보내 세상에 알려달라는 유언이었다. 정병욱의 어머니는 전남 광양시 망덕리 마루 아래에 흙을 파내 명주 보자기로 겹겹이 시집을 묻었다. 땅속에 오래도록 묻힌 시집은 1948 정음사에서 출간된다.

 

광명중학교 재학 시절의 윤동주(왼쪽 끝)와 고종사촌 송몽규(오른쪽 끝). 송몽규는 대성중학교에 다니던 시절로 추정된다. <한겨레> 자료사진

 

 

슬픈 족속

 

윤동주는 릿쿄대학을 자퇴하고 1942년 10월1일 교토의 도시샤대학에 입학한다. 송몽규와 윤동주의 집은 걸어서 4~5 거리. 1942 겨울 윤동주를 만난 당숙 윤영춘의 기억이다.

 

"그날 밤 집에 돌아와 밤이 깊도록 시에 대한 이야기로 일관했다. 독서에 너무 열중해서 얼굴이 파리해진 것을 퍽이나 염려했다. 6조 다다미방에서 추운 줄도 모르고 새벽 두시까지 읽고 쓰고 구상하고. 이것이 거의 그날그날의 과제인 모양이다."

(윤영춘, '명동촌에서 후쿠오카까지')




이듬해 여름 일본 경찰은 사람을 체포했다. 체포된 시기는 송몽규 1943 710, 윤동주 714. 둘을 포함해 같은 공부 모임에 있던 학생 7명이 체포됐다. 죄명은 재경도 조선인 학생 민족주의 그룹 사건 책동. 체포된 윤동주는 교토경찰서 형사의 지시로 자신의 원고를 일어로 번역했다. 징역 2년을 선고받은 윤동주는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됐다. 판결은 이러하다.

 

"소무라 무케이(송몽규)와 소화 18년(1943) 4월 중순경 같은 사람의 하숙집으로부터 교토시 사교쿠 시타시라가와 히가시히라이초 60번지 시미즈 에이치 댁에서 회합을 하고 같은 사람에겐 조선 만주 등에 있는 조선 민족에 대하여 차별 압박의 근황을 청취하면서 서로 교환하며 논쟁과 비난을 격렬히 하면서 함께 조선에서의 징병제도에 관하여 민족적 입장에서 서로 비판하며(…) 위 사람과 찬드라 보스를 지도자로 하는 인도 독립운동의 대두에 대해 논의하고…."

 

윤동주의 독립운동 혐의가 어느 층위의 것인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송몽규와 주도한 것인지, 몽규의 모임에 참석만 것인지는. 해방을 앞둔 1945 216 윤동주는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사망한다. 당숙 윤영춘이 형무소를 찾아갔다.

 

"죽은 동주는 후에 찾기로 하고 산 사람부터 먼저 찾아야겠다는 생각에 몽규를 먼저 찾았다. (…) 몽규가 반쯤 깨어진 안경을 눈에 걸친 채 내게로 달려온다. 피골이 상접이라 처음에는 얼른 알아보지 못하였다. 어떻게 용케도 이렇게 찾아왔느냐고 여쭙는 인사의 말소리조차 저세상에서 들려오는 꿈같은 소리였다. 입으로 무어라고 중얼거리나 잘 들리지 않아서 왜 그 모양이냐고 물었더니 '저놈들이 주사를 맞으라고 맞았더니 이 모양이 되었고 동주도 이 모양으로 하고' 말소리가 흐려졌다. 물론 이때는 우리말로 주고받은 것이다. (…) 일본 청년 간수 하나가 따라와서 우리에게 하는 말이 '동주가 죽었어요. 참 얌전한 사람이…. 죽을 때 무슨 뜻인지 모르나 외마디 소리를 높이 지르면서 운명했다'며 동정하는 표정을 보였다."

(윤영춘, 위의 책)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1943 64, 1944 131, 1945 259명이 옥사했다. 윤동주가 죽은 열흘 뒤인 37 송몽규도 숨졌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일경(일본 경찰)은 이 남의 나라란 어느 나라를 말하는 거지? 이렇게 물었을 테고 동주는 그렇다고 머리를 끄덕이고 죽은 것이 아닐까? '너는 유태인의 왕이냐?' 하고 묻는 빌라도의 물음에 '네 말이 맞다'고 하고 십자가를 진 예수의 모습이다. 빌라도가 예수의 대답에 담긴 깊은 뜻을 알려고도 하지 않았듯 일경도 동주의 말뜻을 알려고도 하지 않은 것이 아닐까. 동주가 '육첩방은 남의 나라'라고 했을 때 그는 일차원적인 고향만을 생각한 것이 아니었을 텐데."

(고 문익환 목사)


 

윤동주의 장례는 1945년 3월6일에 치러진다. 윤동주는 가장 몰락한 시대에 서정시를 썼다.

 

"서정시는 가장 외소할 때 가장 거대하고 가장 무력할 때 가장 위대하다."

(신형철, <몰락의 에티카>, 문학동네, 2008)




시인 윤동주의 죄는 '끝없이 부끄러워했다는 '이다.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서시')




*기사는 <처럼>(김응교, 문학동네, 2016), <바람을 부비고 있는 말들>(정병욱, 집문당, 1980), <월간중앙>(1976 4월호) 등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소제목은 윤동주의 제목을 차용하였습니다.

 

한겨레신문 [토요판] 특집

등록 :2016-03-04 22:10수정 :2016-03-05 11:16

박유리 기자 nopimuli@hani.co.kr

 

Posted by 망중한담

댓글을 달아 주세요

민심, 다수의 의지가 정의롭고 옳다는 말은 정당할까?

과연 민심이 하늘의 뜻, 말하자면 의(義)롭고 순리(順理)적인 것일까?

민심은 항상 선(善)하고 옳은 것일까?

 

대중은 앵무새와 선동에 의해 길들여진다.

 

파울 괴벨스 ( Paul Joseph Goebbels )

 

대중의 관심과 의지를 조종하고 통제하려는 시도는 고대사회부터 중국이나 로마, 이집트 등 절대 왕정이 시대를 지나 현재에 이르기까지 존재하고 있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지능적이고 대담하게 진화했다.

현대의 민심의 조작과 선동에 있어서는 '일반 대중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원시적이다. 지식인들이 반대해도 무시하고 모든 문제를 단순하게 축소시키고 단순한 언어와 이미지로 끊임없이 반복하면 여론을 움직일 수 있다'는 나치 독일의 경우가 대표적인 예다.

 

트럼프의 교훈

 

이미지출처 : 한국일보

 

미국 공화당의 경선 후보 '트럼프의 돌풍'이 화제다. 트럼프는 선거전략 면에서도 주목할만 하지만 그의 공약이나 정치적 구호를 관찰해 보면 바로 '앵무새와 선동'이 얼마나 '민심'을 바꿀 수 있는지가 드러난다. 우리에게는 결코 낯설지 않은 '내가 한다니깐요'와 '남 탓'으로 일으키는 돌풍이다.

인간은 쉬운 것, 편한 것, 단 것에 무장해제되고 만다.

쉬운 것, 편한 것, 단 것을 좋아하며 자위(自慰 스스로 위안을 삼음) 것이 인간의 속성이다. "내가 다 해 줄께"와 "테러 때문에, 외국인 때문에, 반대파 때문에, 진실하지 못한 자들 때문에"가 "같이 노력하자"와 "현실을 직시하고 각성하자" 보다 더 큰 지지와 열광을 이끌어 내는 민심 조작과 선동의 마술이 될 수 있는 이유다.

(관련 글 ▶한국일보)

 

현대사회의 민심은 언론이 만든다.

 

 

현대인은 대부분의 사회정보를 언론을 통해 얻는다. 그만큼 언론이 현대인의 판단기준의 중심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일 언론이, 그것도 담합의 형태로, 알릴 것에 침묵하고 사실을 왜곡하고 결론을 일정한 방향으로 몰고 간다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원시적인' 일반 대중의 의지는 속절없이 조작되고 선동되어 버리고 마는 것이다.

언론이라는 '권위'와 선동이라는 '달콤함'의 옷을 입고 '자위'하며 스스로의 의지가 발가벗겨진 채로 환호하는 것이다.

 

여론조사 결과로 민심을 알 수 있는가

 

 

선거철이 되면서 거의 매일 여론조사 결과가 쏟아진다. 이른바 '민심'을 조사했다는 것이다. 그 와중에 납득하기 어려운 상황이 종종 목도된다. 서로 다른 조사기관에서 실시한 같은 타이틀의 여론조사 결과가 차이가 나거나 심지어는 아예 상반되는 결과까지 나오는 경우다.

같은 주제에 대한 '민심'이 이렇게 달라질 수 있는가에 대한 해답은 의외로 단순하고 명료한 것이었다.

(관련 글 ▶여론 조작 저널리즘 ▶뉴스1 '여론조작 조사')

 

질문에 따라서 답이 달라진다.

설문조사는 통상 '객관식', 말하자면 질문에 대해 맞거나 비슷하다고 생각하는 예문을 선택하게 되어 있다. 여기에 함정이 있는 것이다.

 

천심이 떠난 민심

 

더 이상 민심은 천심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 시대, '원시적인 일반대중'의 시대다.

달콤함과 편안함을 탐닉하며 의지를 발가벗은 원시인들에게 '의지'란 불편하고 힘들고 쓴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조지 오웰의 통찰은 현실이었다.

순천응인(順天應人)을 역설한 맹자가 울고 오웰은 웃는 천심배반(天心背反)의 시대다.

맹자(孟子)

Posted by 망중한담

댓글을 달아 주세요

초등학교 입학식 날, 그 때의 나는..

이름표와 하얀 손수건을 가슴에 달고 약간은 신나고 약간은 어리둥절했던 날.
각자 새 옷과 새 신으로 무장하고 막 녹기 시작한 운동장에 섰던 날.
철봉대 한켠에서는 그새 싸우는 아이들로 소란이 있던 날.
두 볼이 유난히 통통하고 불그레한, 종아리도 두 볼 만큼 통통했던 담임 선생님이 왠지 믿음직했던 날.
그새 가까와진 아이들끼리 짹짹거리면서 교실을 둘러보던 '국민학교' 입학식.

이미지출처 sbs

다시 돌아가고픈 그시절..
Posted by 망중한담

댓글을 달아 주세요

위안부 합의, 종교단체 중 조계종만 침묵

천주교주교회의•사제단•예장통합•기장 등' "무효" 촉구… 불교 "신년회견 때 낼지 논의중"

병신년 벽두부터 '한일위안부합의'에 대한 국내의 대표적인 종교 교단에서 비난과 성토가 쏟아진 가운데 유독 대한불교 조계종만 침묵을 지키고 있다. "아직 때가 아니다, 고려해야 할 부분이 있다"는 해명은 결국 정부의 정치적 입장을 전제로 한다는 것이다.

종교는 정치 이전의 '원초적이고 궁극적인 진리'를 숭상하고 지향하는 것을 그 존재 기반으로 한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은 국내의 불교계에 대해서도 말살정책을 폈다. 혼인하지 않는 것을 법통으로 고수해 온 불교 승려들을 강제로 결혼시켜 '대처승'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중이 결혼하는 것'이 왜 문제일까? 결혼이란 가족이 생긴다는 것이며, 세속 인연의 질곡에 빠진다는 것이다. '출가수행'이란 궁극의 진리를 탐구하고 체득하기 위해서 '모든 세속과의 인연을 끊는 것'을 의미하며, 정통 불교는 모두 이 법도를 선택하고 유지해 온 것이다.

고구려 때 처음 이 땅에 불교가 들어 온 이후로 수 많은 종사가 나와 선풍을 드날리며 모진 조선조의 억불정책과 일제의 말불정책에도 꿋꿋하게 명맥을 유지해 온 것이다.

그 바탕에는 세계적으로도 정평이 나 있었던 '세속과 야합하지 않는' 한국불교의 선풍과 선지식, 조사들의 기개가 법통으로 이어져 온 뿌듯한 역사가 있었다.

오늘날의 조계종이 선풍과 조사는 자취를 감추고 권력과 부에 야합하는 배부른 사판(事判)들의 숟가락 만이 난무하는 모습으로 보이는 것은 과연 착시현상일까..? <편집자 주>

 

한일 정부의 위안부 합의에 대해 천주교와 기독교 등 종교계 대부분이 전면 무효를 촉구하는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과 달리 불교계에서만 아직 공식적인 입장을 내지 않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그 배경에 의문이 나오고 있다.

지난해 12월 28일 한일 외교장관이 기습적으로 위안부 문제를 합의한 이후 종교계에서는 이를 규탄하는 성명을 연쇄적으로 발표했다. 기장총회(12월29일), 예장통합 총회(1월4일), 천주교주교회의(1월4일) 등 보수적 교단인 예수교장로회 통합 총회마저도 이번 합의에 목소리를 냈다. 이에 반해 국내에서 가장 큰 종교교단의 하나인 대한불교조계종은 아직 공식 입장을 내지 않았다.

조계종은 오는 13일 신년기자회견에서 입장을 내놓을지 여부조차 결정하지 못한 상태이다. 윤효원 조계종 홍보팀장은 6일 미디어오늘과 인터뷰에서 "오는 13일 예정돼 있는 신년 기자회견에 담을 내용을 보고 중이며, 확정하고 있는 단계"라며 "(위안부 합의에 대한 견해를 담을지) 아직 확정되지 않은 것을 말하기 곤란하다"고 밝혔다.

다른 종교 교단은 대부분 입장을 내놓은 것에 비해 늦은 것 아니냐는 지적에 대해 윤 팀장은 "다른 교단이 입장을 낸다고 우리도 바로 내야 하는 것은 아니다"며 "우리도 나름대로 준비중이며, (여러) 의견을 담고 하느라 바쁘기도하며, 우리는 (결정) 단계가 다르다"라고 답했다.

윤 팀장은 "우리도 고민하고 있으며 검토, 성안 중"이라고 말했다. 박근혜 정부 눈치를 보는 것 아니냐는 의심에 대해 윤 팀장은 "우리가 눈치보고 하지 않는다"며 "언론 입장에서 왜 이리 늦느냐고 하는 것은 언론 입장이지만 우리 차원에서 늦은 것은 아니다"라고 밝혔다.

대한불교조계종이 지난 4일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전통문화예술공연장에서 조계종 중앙종무기관 및 산하단체 종무원의 시무식을 열었다. 사진=조계종

다른 홍보팀 관계자는 이와 관련해 "조심스러운 부분도 있다"며 "여러 의견 수렴하는 과정에 있고, 종단의 공식적 입장은 아직 결정이 안된 것 같다"고 말했다.

한편,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총회장 최부옥 목사교회와사회위원장 김경호 목사-이하 기장총회)는 그 이튿날인 29일 가장 먼저 성명을 내어 "위안부 문제 법적 책임 배제된 합의는 국민에 대한 기만이다"라고 비판했다. 기장 총회는 "일본은 위안부 문제의 가해국으로 자인하고 법적 책임에 성실히 임하라"며 "박근혜 정부는 일본에 대한 굴욕적인 외교를 그치고 위안부 할머니의 명예회복을 위한 외교를 수행하라"고 촉구했다.

또한 기독교 교단 가운데 보수적으로 평가받아온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약칭 예장 통합)도 독도영토수호 및 동북아평화위원장 유종만 목사와 총회 인권위원장 김성규 목사의 명의로 지난 4일 공식 입장을 내어 한일 정부의 위안부 합의를 규탄했다. 예장 통합은 성명에서 이번 합의를 두고 "피해 당사자들의 참여와 그들의 정의를 구현하지 못했고, 일본의 역사적 과오에 대한 국가 차원의 법적 책임을 규명하지 못하므로 외교적 담합"이라고 평가했다.

이들은 '최종적 불가역적 해결의 의미를 담고 있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역사적 과오에 대한 은폐와 축소를 넘어 기억의 말살의 위험을 그 안에 내포하고 있다"며 "'평화의 소녀상' 철거를 약속했다는 것 역시 이번 합의의 의도와 양국 정부의 역사관을 의심하게 만드는 결정적 근거"라고 비판했다. 이에 따라 이들은 이번 합의에 대해 "근본적으로 잘못된 합의"라며 "'기억과의 투쟁'을 제어하고 기억의 성찰을 위한 상징들을 말살하려는 그 어떤 행위도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예장통합 총회의 조상식 사회봉사부 실장은 6일 미디어오늘과 인터뷰에서 "발표한 성명을 9일자로 발행된 기독공보에 싣고, 이후 후속조치도 논의중"이라며 "오는 3월 2일 (총회 차원에서) 위안부 수요집회에 참석한 뒤 오후엔 관계 세미나를 열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밖에 천주교도 주교회의 이름으로 입장을 냈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는 4일 정의평화위원장 유흥식 주교 명의로 성명을 내어 이번 합의를 두고 "인류의 보편 가치인 인간의 기본권을 한일 양국의 현안 해결이라는 이름 아래 경제와 외교의 논리만으로 환치시킨 결과물"이라며 "종군위안부의 인권을 또다시 무참히 짓밟았다"고 비판했다.

한일 위안부 협상폐기 대책위원회 소속 대학생들과 시민들이 5일 오후 서울 중학동 일본대사관 앞 평화의 소녀상 앞에서 촛불 시위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주교회의는 "법적 책임을 회피했기에, 진정한 회개와 사과로 받아들일 수 없으며, 피해 당사자의 동의 없이 이루어진 종군위안부에 관한 최종적·불가역적 해결 선언은 인류의 양심과 역사적 경험을 거스르는 위험한 도전"이라고 지적했다. 이에 반해 독일은 아직도 전쟁범죄에 대한 사과와 반성을 계속하고 있을 뿐 아니라 나치에 의한 인권말살 정책의 피해자들에 대한 위로와 배상을 새롭게 시도하고 있다는 점도 주교회의는 소개했다.

주교회의 "한일 양국의 정부 관계자들이 이 문제를 원점에서부터 재검토할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고 밝혔다.

주교회의 외에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도 지난 4일 저녁 열린 시국미사에서 전주교구의 김창신 신부(노동자·이주사목담당)가 이번 합의를 비판하기도 했다. 김 신부는 "이분들의 인권을 돈 몇 푼으로 치부해버린 것"이라며 "돈 줄 테니까 위안부 소녀상 같은 것을 치워버리라는 요구에 긍정적으로 화답한 우리 정부와 대통령, 여당이 국민과 나라를 위해서 살아있는 사람들이냐"고 반문했다. 김 신부는 "이번 합의문은 그 자체로 월권이며 원인무효"라며 "현재 우리는 일본통치의 식민지가 아닌 박근혜 통치의 식민지에서 살고 있는 듯하다"고 성토했다.

미디어오늘

입력 : 2016-01-06 14:44:35

노출 : 2016.01.06 15:08:48

조현호 기자 | chh@mediatoday.co.kr

조현호 기자의 트위터를 팔로우 하세요. @ mediacho

Posted by 망중한담

댓글을 달아 주세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라

 

문명은 편리함이다.

 

문명의 발달은 도시의 발달과 그 궤를 같이 한다.

현대의 문명을 누린다는 것은 도시인으로 사는 것을 의미한다.

도시는 문명이다.

 

편리함은 육신의 영역이다.

 

육신이 편안해지면 영혼이 나태해 진다.

영육은 한 시간대 위에 표리의 관계로 접합되어 있다.

육감의 너머, 심연한 영역이 영혼의 자리다.

 

이따금씩이라도

육신의 영역으로부터 일탈할 필요가 있다.

저 심연의 중심에 있는 '참 나'를 만나볼 필요가 있다.

 

 

단 한시도 내려 놓지 못하고

하늘을 이고 살면서도

도시는 저 하늘을 바라볼 여유를 주지 않는다.

 

문명은 도시인에게 편리함의 대가로 대부분의 시간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본다.

문명으로부터 잠시 시선을 돌려

육신의 영역을 떠나 본다.

 

- 煩解 -

Posted by 망중한담

댓글을 달아 주세요

잘 사는 방법 - 28가지

 

1. 누워있지 말고 끊임없이 움직여라.

움직이면 살고 누우면 죽는다.

 

2. 하루에 하나씩 즐거운 일을 만들어라.

하루가 즐거우면 평생이 즐겁다

 

3. 마음에 들지 않아도 웃으며 받아 들여라.

세상 모두가 내 뜻대로 되는게 아니다.

 

4. 자식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지 말라.

아무리 효자도 간섭하면 싫어한다.

 

5. 젊은이들과 어울려라.

젊은 기분이 유입되면 활력이 생겨난다.

 

6. 한번 한 소리는 두번이상 하지 말라.

말이 많으면 따돌림을 받는다.

 

7. 모여서 남을 흉보지 말라.

나이 값하는 어른만이 존경을 받는다.

 

8. 지혜롭게 처신하라.

섣불리 행동하면 노망으로 오해 받는다.

 

9. 성질을 느긋하게 가져라.

급한 사람이 언제나 망신을 한다.

 

10. 나이가 들수록 냄새가 나니까 목욕을 자주 하라.

그래야만 사람들이 피하지 않는다.

 

11. 돈이 재산이 아니라 사람이 재산이다.

돈 때문에 재산을 잃지 마라.

 

12. 좋은 책을 읽고 또 읽어라.

마음이 풍요해지고 치매가 예방된다.

 

13. 대우 받으려고 하지 마라.

어제 다르고 오늘이 다르다.

 

14. 먼저 모범을 보여라.

그래야 젊은이들이 본을 받는다.

 

15 주는데 인색하지 마라.

되로 주면 말로 돌아온다.

 

16. 하루에 10분씩 웃어라.

수명이 연장되고 인자한 어른으로 기억된다.

 

18. 걱정은 단명의 주범이다.

걱정할 가치가 있는 일만 염려하라.

 

19. 남의 잘못을 보며 빈정대지 말고

잘하는 점만을 보며 칭찬을 하라.

 

20. 세상을 비관적으로 보지 말라.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밝은 눈으로 바라보라.

 

21. 좋건 나쁘건 지난 날은 무효다.

소용없는 일에 집착하지 말라.

 

22. 누가 욕한다고 속상해 하지 말라.

참고 스스로 자신을 발견하라.

 

23. 고마웠던 기억만을 간직하라.

괴로웠던 기억은 깨끗이 지워버려라

 

24. 즐거운 마음으로 잠을 자라.

잠 속에서도 행복한 꿈을 꾼다.

 

25. 지혜로운 사람과 어울려라.

바보와 어울리면 어느새 바보가 된다.

 

26. 그날에 있었던 좋은 일만 기록하라.

그것이 행복의 노트다.

 

27. 작은 일도 크게 기뻐하라.

기쁠 일이 늘어난다.

 

28. 내가 가지고 떠날 것은 없다.

남기고 갈 것이 있는가를 살펴라.

Posted by 망중한담

댓글을 달아 주세요



"); wcs_d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