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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B - 아름다움 (Beautiful)/생각/마음/영혼

[크리스천과 눈물] 신은 인간에게 선택의 자유와 책임의 의무를 부여했다.

나는 기독교, 특히 개신교를 싫어했다.

무신론자인 아버지와 절에 다니는 어머니 영향 때문일 수도 있지만, 청소년기 말미인 10대 후반에 접한 불교 철학에 매료된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성스러워야 할 교회나 집회에 모여 소리지르고 손뼉치고 노래를 부르다 울부짖는 그들의 모습은 내게 영락없이 ‘미친 자들’로 보여질 수 밖에 없었고, 너무도 혐오스러운 모습이었다.

단순히 개신교를 싫어한 정도가 아니라 열심히 교회 다니는 사람들과 논쟁이나 토론을 벌여 그 중 약 30명 정도는 교회에 다니지 않게 만드는 전과도 세웠다.

그렇게 수십년을 보내고 50 나이를 훌쩍 넘긴 어느 날, 잠깐 교류가 있었던 사람으로부터 14년 만에 처음으로 전화가 왔다. 14년 만에 만난 그녀의 청으로 다른 사람과의 면담을 돕기 위해 가던 길에 갑자기 그녀가 나에게 양해를 구했다. 30분 정도 꼭 해야할 일을 먼저 하고 가야 된다는 말이다. 

중간 과정이 있었지만 어쨌든 그날 나는 대림동의 어느 건물 9층에 있는 작은 교회에 앉게 되었다. 역시 노래부르고 손뼉치고…

너무도 싫은 자리인지라 예배실 맨 뒤쪽에 고개를 숙이고 앉아서 빨리 30분이 지나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들리는 소리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남자가 떠들다가 잠시 후 여자 목소리가 잠깐 들리더니 그 여자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 때나 지금도 무슨 노래인지 알지못하는 노래가 한 소절도 지나지 않았을 것 같은 짧은 시간, 갑자기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아무 감정도, 느낌도 없이 갑자기 눈물이 흐르기 시작하더니 예배가 다 끝나고 나서도 멈추지를 않았다. 창피스럽고 괴이한 마음에 닦고 또 닦아도 소용이 없었다.

부활절 전 사순절 기념 부흥성회 마지막 날, 금요일 저녁 예배라고 했다. 이런저런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이 생기기도 했고 이야기거리가 있기는 하지만, 그 때부터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 날의 눈물은 그로부터 2년 정도 매일 눈물 속에 사는 생활의 신호였다. 2년 동안은 미친 사람이 되었다. 해본 적도 없고 들어본 적도 내가 아침 저녁으로 두시간 넘게, 매일 네 시간 이상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다.

대림동의 그 교회와 여의도에 있는 대형교회 두 군데를 다녔는데, 공부는 주로 시스템이 잘 갖추어진 여의도에서 했다. 성경학교, 성경대학, 성경대학원을 마치고 나서도 여전히 뭔가 부족한 듯 해서 다시 그 과정을 한번 더 반복헸다.

신구약 필사를 세 번 했고, 5일짜리 성령학교 두 번, 역시 5일짜리 영적전쟁 프로그램에 두 번 참여했고, 132일 간 철야기도를 했다. 문제 덩어리인 대형교회의 장점이라면 매일 철야기도와 새벽기도를 드릴 수 있다는 것이다.

난생 처음 교회에 나간 지 3주만에 방언을 하게 됐는데, 나는 그후로도 몇 달 동안 내가 하는 이상한 짓이 방언이라는 걸 인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주변 성도들이 나를 향해 받아들여야 한다고 충고했다. 

 

 

 

그 날부터 3년 정도 늘 정수리 부근에서부터 양쪽 어깨쭉지 견갑골 사이까지 뜨겁고 찌르르한 강한 느낌이 계속되었다.

매일 주기도문 1000번 암송하기도 시도했고, 기도를 위해 마음을 가다듬으면 정수리 위쪽 공중이 열리며 십자가에 매달려 피를 흘리는 남자의 모습이 나타났고, 어느날부터 그 피가 내 머리 위로 떨어지고 온 몸을 적시는 생생한 느낌이 느껴지더니 그 분의 고통이 그대로 내게도 느껴지면서 너무도 큰 고통과 슬픔에 소리내서 울부짖는 날들이 계속되었다.

낮에는 거의 고장난 수도꼭지 처럼, 시도 때도 없이 갑자기 눈물이 주르륵 흘러 내리고 기도만 드리려고 하면 환상이 나타나서 울부짖는 일들이 매일 계속 반복돠었다.

첫 눈물 이후 4년 정도는 그렇게 보낸 것 같다. 그토록 싫어하던 교회에 완전히 미쳐버린 것이다.

그렇게 4년을 보내고 있던 어느 날부터 조금씩 교회와 목회자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에게 들리는 하늘의 음성과 그들이 듣고 실천한다는 음성이, 그 내용이 왜 상반되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서 그 교회에 다니지 않게 되었다. 대형교회의 해악에 대해 그처럼 신랄한 비판의식을 갖게 되는 것은 더 이상 대형교회에 다닐 수 없다는 말이다. 

 

집 주변을 시작으로 작은 동네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한군데를 세 번 이상 가지 않았다. 많으면 두 번, 아니면 한 번만 갔다. 그렇게 해서 150 군데가 넘는 교회를 전전했다. 그리고 그 만큼의 목회자와 설교와 성도들을 직접 만날 수 있었다.

그 중에는 매일 매 시간 ‘하나님과 대화한다’는 목회자도 있었다. 부부 목사인데, 남편은 담임목사 직분을 맡고 아내는 교육을 전담하고 있었다. 매일 하나님과 대화한다는 이는 아내인데, 그 것을 핵심 소재로 심야 집회도 운영한다.

매일 매시 하나님께 여쭙고 듣는다는 그녀는 안타깝게도 사석에서나 공개석상에서 문재인은 공산주의자, 기독교 믿으면 부자고 불교 믿으면 가난하다는 등의 주관적인 말을 수시로 거리낌 없이 했다.

몇 명 안되는 신자들 중 절반 이상은 10대~20대의 청년들인데, 그들에 대한 그녀의 영향력은 상상 이상의 것이다.

과연 저 사람들과 내 귀에 들리는 음성의 주인공은 같은 분일까…?

최근 몇 년 중에서 두 달 이상 한 교회에 다닌 유일한 경우인데, 그 이유는 남편인 담임 목사가 가족 생계를 헌금에 의존하지 않고 별도 직업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추구하는 것은 진리이지, 교회나 목회자가 아니다.

기도를 통해 들리는 음성이 ‘하나님의 음성’인지 ‘자의식의 속삭임’인지 스스로 냉정하고 처절하게 검증하지 않으면 안된다. 만일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이 아니라면 그것은 마귀의 유혹에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크리스천이 교회와 성경과 기도와 예수를 앞세워서 명예나 이익을 취한다거나 혹세무민하는 것은 모두 마귀의 유혹이며, 성령 모독이다. 기독교적으로 해석하면 그렇다는 것이다.

 

창조주께서는, 그리고 예수께서는 맹목적인 복종을 강요하지 않으신다. 

언제나 ‘선택’을 통해서 미래를 결정하라고 하신다.

최초의 두 피조물에게 에덴에서 하신 것 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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