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장 중의 막장 노부리
<광부 아리랑> 니기미 씨부랄 것 농사나 짓지 강원도 탄광에는 x빨러 왔나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노부리 고개를 넘어 간다 산지사방이 일터인데 그리도 할 일 없어 탄광에 왔나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막장을 넘어 간다 이판저판이 공사판인데 한 많고 살움 많은 탄광에 왔나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탄광은 말도 많다
('노부리'는 본항에서 탄맥을 쫓아 가지 처럼 뻗은 경사진 갱도를 말한다. 통상 본항 보다 더 좁고 낮은 열악한 환경이다) |
인간은 환경의 동물
매일 매시(每時) 자신의 한계를 느끼며 지내는 동안 한 달이 지나갔다.
'만근'을 했다. 만근은 한달 중에 이틀만 빼고 작업하는 것을 말한다.
통상 임금의 두배 가량 수입이 늘어 난다.
나중에야 안 일이지만 이 '만근' 제도는 광부들의 노동력을 착취하고 건강을 위협하는, 매우 몹쓸 제도다.
문제는 '가다가와리 (반 교대)' 때에 심각하게 나타난다.
예를 들어, 을반 작업이 끝나는 시각은 자정이다. 반이 바뀌지 않으면 이튿날 오후 네시 출근이므로 퇴근 후에 자고 쉴 수 있는 시간이 (출퇴근에 소요되는 시간 빼고도 열두 시간 쯤 된다.
만근을 하려면 일주일에 한번은 열두 시간의 휴식을 네시간으로 줄여야만 한다. 예를 들자면 자정에 작업을 끝내고 아침 여덟시까지 출근해야만 하는 것이다.
극한 노동 현장에서 피로와 수면부족은 큰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동료들과는 마치 가족과 같은 신뢰와 정이 쌓여 갔다.
어색하기만 했던 그들의 말투와 습관이 조금씩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판단 기준도 그들과 동화되어 갔다. 가금씩 변해가는 자신의 모습을 느끼면 혼자 소리없이 웃기도 한다.
이반 데미소비치의 하루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Aleksandr Solzhenitsyn 1918. 12. 11~ 2008.08.03)과 이반 데니소비치 슈호프(1963초판 발행)
매일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살며 세 번의 만근 수당을 받았다. 첫 월급을 받던 날에는 동료들에게 제대로 '햇돼지 신고'도 했다.
광산 노동자들은 '계층'이 없다.
배운 자나 못 배운 자나 잘 생긴 자나 못 생긴 자나 다 비슷하다.
소득도 비슷하다 기술자 격인 선산부와 후산부의 소득 차이는 별로 없다.
한 달에 한번, 탄광촌은 '돈의 홍수'를 만난다. 상가는 북새통을 이루고 술집마다 만원사례다. 며칠 간은 하숙집도 잔치 분위기다.
힘들인 것에 비해 허무하다 싶을 만큼 물 쓰듯이 돈을 쓴다. 하지만 고단한 광부의 삶에서 그 정도의 여유도 없다면 견딜 수 없을 것 같기도 하다.
부슬부슬 이슬에 내리던 갱구 400m 지점에 문제가 생겼다.
상단을 가로 지른 동발(하리)하나가 꺾어져 갈매기 모양으로 처진 것이다.
보수할 때를 놓친 것인지, 별 문제가 없어서 보수를 안 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신경이 쓰인다.
그 지점은 광차를 타고 나오다가 속도를 줄이기 시작하는 지점이다.
광차에 타고 있는 동안에도 머리를 완전히 들 수는 없다. 그런데 동발이 처져 있으니 자세를 더 낮추어야만 하는 것이다.
덜커덕 달달달달..
가속이 붙은 광차는 귓전에서 바람 소리가 들릴 만큼의 속력이다.
"이 쯤일텐데.."
살짝 머리를 내미는 순간, 번쩍! 우지끈! @#!$%......
. . . . . . . . . .
. . . . . . . . . .
암흑이다. 귀에서 웽웽 거리며 마치 작은 모터 돌아가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순간적으로 사고 임을 느꼈다.
캐프불(캡라이트)이 나갔다. 박살이 난 것이다. 코에서는 비릿하고 찐득한 것이 흘러 나오고 있다.
잠시 어안이 벙벙한 채로 누워 있다가 불현듯이 생각 났다.
"굴진 팀이 나온다!"
주머니를 뒤져 라이터를 꺼냈다. 애지중지하던 휘발유 라이터, 입항 때 마다 감시를 피해 몰래 감추어 가지고 다니던 것이다.
탄광에서는 매탄 등 천연가스와 석탄 등에 의한 화재 및 폭발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입항 시 담배와 성냥, 라이터 등을 휴대하지 못하게 한다.
충돌 시 광차가 탈선해서 왼쪽 동발을 들이 받고 레일과 비스듬하게 서있다. 삿대가 진 것이다.
꺾어졌던 동발 부분에서 탄과 괴탄, 잡석들이 쏟아져 내려와 있었다.
오른 손에 라이터를 켜 들고 막장 쪽을 향해 정신없이 뛰었다. 자빠지고 넘어지고 뛰면서 소리질렀다. "사고! 사고!"..
다행히 크게 다친데는 없었다.
그것 보다 더 다행한 것은 사고에 대해 별다른 질책이나 문책이 없다는 사실이다.
소문이 날 경우, 마땅히 보수해야 될 것을 방치한데 대한 책임 추궁이 염려 때문일까? 감독은 전에 없이 친절하고 우호적이다.
다른 사람에게 더 큰 사고가 날 수도 있는 일이 나에게서 이 정도로 끝난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정말 다행한 일이다.
사고 지점 보수 때문에 이틀째 쉬고 있는데 'J'가 왔다.
"상동에 품때기 갈래?"
품때기란 일정한 작업량을 할당 받아서 하는 일종의 한시적 도급이다.
막장 중의 막장
노부리 입구. 실제로는 어둡고 맨 바닥이거나 경사면에서 석탄을 밀어 내리기 위해 바닥에 U자형 철판을 깔았다.. 당시 사진이 없어서 석턴박물관 사진을 빌려 왔다.
'59항'은 문어발 같은 노부리로 악명이 높은 덕대탄광이라고 한다.
노부리는 본항에서 비교적 약한 탄맥을 쫓아 파 들어간 경사진 갱도다. 대체로 본항에 비해 더 낮고 더 좁다. 낮고 좁은 노부리를 보는 순간에 지옥문이 있다면 이런 모양이 아닐까? 호기심 섞인 공포를 느낀다.
자세를 낮추어도 일어설 수가 없기 때문에 작업은 허리를 구부린 채로 하거나 기어 다니면서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석탄을 퍼 담은 철제 상자에 쇠줄을 달고 그 쇠줄을 멜빵에 연결해서 사람이 끌고 나온다. 쟁기 진 소가 연상된다. 쟁기 대신 철제 쓰레받이를 사람이 메고 기어서 운반하는 것이 다르기는 하지만..
기가 막힌다.
마치 지옥으로 들어 가는 문을 보는 것 같다.
1096항에서 몇 달 간 단련되지 않았다면 59항 노부리 작업은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었다. 일제 시기의 조선인 광부들이 작업했던 방식이라고 한다.
(노부리 중에는 갱도 가운데에 U자형 철판을 깔고 경사를 이용해 석탄을 흘러내리게 해서 조구(석탄 집하지점)까지 운반하는 곳도 있다.)
인간이 위대한 걸까, 아니면 잔인할 걸까.
사북사태 (사북 노동항쟁)
사북사태 : 10·26사태 이후 1980년 <서울의 봄>으로 고조된 민주화 분위기 속에서 발생하여 80년대 노동자투쟁의 발화점이 된 동원탄좌 사북광업소 광산노동자들의 파업 투쟁 (출처 : 한국근현대사사전)
탄광촌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며칠 전부터 '어용노조'에 대한 불만이 태백산맥 일대를 뒤 덮고 있다.
덕대탄광 광부들과는 무관한 일이지만 동원탄좌 사북광업소 노조 문제와 임금문제가 '노동자 탄압과 착취'라는 불만으로 전체 광부들 사이에 들불 처럼 번지고 있었다.
어용노조로 비난의 대상이 된 노조지부장에 대한 불만과 비난의 여론이 심상치 않은 분위기다. 삼삼오오 모여있는 자리에서는 험악한 표현들이 거침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뉴스에서 흘러 나오는 서울 소식도 심상치 않다.
12.12 쿠데타를 통해 군부를 장악한 전두환을 주축으로하는 정치군인들이 집권을 도모하고 있다는 암울한 소식도 전해진다.
"하늘이 이 민족을 또 내치실 것인가..?" 숨막히는 번민이 찾아 왔다.
"뭔가 해야만 된다.."
사고는 예고없이 찾아 온다.
며칠 만에 정든 1096항으로 복귀했다. 마치 고향에 온 것만 같다. 컴컴한 갱 내의 동발 하나하나가 다 반갑다. 사고가 났던 400m 지점은 말끔하게 보수가 되어 있었다.
반장 박씨가 과묵한 입을 뗀다. "보수기간 중의 반은 '기본칸' 인정해 준다네." 5일 중에 이틀 반을 기본급 유급처리 해 준다는 말이다.
나머지 이틀 반에 대해서는 무급 휴가 처리했다고도 한다. 만근을 할 수 있게 한 일종의 배려다. 믿기지 않는 파격적인 조치다.
사고는 초보 때 보다 조금 숙달된 시기에 더 많이 발생한다. 운전도 완전 초보 때 보다 어느 정도 자신감이 생긴 시점에 더 사고율이 높다는 통계가 있다.
일종의 '방심' 때문일 것이다. 작은 교만일 수도 있다.
흩어져 있는 석탄을 광차에 퍼 담기 좋게 한 군데로 모으는 작업을 한다. '니구리'라고 하는 작업이다. 삽을 사용해야 하지만 때대로 발로 당기고 밀면서 작업하기도 한다.
'니구리' 작업 중에 오른쪽 대퇴부에서 우지끈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더니 통증이 왔다. 다리에 힘이 빠지고 하반신을 움직이는 것이 만만치 않다. '대퇴부 탈골'이다.
"큰 병원에 가 보셔야 될 것 같은데.."
동네 건강검진 지정 병원을 갔더니 통증을 진정시키는 주사를 놓아 주고 나서 큰 병원을 가라고 한다. 덜컥 겁이 난다.
여인숙 아가씨
기억 재현. 머리카락을 뒤로 올린 다음에 고정시킨 커다란 헤어브로치가 인상적이다.
두시반 서울행 특급열차를 탔다. 특급열차는 완행열차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깨끗하고 조용한 분위기에 지정좌석도 있다. 옆자리에 젊은 여인이 앉는다.
긴 생머리를 뒤로 묶어 올려서 손바닥 만한 브로치로 고정시킨 여인을 보자 목선이 희고 아름답다는 생각이 든다.
"어? 안녕하세요?"
여인숙에서의 고마운 기억, 지나가는 판매원을 세워 이것 저것 주문했다.
나이가 네살 더 많은 그녀에게서는 마치 큰 누이를 대하는 것처럼 연륜이 느껴진다.
누구에게나 저마다의 사연은 있기 마련이다. 그녀는 담담하게, 시크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아시겠지만 나는 XX년이예요."
산다는 것, 인생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그녀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머리 속을 맴도는 생각이었다.
그녀는 가끔 한숨을 쉬기도 하고 화가 난 듯이 벌컥벌컥 맥주를 들이키기도 하고 한숨을 쉬거나 소리없이 웃기도 하면서 말을 이어 간다.
땅거미가 질 무렵에 청량리 역에 도착했다. 여기저기에 무장한 군인들이 서있다.
"목욕 좀 하세요. 처음 봤을 때는 얼굴이 하얗고 예뻤는데.."
거의 햇볕을 보지 못하고 굴 속에서 일했지만 얼굴이 까맣다. 더 정확하게는 얼룩덜룩하다. '탄때'가 낀 것이다. 탄때는 비누칠을 해서 닦아도 말끔하게 없어지지 않는다. 묵은 빨래 불리듯이 더운 물에 푹 불린 다음에 닦아야 어느 정도 지워진다.
누가 봐도 알 수 있을 만큼 '광부'가 된 것이다.
절뚝거리며 목욕탕을 찾아 따끈한 물에 몸을 담근다. 기분 좋은 피로가 몰려 온다, 눈을 감는다. 활동사진 처럼 지난 일들이 펼쳐 진다.
잠이 온다.
두 시간 뒤에 그녀와 저녁을 먹기로 했다는 생각을 하면서 잠에 빠진다.
다음에 이어질 글 : 막장에서 본 세상 ⑤ 인생은 선택의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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