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만은 모든 최선(最善)을 파멸시키는 패망의 선봉이다.

 

 

 

일생 중에 한 번도 실패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사는 동안 한 번도 괴로움을 겪지 않는 사람도 없다.

 

실패나 괴로움은 삶의 부산물 같은 것이다.

살아있는 모든 것에서는 예외없이 부산물이 생기듯이 살아있는 동안에 시행착오나 괴로움이 계속 생겨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사람은 단지 이 반복되는 난관을 극복할 수 있을 뿐이다.

실패와 괴로움을 줄이고 오히려 성장과 성취로 승화시키는 것이 사람의 하는 일이며, 사람의 능력이다.

 

고사(古史)는 우리에게 가르침을 준다.

그 중에서도 실패와 극한 괴로움을 극복한 기원전 5세기 중국 춘추시대의 오왕 부차와 월왕 구천의 와신상담 (臥薪嘗膽)’ 이야기는 사기(사기) 등 역사서를 비롯한 수 많은 책과 일상에서 인용되고 있다.

 

중국 대륙에서 영원히 오나라를 사라지게 한 오나라 왕 부차는 7년 동안 와신(臥薪)한 끝에 월왕 구천을 꺾고 아버지의 복수를 하고 패권을 쥐었던 장본인이다. 그러나 교만에 빠진 부차는 결국 12년 간 상담(嘗膽)한 구천의 계략에 빠져 패망하고 자결한다.

 

교만으로 인한 패망은 동서고금의 모든 교훈이 가진 공통점이다.

교만은 모든 최선(最善)을 파멸시키는 패망의 선봉이다.

 

 

 

기원전 5세기 무렵인 춘추 시대, ()나라 임금 합려(闔閭)와 월()나라 임금 구천(勾踐)은 서로 라이벌인 동시에 철천지 원수지간이었다. 그들의 싸움은 지금의 절강성 취리(檇李) 전투가 절정이었다. 합려는 취리 전투에서 적의 화살에 맞은 손가락 상처가 의외로 크게 악화되는 바람에 죽고 말았다.

 

 

 

합려는 임종 직전에 아들 부차(夫差)에게 말했다.

“부차야, 월왕 구천이 네 아비를 죽였다는 사실을 잊지 마라!”

 

합려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부차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이를 갈았다. 그는섶나무를 깔아 놓고 그 위에서 잠을 잤으며(와신 臥薪), 자기 방에 드나드는 신하에게 아버지의 유언을 한 번씩 외치게 함으로써 자신의 결심을 계속 상시시켰다. 또한 군사 훈련에도 박차를 가해 군대를 강병으로 변모시켰다.

 

이 사실을 안 월나라 왕 구천은 코웃음을 쳤다.

“젖 비린내 나는 아들놈이 아비의 복수를 하겠다고? 그렇다면 내가 먼저 본때를 보여 주리라.”

 

구천이 선제 공격을 서두르자, 참모인 범려(范蠡)가 말렸다.

“병()을 움직이는 데는 많은 준비가 선행되어야 하고, 그러고 나서도 적당한 시기를 보아야 합니다.”

“합려가 이미 죽고 없는데 무슨 준비와 시기가 필요하다는 말이오?”

“젊은 오왕을 결코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됩니다.”

 

부차를 우습게 생각한 구천은 만류를 듣지 않고 출전했다. 하지만 결과는 구천의 생각과 정반대였다. 복수심에 불타는 오나라군은 적을 파죽지세로 밀어붙여 회계산(會稽山)으로 몰아넣은 다음 철통같이 포위해버렸다.

 

‘내가 경솔하여 이 치욕을 당하는구나!’

월왕 구천은 땅을 치고 싶도록 후회가 되었다. 이제는 사지에 뛰어들어 장렬하게 전사하든가, 앉아서 굶어 죽든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때 범려가 말했다.

“아직 희망을 버릴 때가 아닙니다. 오왕에게 항복하고 앞으로 신하로서 섬기겠다고 약속하여 일단 이 국면을 벗어난 다음 훗날을 도모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합려의 자식놈에게 항복을? 그렇게 되면 세상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소?”

“공론이란 한때의 바람과 같은 것, 큰 일을 도모하는 데 남의 뒷소리가 무슨 상관입니까?”

“하지만 항복을 청한다고 그가 들을까? 하루에도 몇 번씩 애비의 유언을 되새긴다는 지독한 놈인데..”

“오나라 재상 백비()는 물욕이 많은 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에게 뇌물을 주고 부차를 설득하라고 하는 겁니다.”

 

월왕 구천이 백기를 들자, 오나라 대신들 중 강경론자인 오자서(伍子胥)는 받아들이지 말 것을 주장했다.

“항복을 받고 월왕을 놓아 보내는 것은 위험합니다. 후환을 남기지 않으려면 지금 쳐서 그의 명맥을 끊어 놓아야 합니다.”

 

월나라로부터 뇌물을 받은 백비도 반대 의견을 내놓았다.

“항복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월나라군은 죽음을 무릅쓰고 덤빌 것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 앞에 당할 장사가 어디 있겠습니까. 설사 이기더라도 우리 병사들 역시 부지기수로 죽거나 다칠 것이 분명하므로, 그 뒷일이 걱정스럽다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군침을 삼키며 이 싸움의 향방을 지켜보고 있을 사방의 군웅들을 고려해야 합니다.”

 

오왕 부차는 결국 백비의 간언에 따랐다. 항복한 구천으로부터 신하로서 섬기겠다는 약속을 받아들이고 귀국을 허락하는 선처를 베풀었다.

 

오나라 속령(屬領)이 되어버린 월나라에 돌아온 구천은 곁에 항상 짐승 쓸개를 놓아 두고 그쓴맛을 핥으며(상담 嘗膽)’ 복수의 칼을 갈았다.

 

구천이 은밀히 군사력 증강에 몰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 오자서는 임금에게 간청했다. 구러나 부차는 구천에 대한 응징이 시급하다는 오자서의 간언을 듣지 않았다.

“군사력이란 그렇게 단시일에 길러지는 것이 아니오.”

 

당시 부차의 관심은 중원 쪽으로 쏠려 있었고, ()나라 중원 진출, 나아가서 천하 패권 쟁탈의 제일차 목표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도 오자서가 물러서지 않고 계속 간언하자, 화가 치민 부차는 오자서에게 자결을 명했다.

 

오자서는 죽으면서 주위 사람들에게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내가 죽거든 눈을 빼서 동문(東門) 위에 놓아 다오. 이 눈으로 오나라가 월나라에게 망하는 꼴을 봐야겠다.”

 

회계의 치욕적 항복이 있었던 날로부터 12년이 지난 기원전 482년 봄, 구천은 드디어 군대를 이끌고 번개같이 오나라로 쳐들어갔다.

그런 와중에도 부차는 황지(黃池)란 곳에서 여러 제후들을 모아 놓고 자신이 패자(覇者)가 되는 의식을 거행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장장 7년 동안 오나라와 월나라는 전쟁을 계속했는데, 그 결과 초전의 승기를 끝까지 살린 월나라가 승리하게 되었다.

부차는 월나라군이 수도인 고소(姑蘇)로 육박하자 무릎을 꿇었고, 이로써 오나라는 멸망하고 말았다.

 

“내 그대를 죽일 것이로되, 회계에서 진 빚이 있어 목숨을 거두지는 않겠다. 용동(甬東)으로 가서 조용히 여생을 보내도록 하라.”

구천은 이렇게 은혜를 베풀었다. 그러나 부차는 구천의 호의를 거절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 누울 와, : 섶나무 신, : 맛볼 상, : 쓸개 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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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망중한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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