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HAB - 풍요 (Abundant)/문화의 풍요

월선의 가슴에 불을 붙이다

백호 임제의 송별연이 벌어지던 날

술이 몇 순배 돌고 여흥이 무르익자

천하의 풍류객 백호 임제가 합죽선을 펴고 일필휘지(一筆揮之)로 글을 써서 옆 자리의 동기(童妓) 월선(月仙)에게 줍니다.

그 후로 월선은 평생 부채를 간직하고 임백호를 사모하며 그리워했다고 합니다.

 

막괴융동증선지 (莫怪隆冬贈扇枝)

이금년소기능지 (爾今年少豈能知)

상사반야흉생화 (相思半夜胸生火)

독승염증유월시 (獨勝炎蒸六月時)

 

엄동에 부채를 준다고 괴이하게 여기지 마라

아직 나이 어린 네가 어찌 알랴마는

깊은 밤 님이 그리워 가슴에 불이 일면

유월 염천 무더위에 비할 바가 아니니

백호 임제 (白湖 林悌1549 ~1587)

조선 중기 때의 문인. 자는 자순(子順), 호는 백호(白湖) 풍강(楓江) 소치(嘯癡) 벽산(碧山) 겸재(謙齋). 본관은 나주(羅州). 절도사 진(晉)의 맏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지나치게 자유분방하여 스승이 따로 없다가 20세가 넘어서야 성운(成運)을 사사하였다. 교속(敎束)에 얽매이기보다는 창루(娼樓)와 주사(酒肆)를 배회하면서 살았다. 23세에 어머니를 여의었으며, 이에 창루와 주사를 그만두고 한때 글 공부에 뜻을 두어 몇번 과거에도 응시하였으나 번번이 낙방하였다. 창루와 주사에서 벗어나 현실세계로 뛰어든 그의 눈에는 부조리와 당쟁만이 가득찼다.

22세 되던 어느 겨울날 호서(湖西)를 거쳐 서울로 가는 길에 우연히 지은 시가 성운에게 전해진 것이 계기가 되어 그를 스승으로 모셨다. 그로부터 3년간 학업에 정진하였는데 그때 《중용》을 800번이나 읽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1576년 28세에 속리산에서 성운을 하직하고, 생원 · 진사에 합격, 이듬해 알성시에 급제한 뒤 흥양현감 · 서도병마사 · 북도병마사 · 예조정랑을 거쳐 홍문관지제교를 지냈다.

서로 헐뜯고 비방하고 질시하면서 편당을 지어 공명을 탈취하려는 속물들의 비열한 몰골들이 그의 호방한 성격에 용납되지 않았다. 벼슬에 대한 선망과 매력, 흥미와 관심은 차차 멀어져가고 환멸과 절망과 울분과 실의가 가슴 속에 사무쳤다. 그러기에 10년간의 관직생활은 아무런 의의가 없었다. 벼슬에 환멸을 느껴 유람하였는데 가는 곳마다 숱한 일화를 남겼다.

기인이라 하고 또 법도에 어긋난 사람이라 하여 글은 취하되 사람은 사귀기를 꺼렸다. 서도병마사로 임명되어 임지로 부임하는 길에 황진이의 무덤을 찾아가 시조 한 수를 짓고 제사지냈다가 임지에 부임도 하기 전에 파직당한 것이나, 기생 한우(寒雨)와 주고받은 시조의 일화, 평양기생과 평양감사에 얽힌 로맨스도 유명하다. 성운이 세상을 등진 이래 지기(知己)가 끊어지고, 이리저리 방황하다 고향인 회진리에서 39세로 죽었다.

운명하기 전 여러 아들에게 "천하의 여러 나라가 제왕을 일컫지 않은 나라가 없었는데, 오직 우리나라만은 끝내 제왕을 일컫지 못하였으니, 이같이 못난 나라에 태어나서 죽는 것이 무엇이 아깝겠느냐! 너희들은 조금도 슬퍼할 것이 없느니라."고 한 뒤 "내가 죽거든 곡을 하지 마라."는 유언을 남겼다. 칼과 피리를 좋아하고 방랑하며 술과 여인과 친구를 사귀었다. 호협한 성격과 불편부당을 고집하는 사람으로, 《수성지(愁城誌)》 · 《화사(花史)》 · 《원생몽유록(元生夢遊錄)》 등 3편의 한문소설이 있는데 그의 작품이 아니라는 설도 있다. 저서로는 〈임백호집〉 4권이 있으며 이밖에 황진이(黃眞伊)의 무덤 앞에서 읊은 시조 한 수 외 2수의 시조가 전한다.

자료출처 : 국어국문학자료사전


"); wcs_d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