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민주주의를 앞당긴 혁명

 

영상 : 김재규 최후 진술

 

 

김재규 유언 詩

 

<나와 자유>

나를 만일 신이라고 부를 대는 자유의 수호신이라고 부르겠지.

나를 만일 사람이라고 부를 때는 자유 대한의 국부라고 부르겠지.

 

, 내 목숨 하나 바쳐 독재의 아성 무너드렸네.

, 내 목숨 하나 바쳐 자유민주주의 회복하였네.

, 사랑하는 37백만 국민에게 자유를 찾아 되돌려주었네.

 

만세 만세 만만세.

10.26 민주회복 국민혁명 만만세.

10.26 민주회복 국민혁명 만만세.

 

- 10.26 민주회복 국민혁명 지도자 김재규

 

 

 

희생으로 싸워 찾은 가치를 지키기란 얼마나 힘든 것인가

 

영상 : 손석희 앵커멘트 희생으로 싸워 찾은 가치를 지키기란 얼마나 힘든 것인가?’

 

지금으로부터 108년 전인 1909 10 26일 바로 오늘입니다. 중국 하얼빈역.

"대한제국의 의군 참모중장으로 전쟁 중 작전을 통해 적장을 사살한 것"

그는 나라 잃은 청년이 아니라 전쟁 중인 군인이었습니다.

 

"국제법에 의거한 군사재판을 열어 달라" 당당하게 요구했으며 "항소하지 말라. 큰 뜻으로 죽음을 받아들여라" 어머니는 아들의 죽음 앞에서 의연함을 보였습니다.

 

안중근이라는 이름 석 자는 그렇게 해서 그로부터 36년간 계속된 치욕의 역사를 예견하고 거부했던 이들의 맨 앞자리에 놓였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결코 그때의 결정적인 한 장면에서만 멈춰서지 않았습니다.

 

30년 뒤인 1939 10 16일 안중근의 차남 안준생은 이토 히로부미의 위패가 있는 박문사에서 이토의 아들에게 깊이 고개를 숙여 아비의 잘못을 사죄했습니다.

 

호부견자… 호랑이 아비에 개와 같은 자식이라는 비난은 쏟아졌지만 그에게도 곡절은 있었지요….

▶jtbc뉴스 기사 원문보기

 

 

 

김재규, '유신독재' 심장에 총탄을 날리다

대한민국을 뒤흔든 '10·26 사태'

  

김재규, '유신독재' 심장에 총탄을 날리다

 

1979 10 26일 밤 서울 종로구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가에서 총성이 울렸습니다.

당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대통령을 사살한 '10·26 사태'입니다.

10·26 사태로 좀처럼 끝날 거 같지 않던 박정희 유신독재는 일거에 무너졌습니다.

 

이 때문에 김재규를 '의사'로 칭송하는 이들도 있지만, 박정희 유신체제의 한 축이던 그가 박 대통령을 저격한 진의가 무엇인지는 지금도 추측만 무성합니다.

 

김재규가 일으킨 '거사'의 결과도 박정희 유신독재를, 포악함과 무도함에서 결코 뒤지지 않는 전두환 군사정권으로 바꿔 놓았을 뿐이었습니다.

 

전두환 신군부의 광주 민중 학살도 이 와중에 벌어진 비극입니다.

 

CBS노컷뉴스와 '역사N교육연구소' 심용환 소장이 함께하는 '근현대사 똑바로 보기' '역사는 하루아침에 진보하지 않는다'는 교훈을 되새기게 하는 10·26 사태를 돌아봤습니다….

………. (후략)

cbs노컷뉴스 기사 원문보기

 

 

 

박정희 머리통 속에 박혀 있는 총알이 주는 의미김재규=의인

박정희 암살당한 10.26 '올해로 38주년'...당시 국군서울지구병원장 김병수 장군의 증언

 

 

 

1026. 1979년 당시 오늘은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대통령(이하 박정희)을 암살한 날이다. 그런데 사람이 사망, 땅 속에 매장 되면 뼈가 존재한다. 특히 두개골은 그대로 남아 있게 된다. 박정희도 김재규가 쏜 총에 의해 사살되어 절명(絶命), 국립묘지에 묻혀 있으니 그 뼈가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 (후략)

브레이크뉴스 기사 원문보기

Posted by 망중한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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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의 가면

 

 

 

박정희 스위스비자금(600) ‘월남전 전투수당오바마 회신 접수

 

영상 :

 

 

스위스 비밀계좌누가? 어떻게? 얼마나?

 

영상 : jtbc

 

 

 

“박정희 스위스 비자금 수조원대최순실이 세탁

1978년 미 하원 국제관계위원회 국제기구소위원회가 발행한프레이저 보고서’(원제한국-미국 관계에 대한 조사’)

 

 

 

…. (노웅래 의원은) “보고서를 보면 박정희 정권은 해외 차관이나 투자 자금을 들여오면서 전체 자금의 10~15%를 커미션(수수료)으로 가로채는 불법행위를 저질렀으며, 이를 통해 조성한 비자금을 (관리하기 위해) 스위스 최대 은행인 유니언뱅크 등에 여러 사람 명의의 비밀계좌에 개설했다고 말했다. 노 의원은 이어 “(재미 언론인이었던) 문명자 기자는, 1979 10·26 이후 박근혜 대통령이 보안 요원 5명과 함께 스위스를 방문해 비밀계좌의 예금주 이름을 변경했고, 동행한 이들에게 사례비로 5만달러씩 줬다는 것을 제보받았다고 증언하고 있다며 박 대통령도 이 비자금의 존재를 알고 있음을 시사했다….

한겨레신문 기사 원문보기

뉴스 보도 바로보기 <노웅래 "박정희 3조원대 부정축재... 특별법으로 환수해야">

 

 

 

박정희 권력에 기생한 최태민 일가

 

 

 

특검최순실 은닉 재산’ 100억원대 찾았다대부분 차명

최태민 일가 등 국내외 최씨 인맥 광범위 추적 조사

영장 불승인 취소, 항고 포기청 압수수색 결국 무산

박 대통령 임기 끝날 때까지시한부 기소중지방침

 

 

 

23일 오전 박영수 특별검사팀 관계자들이 서울 대치동 특검 사무실로 출근하고 있다. 왼쪽부터 박영수 특검, 이규철·양재식·박충근 특검보, 윤석열 수사팀장.

 

박영수 특별검사팀이 최순실씨(61)가 차명 등의 방식으로 은닉한 재산 규모가 최소 100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잠정 결론냈다. 박근혜 대통령은 임기가 끝날 때까지 기소를 중지하는시한부 기소중지처분을 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특검의 청와대 압수수색은 사실상 무산됐다.

 

23일 사정당국에 따르면 특검은 그동안 최씨 재산추적 전담팀을 구성해 최씨의 부친인 최태민 일가 등 국내외 인맥을 조사하는 것은 물론, 국세청·금융감독원·법원 등 관련 기관의 자료도 받았다. 이를 통해 최씨가 숨겨놓은 재산은 100억원대 이상인 것으로 파악됐다….

경향신문 기사 원문보기

 

 

 

박근혜·최태민 관계 밝힌 10년 전조순제 녹취록전문(全文)

“모친(母親) 임선이, ‘여자라서 박근혜·최태민 관계에 갈등 겪었지만 돈 때문에 참아

 

 

 

박근혜 비판기자회견 이틀 전 동생 최순영이 돈 봉투 들고 와 회유

김재규 중앙정보부가 감청 등 모든 수단 동원해 최태민 내사

최순실 자매, 10·26 이후 들어온 뭉칫돈 사돈의 팔촌에까지 분산시켜

최순실 자매, 돈 때문에 모친 임선이 사망 사실 숨겨

최태민, 모친 임선이 만난 덕에 인간 돼임선이는 남자였다면 재벌 됐을 것

신군부가 최태민 의혹 조사할 때 수사단장 이학봉이 친구라서 덕 많이 봐

나라 잃지 않으려면 이명박이 돼야 한다. 박근혜는 안 된다

박근혜·최태민, 고기와 물의 관계두 평 규모 방에 들어가 3~4시간 동안 안 나와

 

조순제는 최태민(崔太敏)의 의붓아들이다. 조순제 모친 임선이(林先伊) 1955년 최태민과의 혼인 전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조순제(1940년생), 조순영(1947년생)을 낳았다. 이 중 조순영은 의부(義父)인 최태민의 성을 따라 최순영(崔順英)이 됐다. 조순제는 개성(改姓)을 하지 않았다.

 

조순제는 성인이 된 후 최태민을 보좌하며 대한구국선교단 실무를 챙겼다. 1980년대엔 박근혜(朴槿惠) 대통령이 이사장으로 있던 영남대학교와 육영재단 업무를 도맡아 했다고 한다. 역시 박 대통령이 이사장이었던 한국문화재단 일도 사실상 총괄했다고 알려졌지만, 나중 그는 무슨 이유인지 최태민 일가의 내부고발자가 됐다….

디어 기사 원문보기

 

 

 

박정희 정권 초기 거액비자금 조성

중정 주가조작-워커힐-새나라차 등 개입

김종필 (중정)부장 주 500만환 쓴걸로 전해져

주한 미대사관 비밀보고서 공개

 

 

 

주한 미국대사관은 지난 63년 박정희 정권의 비자금 조성 내막을 포함한 당시 한국 권력 핵심부의 부패상을 상세히 언급한 비밀보고서를 본국에 보냈던 것으로 드러났다.

 

당시 미대사관의 필립 하비브 정무 참사관이 작성하고 서명한 보고서는 빽빽이 기록된 모두 13장 분량으로 미 당국의 정보 공개원칙에 따라 올해 초 비밀해제됐다.

<한국의 부패문제>란 제목의 지난 63 2 20일자 이 보고서는 부패의 구조적 성격  박정희 정권의 군사혁명정신 퇴색상  김종필 중앙정보부장(현 자민련 총재)을 비롯한 일부 권력핵심부 인사의 주변 상황과 동향을 구체적으로 담고 있다.

 

보고서는 한국에서 공직이 케이크를 먹을 수 있는 기회로 간주되고 있다특정인이 너무 오랫동안 케이크를 먹도록 해서는 안된다는 분위기가 한국정부의 업무의 연속성을 저해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부패를 척결하려는 군사정부의 시도가 예상대로 대부분 실패, 요정들이 다시 문을 열고 군정과 중정 인사들을 단골로 확보했다고 지적한 보고서는 김종필 중정부장의 경우 이런 곳에서 일주일에 5백만환 상당을 쓰는 것으로 전해진다고 전했다. 보고서는 또 군사정권이 이전 정권처럼 직접적으로 민()을 압박하지는 않으나 스케일이 큰 공작들을 통해 비자금을 확보하는 새로운 방법을 고안했다면서 중정은 지난 62 2월부터 5월까지 주가파동을 조작, 40~50억 환을 챙긴 것으로 추산된다고 분석했다. 보고서는 김종필 당시 중정부장이 증권조작을 통해 개인적으로 거금 10억환이란 이익을 봤다는 설도 있으나 학인되지는 않았다고 전했다. 중정은 또 약 5백만 달러가 투입된 워커힐 건설에도 관여했으며 새나라자동차 회사는 중정의 밀접한 대일(對日) 사업과 연계돼 세워졌다고 보고서는 덧붙였다.

일보 기사 원문보기

 

 

 

박정희의 스위스은행 60억 달러 계좌 명의, 10.26 이후 박근혜로 변경

 

 

 

 

….

“박정희 정권, 스위스 비자금 계좌 있었다

재미 언론인, 미 의회문서 공개...20만 달러 입금 계좌도 명시.

 

박정희 정권이 스위스에 비자금 계좌를 개설해 운용했다는 문서가 공개됐다. 박근혜 후보 측에서는 전면 부정했다. 하지만 이 비밀계좌 명의는 10.26사태 이후 박근혜 현 새누리당 대선후보로 바뀌었다는 주장도 그동안 심심찮게 나온 바 있어 대선 정국에서 어떤 영향을 줄지 주목된다.

 

재미 언론인 안치용 씨는 7, 1978년도 미국 의회 프레이저소위원회 청문회 문서 공개를 통해 박정희 정권의 스위스 비자금 계좌와 구체적인 입금 사실을 폭로했다. 이 문서는 1978년 박정희 정권에 대한 정치자금 제공 여부를 묻는 미 하원 외교위 프레이저소위원회 설문에 대한 걸프사의 답변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안치용 씨는메이저 오일컴퍼니인 걸프사가 지난 1969년 박정희 방미경비 명목으로 20만 달러를 스위스 UBS(유니언뱅크) 비밀계좌에 입금시켰던 것으로 확인됐다 “1969년 걸프사가 흥국상사 주식 25% 2백만 달러에 인수하려 하자 계약 직전에 이후락이 박정희 방미경비 명목으로 20만 달러를 요구해 이를 스위스 유니언뱅크의 서정귀 계좌로 송금했고, 이 돈은 이후락이 찾아갔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걸프사는 입금 경위를 2페이지에 걸친 문서를 통해 상세히 설명한 것은 물론, 프레이저소위원회는 스위스 유니언뱅크의 입금서류 등도 확보한 것으로 드러났다서정귀의 스위스 유니언뱅크 계좌번호는 626,965.60D였으며 199750달러는 1969 12월 인출됐다고 덧붙였다….

유머 기사 원문보기

Posted by 망중한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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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老子)강의가 끝날 때 어머니를 EBS에 모셔서 인사를 드린 적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저를 만날 때마다 감동적 이었다고 하면서 안부를 물어주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지난 45일 향년 95세로 유명을 달리 하셨습니다. 1910년생이니까 20세기를 거의 완벽하게 채우신 분입니다. 우리 민족의 모든 고난과 영광을 역사와 함께 하신 분입니다.





어머니께서 운명하시는 순간에 느낀 것 하나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머니는 혼수상태로 계시다가 깨끗하게 돌아가셨습니다. 숨이 딸깍하는 순간에 육신을 보니까 완벽하게 그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그러나 그 딸깍하는 그 순간의 느낌은 너무도 달랐습니다. (한의학에서 말하는) 살아 움직이는 경락이 순간적으로 사라지고 (얼굴 모습은 그대로였지만) 시신의 얼굴(느낌)은 정말 달랐습니다. 가슴에 귀를 대어보니 심장은 안 뛰고 꾸르륵하는 소리가 났습니다. 그 순간에 펑펑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막내인 저는 엄마 젖을 오래 빨았는데, 초등학교 때까지도 나오지도 않는 젖을 빨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제가 막내기 때문에 (어머니의) 정이 깊었습니다. 나오지도 않는 젖을 빨던 때가 생각났습니다.

인간이 태어나서 죽는 순간까지의 변화는 인간의 생애에 있어서 0.001%의 변화도 안되는 것입니다. 바로 딸깍하는 순간의 변화가 99,999%의 변화였습니다. 죽는 순간의 변화는 너무나 큰 것입니다.

 

인간의 생명이라는 것은 손가락 하나를 움직이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과의 사이에 있습니다. (이것이) 기적 같은 사실입니다.

손가락 하나를 움직이려면 생명의 작동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생명이 있고 없고의 차이라는 것은 그게 전부라는 것입니다.

태어나서 죽는 순간까지의 사이에서 변화라는 것은 너무나 미미한 것임에도, 그 안에서 우리는 싸우고 남을 미워합니다.

생명을 보유하고 있는 한, 인간은 더없이 귀하고 소중하며 평등한 존재입니다. 생명이 있는가와 없는가, 그것이 인간의 전부입니다. 생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 사는 것의 고귀함을 한번 생각해 봐야 되겠습니다.

 

돌아가신 자리에서 시신을 옮기지 않고, 전통적인 예식에 따라 그 양반이 사시던 곳, 즉 집에서 했습니다

그대로 백()이 가라앉고 혼()이 날아 갈 수 있다고 믿기에 시신을 옮기지 않았습니다. 빈소는 영안실을 빌렸지만 시신을 옮기지는 않고 집에서 염을 하고 입관을 했습니다.

 

누나가 어머니의 수의가 든 함을 가져왔습니다.

어머니가 생전에 손수 마련하신 수의 보따리 속에는 80년 전 시집 올 때 입었던 다홍치마와 연두색 저고리가 있었습니다. 어머니께서는 그 옷을 입고 가시겠다는 뜻이었습니다. 어머니의 수의 같은 이런 수의가 우리 민족사의 마지막 수의일 것입니다.

장례식 집사자는 이렇게 정성스럽고 아름다운 수의는 처음 보았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운명했었을 때 자기의 삶의 터전이었던 그 자리에서 염()을 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그 삶의 코스모스에서 혼()은 하늘로 가고 백()은 땅으로 스미게 됩니다.

 

코스모스(Cosmos) 질서와 조화의 구현으로서의 우주

 

저는 평생을 기독교신앙으로 살았으면서, 기독교 철학을 공부했으면서, 기독교 울타리 안에서만 인류 운명을 다룰 수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신앙의 영역을 넓혀갑니다. 기독교도 입장에서 본다면 제 행동이나 사상이 이단자 같을 수 있고 기독교를 부정하는 것 같이 보일 수도 있습니다.

빈소에 스님이 찾아오면 저는 염불을 하게 하고 (염불 못할 것이 어디 있어요?!) 교회에서 조문객이 오면 앉아서 찬송가를 부르게 했습니다. 당연한 거지요.

 

어머니는 당신의 아들 김용옥의 사상에 대해서 개입하신 적이 한번도 없었습니다. 제가 대학을 다닐 때 어떤 사상을 깨닫게 되어 어머니께 이야기를 하면 어머니는 참으로 재미있게 들어주셨습니다. ‘칸트헤켈이니, 무슨 이야기 등 제가 나름대로 깨달은 것을 이야기하면 어머니는 몇 시간이건 들어주셨습니다. 어머니처럼 제 강의를 잘 들어 주신 분이 없습니다.

 

우리 사회는 인간에 대한 평등관이 더 필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어머니는 나처럼 공부를 하신 분이 아닙니다. 대단한 교육을 받으신 분이 아니지만, 내가 아무리 어려운 이론을 개발했어도 그것들을 모두 이해해주셨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그러한 제 모습을 통해서 당신이 교화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한 이야기의 상당부분은 어머니의 신앙을 무너뜨리는 이야기였습니다.

형들은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이단이라 할지 몰라도, 우리 어머니는 100% 나의 사상을 이해하시고 한번도 내가 그릇된 길로 가고 있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없습니다.

 

영상 : 도올 김용옥 - 우리는 누구인가 제15'죽음과호적' 1/4

 

 

진짜 기독교 신앙이라 하는 것은 나를 핍박하는 자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나를 죽이려는 원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사랑)이 없으면 기독교가 아닙니다.

나를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하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선거를 앞두고 있는 시점에서 우리는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만 좋아하고 선거의 당락만 생각한다면 우리 사회의 본질과 대의는 잊어버리게 됩니다.

 

기독교는 증오의 종교가 아니고 사랑의 종교입니다.

구약이 인간에게 증오를 가르쳤다면, 신약은 철저하게 사랑, 무조건 적인 사랑을 가르쳤습니다.

인간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모두가 평등합니다. 숨을 딸깍하는 순간까지도 인간의 고귀한 모습입니다.

 

저는 늙어가고 있습니다. 젊은이가 부럽습니다.

벌써 공부도 제대로 못했는데 벌서 이렇게 늙어 가는구나그렇지만, 결국은 이렇게 살아 숨쉬고 있다는 것 자체가 고귀하고, 이것이 기쁘고, 이것이 고귀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앞으로 동학을 강의할텐데, 동학사상은 오늘의 우리 모습을 이해하는데 아주 중요한 우리 민족의 Bible이라고 생각합니다.

동학사상의 모든 가능성은 동학 이전의 최한기(崔漢綺)라는 사상가에 의하여 그 시대적 정신이 구현되어 있었습니다. 최근에 이 최한기라는 걸출한 사상가에 관한 아주 재미나는 문헌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오늘은 그것을 중심으로 그분의 족적을 한번 보기로 하겠습니다.

 

(조선시대) 양반집 호적등본은 어마어마했습니다. 지금 보시는 것은 정확하게 준호구(準戶口)‘라는 것입니다.

조선왕조를 우습게 보는 사람도 있지만, (사실) 조선왕조는 대단한 나라입니다. 조선시대에는 백성(국민)이 누구인지를 알기 위해 3년마다 호구조사를 했는데, 출생자, 이주자, 사망자를 모두 조사했습니다. 그것을 호적중초(戶籍中草)라 하며, 정식 호적을 만들기 위한 전단계의 기초 자료로써 신청자(호주)가 직접 작성합니다.

 

호주(戶主)라는 말은 일제의 산물이고 당시는 주호(主戶)라고 했습니다.

主戶는 그 호()의 주인이라는 호주의 개념이 아니라 그 집에서 부역, 병역 등의 국역(國役)을 담당할 대표적 인물을 말하는데, 호주라는 말 자체가 남성 중심입니다.

 

미국과 일본은 여자가 결혼하면 여자의 성()이 없어지는데 한국은 여자 성이 없어지지는 않습니다.

 

주호(主戶) : 단순한 호주의 개념을 넘어서 국역(國役)을 담당

 

우리나라의 호적제도는 완벽하게 양성 평등, 즉 남녀평등제도입니다.

(이 부분에서 우리나라는) 17세기 중엽까지만 해도 거의 남녀가 평등한, 세계적으로 드문 남녀 평등 사회였기 때문에 남편이 죽으면 부인이 승계했습니다.

19세기 말엽 최한기의 호적에도 남자 쪽 4(四祖)가 나오고 그 다음에 여자 쪽 4(四祖)(함께) 나옵니다.

 

호적중초(戶籍中草)는 집에서 작성해서 향청(鄕廳 지방의 말단 기관=주민센터)에 제출하는데, 최한기는 서울에 살았기 때문에 한성부에 제출합니다.

이 당시의 한성부는 서울의 호적만 관리하는 것이 아니고 전국의 호적을 모두 관리했습니다. 제출된 호적문서는 호적고(戶籍庫 호적을 보관하는 곳)에 보관되었기 때문에 인구가 많은 곳의 호적고는 규모가 컸습니다.

 

호적단자(戶籍單子)를 제출하면 받았다는 (접수) 도장을 찍고 관청에서 보관했습니다. 호적에는 주소가 적혀 있었고, 과거(科擧) 보러 갈 때나 송사(訟事) 등에 초본이 필요하면 관청에 가서 필사본을 발급받을 수 있었습니다.

 

함풍(咸豊 중국의 연호) 2(1852) 모월 한성부에서 발급.

(당시 최한기의 주소지) 한성부 (漢城府) 서부(西部), 양생방(養生坊), 송현계(松峴契), 삼통(三統), 삼호(三戶)에 사는 생원(生員) 최한기(崔漢綺). (() > ())

 

호적단자(戶籍單子)는 호주가 손수 써서 향청(鄕廳)이나 한성부(漢城府)에 제출하는 호적원문입니다.

한성부(漢城府=서울)는 태조 5년에 1396년 정도전이 552방으로 나누고 그 이름도 만들었는데, 조선말까지 유지되었습니다.

 

(과거시험의) 문과에는 대과와 소과가 있었습니다.

소과는 생원시, 진사시로 나뉘었는데, 초시(初試)를 거쳐 회시(會試)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갈 자격을 얻는 자를 생원(生員)이라고 했습니다.

 

崔漢綺 호적 서문

崔漢綺 年五十 癸亥生 本朔寧

通政大夫 昆陽郡守 兼晋州鎭管兵馬同僉()節制使 光鉉

生父 學生致鉉 學生配觀 曾祖 成均生員之嵩

外祖 本安東 娶朴氏 齡五十三 庚申生 籍蕃南 父 學生宗赫 學生經源 曾祖 學生師完

外祖 通訓大夫 行魯城縣監 兼公州鎭管兵馬節制徒尉 李集明 本慶州 率有幼學柄大 年三十四 己卯生 娶申氏 齡三十七 丙子生 籍高齡 率奴婢秩 五月 年庚子生 不知 母婢一分 一所生

최한기는 나이가 50이며, 계해생이고, 본관은 삭녕이다.

아버지는 통정대부이며 곤양군수와 진주진관병마동첨절제사(무관 벼슬)를 겸직한 광현이다.

사조의 생부는 학생 치현이고, 조부는 학생 배관이다. 증조부는 성균관 생원이며 이름은 지숭이다.

외조부는 김박 이고 (이 당시 호적 기록에 사용된 종이는 호적지라고 해서 질이 좋지 않았는데, 특히 이 종이는 질이 나쁜 것이기 때문에 이름의 가운데 자가 없어졌다) 본관은 안동이다.

아내는 박씨이고 나이는 53(최한기 보다 3세 위)인 경신생이며 본관은 반남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학생 종혁, 조부는 학생 경원이다.

 

영상 : 도올 김용옥 - 우리는 누구인가 제15'죽음과호적' 2/4

 

 

증조는 학생 사완이고, 외조는 통훈대부로, 로성 현감과 공주진관병마절제도위를 겸직한 이집명이다. 본관은 경주이며. 슬하에 유학 병대가 있는데 그의 나이는 34로 기묘생이고 아내는 신씨이며, 나이는 37, 병자생이고 본관은 고령이다.

 

노비를 여러 명 거느리고 있는데 차례로 말하면, 여자 노비는 이름이 오월이며, 나이는 경자생이고, 그녀의 아비는 알 수 없으며, 어미의 이름은 일분이고 소생이 하나 있다.

 

기유(己酉 1849) 호구상준자(戶口相準者)

이 호적은 3년 전의 호구와 비교하여 같다는 의미

 

최항(崔恒 1409~1474)

삭녕 최씨(朔寧崔氏) 중 유명인사. 조선 초기의 문신(文臣).

<용비어천가> <동국정운> <훈민정음 해례> <경국대전> 등 찬진.

 

최한기의 호적에 들어있지 않은 아들과 딸들은 반드시 딴 곳에 등재되었을 것입니다. 당시 국가(조선)에서는 호구가 많아야 세수(稅收)가 많았기 때문에 등재하는 쪽에서는 될 수 있는 대로 (호적을) 줄이려 했던 반면에 조정에서는 늘리려 했습니다. 이런 것은 조선조 호적제도의 문제점이엇습니다.

 

조선조의 호적은 양반이라는 신분을 과시하고 과거 때 사용되는 것이기도 하지만,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양반들의 재산인 노비문서도 되었기 때문에 호적에는 노비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적었습니다.

 

노비(奴婢) ()=남자 종, ()=여자 종.

 

양반들은 노비의 숫자를 증가시키기 위하여 천자수모법(賤子隨母法)을 제정했습니다.

고려시대인 1039년 처음 제정된 이 법은 고려시대부터의 풍습이 된 악법(惡法)이었습니다.

어미가 천인이면 비록 아비가 양인이라 할지라도 어미의 신분을 따라 천인이 된 것인데, 노예의 숫자를 늘리려는 데에 이 법의 목적이 있었습니다.

양반들에게는 좋은 법이었으나 국가적으로는 손해였습니다. 노비로부터는 세금을 거두지 않았기 때문에 노비제도는 조선왕조의 큰 문제점이었습니다.

 

노비제도를 폐지하려고 해도 양반들이 반대했습니다.

(조선왕조에서) 노비제도가 없어진 것은 동학농민혁명 때인 갑오경장 이후 부터입니다. 갑오경장(甲午更張) 당시에, 동학혁명의 요구 중 하나는 노비제도의 폐지였는데, 갑오경장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노비제도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17세기 내지 18세기에는 노비의 인구가 확실하게 전체 인구의 절반을 넘었습니다. 오늘 여기에 계신 여러분들 중 절반이 노비의 후손들입니다. 그것은 속일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와서 양반 상놈 따지는 것은 전부 사기입니다.

 

종들은 아버지를 모르고 태어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노비 문서의 성명은 대부분이 이뿐이=, 개똥=, 칠돌=七乭(돌 밑에 을의 음을 따서 씀) 등등 아무렇게나 지은 이름이다.

 

영상 : 영상 : 도올 김용옥 - 우리는 누구인가 제15'죽음과호적' 3/4

 

 

조선시대의 공문서 결재(決裁)는 한성의 당상관(堂上官 정삼품-지금의 국장급 이상)이 수결(手決)로 했습니다. 서양보다 우리가 먼저 수기(사인 私印)을 했던 것입니다. (도장은 일제의 산물)

그러나 한성 같은 데서는 민원이 많아 사인을 도장화(圖章化)하여 사용했습니다. 최한기의 호적에 나오는 결재 사인(私印)은 수결이 아니고 사인을 도장화한 것입니다.

 

사조(四祖)란 부(), (), 증조(曾祖), 고조(高祖)를 말하는데, 호적에는 먼저 남자 쪽 사조(四祖)가 나오고 그 다음 여자 쪽 사조(四祖)가 나옵니다.

호주인 남자 쪽이 사망했을 때, (지금은 아들이 승계하지만) 고려시대를 거쳐 17세기 중엽까지, 즉 장자상속의 유교 종법사회 이전까지는 완전히 남녀평등이었기 때문에 여자가 승계(상속)를 했습니다.

이것은 세계적으로 드문 일입니다.

 

최한기는 44살에 문과에 급제했습니다.

부자간의 연령 차이가 16살이었는데, 16살 연하의 아들이 그의 평생 친구였습니다. 책을 저술하면서 아들과 담소하고 아들이 아버지의 글을 필사하면서 사이 좋게 살았다고 합니다.

 

많은 노비를 거느리고 살았던 최한기의 말년은 엄청나게 가난해져서 저서를 쓰는데 종이가 없어서 쌀을 외상으로 빌려 종이를 사왔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최한기가 망한 이유는 책을 너무 많이 사느라 가산을 탕진했기 때문입니다.

당시에 신간 서적이 나오면 한양(서울)의 모든 서점이 최한기에게 가져갔다고 합니다. 최한기는 이처럼 책을 사기 위해서 집도 팔고 패가망신을 했다고 하는데, 다음의 일화를 읽으면 책에 대한 그의 애착을 알 수 있습니다.

 

或言購書多費者(혹언구서다비자) 惠岡曰(혜강왈) 假令此書中人(가령차서중인) 竝世而居(병세이거) 雖千里(수천리) 今吾不勞以座致之(금오불로이좌치지) 購書雖費(구서수비) 不猶愈於齎而適遠乎(불유유어재리이적원호)

어떤 사람들은 내가 책을 사는데 돈을 많이 쓴다고 하는데, 가령 이 책 속의 사람이 수 천리 떨어져 살고 있다면 그 먼 길을 갔다 와야 할 것인데 책을 사면 돈이 들지언정 나는 지금 힘 안 들이고 앉아서 그 사람을 볼 수 있으니 얼마나 행복한가!

 

구서(購書 책 구입)에 가산을 탕진한 최한기는 말년을 초라하게 보내다가 죽었지만 그는 죽을 때까지 학문에 대한 열정 속에서 살았던 분이며, 이런 분들의 노력으로 우리는 이렇게 개명된 세상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영상 : 영상 : 도올 김용옥 - 우리는 누구인가 제15'죽음과호적' 4/4

Posted by 망중한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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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즉기 기즉천 (天卽氣 氣卽天)

 

 

 

 

항상 이렇게 강의를 들으려 와주시는 여러분께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격려 덕분에 이 강의를 열심히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저는 지난 주 문화일보 기자직을 그만 두었습니다. 2002 12 2일에 발령이 난 이후로 2004 4 3일까지, 문화일보의 평기자로서 1년 반 동안 나름대로 행복하게 지냈습니다.

문화일보의 편집국 분위기는 일체의 외부 간섭이 없었기 때문에 편집국은 그들의 상식 위에서 신문을 만들어 왔습니다. 하지만 신문사 측에서 저의 기고문인 도올고성의 주관적 해설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였기 때문에 제가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도올 고성'이라는 칼럼에 실린 제 글이 너무 한 쪽으로 치우쳐 있다는 것입니다. 문화일보는 치우침 없는 신문을 만들고자 하기 때문에 '도올 고성'을 실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문제라고 여기는 부분에 대해서 수정이라도 하겠다고 했으나 그들은 저의 제의를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결국 저는 “선비는 각필(閣筆)은 할 수 있으나 곡필(曲筆)은 할 수 없다” 하고 문화일보를 그만 둔 것입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오로지) 객관적인 사실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든 글에는 해석이 들어가 있고 치우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언론에서 치우지 않는다는 기사는 있을 수 없습니다. 치우치는 (치우칠 수 밖에 없는) 기사를 어떻게 공평하게 싣느냐가 안 치우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사태에 대해서 서로 상충되는 견해의 기사라 할지라도 열린 마음으로 포용하는 아량이야 말로 치우치지 않는 언론의 자세인 것입니다.

 

제가 칼럼에서 표현하고자 했던 내용 중에서 한쪽으로 치우쳤다고 하는 중요한 부분에 대해서 설명해 보겠습니다.

 

지금, 법에 대한 국민의 인식이 크게 잘못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영화 등을 통해서 미국의 재판과정을 볼 때는 법원이 마치 극장 같습니다. 원고 · 검사 · 피고 간에 형사 사건에 대한 공방을 진행하는데, 이 장면에서 법정은 하나의 드라마 무대와 같습니다. 재판은 12명의 배심원 앞에서 진행됩니다.

배심원은 다수결로 유죄(Guilty), 무죄(Innocent)가 여부를 결정하고 판사는 형량만을 결정합니다. 중요한 사실 인정은 배심원이 하며, 후속적인 형량결정만 판사가 하는 것입니다.

재판정에 참석한 배심원은 전혀 법률 전문가나 법조인이 아닙니다. 아주 평범한 일반 시민이며, 사법부에서 무작위로 뽑은 사람입니다.

법관이 전적으로 법을 적용하는 것이 아니고 범죄에 관한 진위 판단이나 사실인정은 법관이 아닌 그 시대에 살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의 상식에 맡기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에서 배심원 제도가 생긴 것입니다.

 

▶당사자주의 : 형사소송절차에 있어서 원고인 검사와 피고인이 소송의 당사자가 되어 소송을 진행시키는 주의. 직권주의에 대칭되는 말.

 

배심원제도에는 진위 자체의 인위적 결정은 인식론적으로 많은 문제점을 내포한다는 생각, 즉 진위 여부나 시비의 판단은 그 사태가 속한 사회의 상식적 컨센서스(Consensus=합의)에 맡기자는 생각이 깔려있습니다.

 

영미법에서의 법(Law)은 있는 것(Being)이 아니라 그 사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것(Becoming)입니다.

법을 존재론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생성론적으로 생각합니다.

영미법, 특히 시민의 권리에 관한 민법은 법전이 없습니다. 사람들의 상식에 의해서 법률이 만들어지는 것이며, 그것을 불문법(Unwritten Law)이라고 합니다. 영미법은 불문법이며. 관습 및 판례 중심의 법입니다.

 

불문법(不文法 Unwrittenlaw) : 영미법 : 관습•판례 중심

성문법(成文法 Writtenlaw) : 대륙법 : 법전 중심

 

그에 반해서 성문법은 법전 중심이며, 독일과 프랑스 계통의 대륙법을 말합니다.

법전은 하나의 시스템이며, 법관이 그것을 해석하고, 인간사회의 질서, 규범을 내려주고 있습니다. 대륙법 중에서는 참심제도를 두어 국민의 참여를 허용하고 있는 나라도 있습니다.

 

서양에서 법이라는 것은 마그나 카르타 이래로 귀족들이 왕권을 제약하기 위해 자기들이 낸 일종의 성명서 같은 것입니다. 그런 성명서들이 역사 속에 계속 쌓여서 법이 된 것입니다. 법은 반드시 그 역사의 내재적 맥락과 체험으로부터 우러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법조계는 법관권위주의를 고집하고 있습니다.

헌법학자 뢰빈슈타인은 헌법을 ①규범적 헌법, ②명목적 헌법, ③장식적 헌법으로 분류했습니다.

1948 7 17일에 대한민국 헌법이 제정 공포되었지만 우리나라 헌법은 역사의 내재적 맥락과 관계가 희박한 명목상의 헌법입니다.

법이란 옷과 같은 것으로 신체가 바뀌면 옷이 바뀌어야 합니다. 하지만 마치 어린 아이에게 멋진 어른의 옷을 입혀놓고 어린이가 커서 맞춰지도록 하는 것과 같은 것(우리 헌법과 같은 것)을 명목적 헌법이라고 합니다.

 

성문헌법으로는 미국의 헌법이 대표적인 것입니다.

대표적인 성문헌법인 미국 헌법은 독립전쟁을 거치면서, 영국에 항거하면서, 신대륙에 어떠한 나라를 만들어야겠다는 미국의 사상가 비전을 요약해서 제임스 메디슨을 비롯한 55명의 대표가 필라델피아에 모여 1787년에 성립한 것이 미국 헌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시민들은 그들의 헌법을 달달 외우고 있습니다.

 

모든 민권헌법은 계속 수정될 수 밖에 없고, 계속 수정되어 오고 있습니다. 미국의 헌법도 Amendment 즉 수정안들이 누적되어 이루어진 헌법입니다.

 

대한민국 헌법 1: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2.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지금은 이런 말이 굉장히 설득력이 있지만 전두환 시대에 이런 말을 하면 어땠을까? 당시의 헌법은 “대한민국은 독재국가다. 주권은 독재자에게 있고 권력은 독재자로부터 나온다.”라고 되어 있어야 맞는 헌법이었다는 말입니다.

 

영상 : 우리는 누구인가 제14 '법과 기학' 1/4

 

 

영국의 헌법은 불문율로 되어 있는 불문헌법(Unwritten Constitution)입니다.

세계 역사상 법치와 민주주의가 가장 발전한 나라가 영국이라고 하지만, 막상 영국에는 헌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마그나 카르타(1215), 권리청원(1628), 인신보호법(1697), 권리장전(1689), 왕위계승법(1701) 등이 계속 이어져온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

Status of judicial precedent, text books, law books, the writings of historians and political theorists, the biographies and autographies of statesmen, the columns of every serious newspaper, the volumes of Hansard, the minutiae of every type of government record and publication. This is what is meant by saying the English constitution is unwritten.

교과서, 법률저서, 역사가들과 정치이론가들의 저작, 정치이론가들의 저작, 정치가들의 자서전과 자필문서, 모든 주요 신문의 사설, 정부의 기록 간행물 등등 모두가 영국 불문법 헌법에 속한다.

영국의 헌법이 불문법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초기 정도전에 의해 ‘조선경국전’이라는 이름의 성문헌법이 최초로 만들어지고, 성종 때 <경국대전:經國大典>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불문법이 있었는데, 공자의 사상에 예()와 법()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子曰(자왈): 道之以政(도지이정), 齊之以刑(제지이형), 民免而無恥(민면이무치), 道之以德(도지이덕), 齊之以禮(제지이례), 有恥且格(유치차격)

정치로써 백성을 이끌고, 형벌로써 가지런히 한다면 백성들은 법망(형벌)을 피하기 위해 염치를 버리게(부끄러움을 모르게) 될 것이다.

백성을 덕으로서 이끌고 예로서 가지런히 한다면 백성들은 염치도 있고 질서도 있을 것이다.

 

조선왕조의 <경국대전>은 왕의 통치수단으로써의 법이기 때문에 골격은 형법(Criminal Law)이었습니다. 한국의 전통적 법은 형법이었습니다. 법을 포도청 나졸이 백성들을 때려 잡는 무서운 것으로만 알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백성들은 법을 피해야 하는 것으로만 생각하게 됐습니다.

 

민법(民法)은 것은 법을 통해서 백성(국민)들의 권리를 찾으려는 사상을 법으로 규정한 것입니다.

조선시대에는 법을 통해서 나의 권리를 주장하고, 법을 통해서 역사를 바꾸고, 법을 통해서 혁명을 하고, 법을 통해서 진리를 밝힌다는 것이 없었습니다. 조선시대(까지)의 법은 형법뿐이었습니다. 불행히도 오랜 세월 동안 전통적 규범이었던 우리의 예()와 법()(백성의 권리를 밝히는) 민법으로 발전하지 못했고, 불문법으로도 발전하지 못했습니다.

유교사상은 불문법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법 체제에서 유리되어 갔습니다.

 

조선역사 500년 동안 추구한 것은 4(四端)이었는데, 이것은 서양의 자연법(Natural Law)사상이 말하는 바와 같이 인간의 본성에 내재하는 도덕적 질서를 말합니다.

조선의 주리론(主理論) 전통은 자연법의 추구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리론, 곧 자연법 추구는 노모스(Nomos)를 뛰어넘는 피지스(Physis)였습니다. 법이 인간을 위해 있는 것이지 우리가 법을 위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이 법을 위해 있는 것 같은 이런 난센스(Nonsense)가 또 어디에 있습니까?

▶노모스 Nomos : Latin어로 Melody, 즉 ‘가락’

▶피지스 Physis : Latin어로 ‘자연의 작품’ 또는 ‘물리적인 성질’

 

우리는 조선 사상사를 다시 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조선사상사를 강의하는 중요한 이유는 바로 이러한 모든 (근원적인) 문제가 현재의 우리 현실과 얽혀있다는 것에 있습니다.

 

조선왕조는 500년을 지내면서도 근원적으로는 시대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조산 후기에 이르러) 바야흐로 새로운 역사의 변화가 오기 시작할 때 그것을 감지하고 새로운 역사를 만들려는 대표적인 사상가로 혜강 최한기(惠岡 崔漢琦)라는 인물이 꼽힙니다.

 

▶최한기(1803~1877)의 본관은 삭녕(朔寧), 호는 혜강(惠岡), 19세기 중엽, 새로운 사상 패러다임을 만든 대 사상가. 원래 개성 사람으로, 서울로 이주했다.

 

최한기의 선조는 집은 부유한 편이었지만 10대를 통해 과거급제자가 없었습니다. (家素裕 : 집은 원래 부자였다).

최한기는 어려서 양자를 갔는데, 무과에 급제한 양()증조부인 최지숭(崔之崇)에 이어 양부인 최광현(崔光鉉)도 무과 급제를 하여 벼슬은 곤양군수와 진주진관 병마동첨절제사에 이르렀습니다.

 

19세기 우리나라 최고의 사상가인 최한기는 서울 남대문 시장 쪽, 지금의 한국은행 본점 자리에 대궐 같은 집을 짓고 살았습니다.

육당 최남선 선생의 <조선상식문답속편>에 의하면, 조선 역사에서 가장 저술을 많이 한 사람이 최한기이며, 저서는 <명란주집>이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천 권을 저술했다고 하므로 아마 300~400권은 족히 되었을 것입니다(보통 3~4책이 한권 임). 그가 저술한 책 중 상당부분이 유실되었으나 아직도 많이 남아 있습니다.

 

최한기는 신비로운 인물입니다.

당대의 명망가들과 교류가 없었고 제자가 없었고 문집도 없었습니다. 정약용은 제자가 있었지만 최한기는 제자가 없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조선조 말에 가장 많은 저서를 소장하고 있었는데, 동양 전통 고서 외에도 당대에 출간된 서양의 (인문) 서적은 물론 모든 과학서적까지도 갖추고 있었습니다.

 

영상 : 우리는 누구인가 제14 '법과 기학'  2/4

 

 

그리하여 중국 북경 정양문 내의 인화당(人和堂)에서 최한기의 30대 저서인 <신기통> <추측론>을 묶어 <기축체의>라는 이름의 활자 디럭스판으로 간행되었습니다.

조선의 학계에서는 최한기를 잘 몰랐고 19세기 조선에서는 중인들이 가장 깨어있었으며, 그들은 해외여행도 자주했기 때문에 역관(譯官)이나 중인(中人)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중인(中人)이란 조선 시대에 양반과 상민의 중간에 있던 신분 계급을 말합니다.)

 

실제로 최한기는 당대의 어마어마한 양반임에 틀림없습니다.

역사적인 대작(大作)들을 저술한 그의 저택 안에는 기화당(氣和堂), 양한당(養閒堂), 장수루(藏修樓), 긍업재(肯業齋) 등의 네 채의 건물과 24명의 종( 13, 11)이 있었습니다.

 

당시(구한말)의 조선은 안동 김씨, 풍양 조씨 등의 세도정치와 민비(閔妃=명성황후), 대원군, 고종황제 간의 세력다툼이 벌어지고 있던 혼탁한 사회였습니다.

이처럼 엉망인 정치상황 속에서도 최한기는 정치와 권력의 변화와는 무관하게 인류 평화를 생각하고 세계를 바라보면서 살다가 갔습니다.

우리는 조선 후기가 최한기와 같은 사상가가 활동할 수 있었던 문화였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정치사적 맥락과는 무관하게 최한기는 너무도 멋지게 살다 간 희대의 인물이었습니다.

 

최한기를 19세기 조선의 Cosmopolitan(=세계인)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최한기 사상의 특이점은 오륜(五倫)에 일륜(一倫)을 더한 육륜(六倫)이라 하는 데서 엿볼 수 있습니다.

君臣有義(군신유의), 父子有親(부자유친), 夫婦有別(부부유별), 長幼有序(장유유서), 朋友有信(붕우유신)의 오륜(五倫)兆民有和(조민유화)를 더했습니다.

兆民有和(조민유화)란 억조창생, 즉 모든 인간은 화합한다는 뜻입니다.

 

최한기는 55세에 한국 역사상 최초의 세계인문지리서인 지구전요(地球典要)를 저술하기도 했습니다. 지구전요(地球典要)에는 나라이름, 수도, 인구 등이 상세히 기술되어 있습니다.

최한기의 유일한 친구는 대동여지도의 저자인 김정호입니다. 조선시대에 이분 이상의 위대한 인물은 없을 것입니다.

 

(국민이라면) 우리나라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아야 합니다. 나라의 모습을 그린다는 것은 근대정신의 소산입니다.

김정호의 지도는 오늘날의 인공위성이 촬영한 것보다 더 정확합니다. 생김새(지형)도 정확합니다. 걸어 다니면서 어떻게 그렸을까? 현대과학으로는 풀 수 없는 미스터리 투성이입니다.

종래의 지도는 김정호의 지도에 비교도 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김정호의 친구인 최한기도 정확한 세계지도를 그렸습니다. 모든 나라의 수도, 인구, 정치제도 등을 적었습니다.

 

文一平(1886~1936)의 조선명인전(朝鮮名人傳)에는 최한기와 김정호가 남산 꼭대기에 올라 밤의 별을 쳐다보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나눈 것으로 기술되어 있습니다. 두 위인은 기()를 토하면서 말했습니다.

조선의 기를 먹고 살고 있으니 무언가 조선을 위해서 의미 있는 인생을 살아야 하지 않는가!”, 그리고 학문으로서 치안(治安=치민<治民>과 안민<安民>)을 이룩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가 아닌가!”

조선의 정치가 무엇 하나 돌아가는 것이 있는가? 안동김씨, 풍양조씨들이 전부 사랑방 정치를 하고 있지 않는가? 국정은 날로 혼미해가고 있다. 정호야! 너는 지리(地理 : 땅의 이치)를 맡아라. 나는 천문(天文=天紋=하늘의 무늬=하늘의 질서=모든 보편적 법칙)을 맡겠노라고 기염을 토했다고 합니다.

 

지리를 공부한 김정호는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를 남겼고, 천문을 공부한 최한기는 기학(氣學)을 연구했습니다.

 

천즉기(天卽氣), 기즉천(氣卽天) 하늘은 기로 되어 있고 기는 곧 하늘이다. , 우주는 기다.

 

“나는 기를 연구하겠다.”한 최한기는 평생을 기() 하나의 연구에 몰입했습니다.

과거 우리가 알았던 (성리학) 이기론의 기가 아니라, 이 사람의 기는 100% 과학적인 기였습니다.

기학(氣學)’은 최한기가 55세 때 연구한 우주론의 대작입니다. 이 책은 19세기 조선의 가장 개명한 사상가인 최한기의 포괄적 우주론을 담고 있다. 최한기의 기학(氣學)’은 정말로 위대한 책입니다.

 

기학(氣學)’ 서두에,

中古之學(중고지학), 多宗無形之理(다종무형지리), 無形之神(무형지신), 以爲上乘高致(이위상승고치)

옛날부터 지금까지의 학문에서 사람들은 여러 가지 무형의 리()와 무형의 신()을 받들었다. 애매모호한 것을 숭상했다.

 

신기(神氣)는 신천(神天=God)에 해당하는 최한기의 기()개념입니다.

혜강 최한기는 하느님도 기일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기 자체가 형체이며, 신적인 것이므로 모든 것은 유형으로 환원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혜강 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 논점은 바로 무무(無無)입니다.

무무(無無), ()는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유형의 구체적 증거가 있는 것이고 형태가 없는 것은 무()라는 말입니다.

 

모든 것은 유체적인 유형의 근거가 있는 것이고 그 유형의 근거도, 형체가 있는 것이라 할지라도 (어떤 경우에도), 우리가 무형이라 생각하는 모든 것이 유형이다. 앞으로 내가 하는 학문은 형체가 없는 것이라고는 없다.”

이것이 바로 최한기의 근대 과학사상의 출발이다.

 

영상 : 우리는 누구인가 제14 '법과 기학'  3/4

 

 

정도전에서 이퇴계에 이르는 모든 유학적 패러다임은 최한기에 의해서 완전히 바뀌게 됩니다.

우리 민족에게도 개명(開明), 현실적인, 세계의 학문으로 발전해 가게 됩니다.

개화기의 사상가들(김옥균, 유길준, 박영효 등)은 서양 콤플렉스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일본에 가서 서양을 배웠습니다. 서양 제국주의 학문인 진화론의 희생양들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동도서기(東道西器) 운운하는 유치한 논리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입니다.

東道西器 : 동양의 도에 서양의 그릇, 즉 정신은 동양적인 것을 유지하는 가운데 서양의 물질문명을 수용한다는 의미

 

최한기는 조민유화(兆民有和), 즉 지구상의 모든 민족, 종족이 편견 없이 대등하게 교류되어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19세기 당시에도 그는 “흑인들도 우리와 똑같이, 세상의 모든 사람과 같이 대접해야 한다.” 고 했습니다.

우리는 서양으로부터 배울 것이 많다. 서양의 과학은 뛰어나다. 기학에 있어서도 그들은 근거 있는 유형의 기로부터 법칙화시켰다. 그들은 모든 것을 계량화시키고 잴(계측할)수 있게 해 주었다. 이때까지 우리가 무형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잴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러면서 서양문명은 우리가 갖고 있는 정신문명을 깊게 배워야 한다고 질책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19세기 중엽이라 하면 민란이 가장 많이 일어나고, 외세가 가장 빈번히 침범해 오는 처참한 역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 역사는 이렇게 위대한 사람, 가장 위대한 사상가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바로 최한기입니다. 그의 저서는 2세기가 지난 오늘날에 읽어도 현재의 어떠한 물리학자의 세계관보다 뛰어난 것이며, 거의 2세기가 지난 오늘날에도 이 책에 상응하는 과학적 우주론이 한국인에 의해 시도된 바는 없습니다.

 

제가 여기까지 나와서 소리치는 것은 도올 김용옥이 잘 나서가 아닙니다.

이 땅에는 저보다 몇 백배 훌륭한 사상가들이 꾸준히, 남모르게 피눈물을 흘리며, 조국의 운명을 걱정하면서 키워 온 역사가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날 이 역사의 수레바퀴가 바야흐로 이들이 꿈꾸었던 세계를 이룩하려는 역사로 진입하고 있는 것이며, 우리가 우리의 역사를 바르게 알아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투표장에 가야 합니다.

특히 젊은이들은 한 명도 빠지지 말고 투표장에 가서 귀중한 한 표의 권리와 의무를 행사해야 됩니다.

20세의 어린 아이들에게까지 한 표의 투표권이 주어지기까지 인류 문명은 희랍인들의 데모크라시로부터 시작해서 2,500년 동안 노력했고, 그 노력의 결과로 오늘의 여러분들에게 투표권이 주어진 것입니다.

이것은 인류가 2.500년 동안 왕정과 투쟁해서 얻은 (민주주의 투쟁의) 결과인 것입니다.

 

현재의 나의 존재를 우연적 존재로 생각하지 말고 기나긴 인류사의 정신문명의 성취 속에 나의 존재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귀중한 한 표를 행사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영상 우리는 누구인가 제14 '법과 기학'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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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유학은 인간을 이성의 주체로 파악하기보다 감정의 주체로 파악한다.

 

 

 

지난 시간에 탄핵정국에 대한 의미심장한 말들을 많이 했기 때문에 이번 시간에도 뭔 이야기를 하나 쳐다 볼 사람이 많을 것 같은데. 제가 사실은 몸이 상당히 아프지만 강의를 안 할 수가 없어서 나왔습니다.

 

제가 의사입니다. 병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할까 합니다. 현대인의 병은 전부 스트레스와 관련이 있습니다. 몸 안에서 오는 발병은 전부 다 칠정(七情)과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조선 유학은 인간을 칠정의 주체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조선 의학도 인간을 감정(七情)의 주체로 파악했다.

 

조선 사상사의 한 정점인 이제마(李濟馬 1837~1900)도 인간의 질병을 감정의 문제로 파악했다. ( 이제마(李濟馬:1837~1900): 조선조 말엽 사상의학(四象醫學)을 창시한 대 사상가)

 

이제마는 인간의 성정에 있어서 애노희락(哀怒喜樂)의 치우친 상태를 분석하는 것으로 사상의학의 틀을 세우고 인체를 상중하(上中下) 3()로 나누었습니다.

사상의학에서 모든 체질(Constitution)은 선천적으로 오행관계가 치우쳐 있는 구조를 말합니다.

 

이제마 4체질 분류

 

1. 태양인(太陽人)

폐가 크고 간이 작으며 가슴 윗부분이 발달한 체형.

목덜미가 굵고 실하며 머리가 큰 대신에 허리 아랫부분이 약하며, 엉덩이가 작고 다리가 위축되어 서있는 자세가 불안정해 보인다.

다른 사람과 사교하는 데 소통을 잘하는 장점이 있고, 과단성이 있어 사회적 관계에 유능하다.

태양인은 소변량이 많고 잘 나오면 건강하다. 입에서 침이나 거품이 자주 나오면 병이 된다. 담백한 음식이나 간을 보하고 음을 만들어 주는 식품이 맞다. 지방질이 적은 해물류나 채소류가 좋으며 병에는 오가피장척탕이나 미후등식장탕이 좋다.

 

2. 소양인(少陽人)

비대(脾大) 신소(腎小)하며 가슴이 성장하고 충실한 반면 엉덩이 아래로는 약하다.

상체가 실하고 하체가 빈약하며 앉은 모습이 외롭게 보인다. 말하는 것이나 몸가짐이 민첩해서 경솔하게 보일 수도 있고 눈에 정기가 있고 입술은 엷으며 턱은 뾰족하고 성격은 급하면서 쾌활하다.

굳세고 날랜 장점이 있고, 일을 꾸리고 추진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양인답게 굳세고 강인함도 있고 적극성도 있어서 어떤 일에 착수하는데 어려워하지 않는다.

소양인은 대변이 잘 통하면 건강상태이다.

비뇨기 ·생식기 기능이 약하며 일반적으로 배추 ·오이 ·보리 ·밀 ·녹두 ·해삼 ·돼지고기와 찬 음식을 좋아하고, 더운 음식과 기름기 많은 음식을 싫어한다. 병에는 양격산화탕 ·육미지황탕 ·양독백화탕 ·형방폐독산 등을 많이 사용한다.

 

3. 태음인(太陰人)

간이 크고 폐가 작으며 허리 부위의 형세가 성장하여 서있는 자세가 굳건한 반면에 목덜미 기세가 약하다. 보통 키가 크고, 작은 사람은 드물다. 대개는 살이 쪘고 체격이 건실하며 간혹 수척한 사람도 있어도 골격만은 건실하다.

성격은 꾸준하고 침착하며 무슨 일이든 시작한 일, 맡은 일을 이루어 성취하는 데 장점이 있으며 어느 곳에서나 잘 적응하는 재간이 있다.

태음인은 땀구멍이 잘 통하여 땀이 잘 나오면 건강하다.

호흡기와 순환기 기능이 약해서 심장병 ·고혈압 ·중풍 ·천식 등에 걸리기 쉽고 지방질이 많은 식품은 좋지 않다. 고단백질의 식품이 좋고, 채소류 ·해물류가 좋고, 자극성 있는 조미료나 닭고기 ·개고기는 해롭다. 병에는 청폐사간탕이나 태음조위탕을 복용하는 것이 좋다.

 

4. 소음인(少陰人)

신대(腎大) 비소(脾小)하며 엉덩이가 크고 앉은 자세는 크지만 가슴둘레를 싸고 있는 자세가 외롭게 보이고 약하다. 보통은 키가 작으나 드물게 장신이 있고 상체보다 앞으로 수그린 모습을 하는 사람이 많다.

유순하고 침착하며, 사람을 조직하는 데 능하다. 마음 씀씀이가 세심하고 부드러워 작은 구석까지 살펴서 계획한다.

소음인은 음식소화만 잘 되면 건강하다.

먹는 양도 적고 빙과류 같이 찬 것이나 생맥주 같은 것을 먹으면 설사하기 쉽다. 고추 ·파 ·마늘 ·감자 ·미나리 ·닭고기 ·명태 ·개고기 ·대추 등과 더운 음식, 매운 음식을 좋아하며 찬음식을 싫어한다. 병에는 십전대보탕 ·향사양위탕 ·보중익기탕 ·곽향정기탕 ·소합향원 등이 있다. (출처 NAVER 백과사전)

 

 

() : 호흡기관인 Lung(폐장기) 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두뇌를 포함한 인간 상초 전체의 기능→금기(金氣)에 해당

 

동양에서는 肺()과 肝(), ()와 腎()는 상극(相剋)관계로 봅니다.

(, 하나가 성하면 다른 하나는 쇠한다는 것.)

 

 

人稟臟理(인품장리), 有四不同(유사부동)

 

1. 肺大而肝小者(폐대이간소자) 名曰太陽人(명왈태양인)

인간에 있어 상초가 강한 사람은 하초가 약하다. 화를 잘 내지만 금방 잊는다. 결벽증이 많고 괴팍하다. 예술가가 많다. 간이 작기 때문에 육식을 피해야 한다.

살이 쉽게 빠지는 스타일. 머리가 크고 엉덩이가 작고 가슴 윗부분이 발달. 가을을 만나면 안 좋다. : 봄을 만나야 좋다. 방향으로 말하면 동쪽. 봄만 되면 펄펄 난다. 금붙이는 안 좋다. 금니도 안 좋다.

태양인 인구 분포는 논할 가치가 없을 만큼 거의 없다.

 

2. 脾大而腎小者(비대이신소자) 名曰小陽人(명왈소양인)

비위가 좋은 사람. 속이 덥다. 소화를 잘한다. 성격이 좋아 욕을 먹어도 소화를 잘 시킨다. 살결이 보드랍고 얼굴이 흰 사람이 많다. 성격이 급해서 기차 시간 한 시간 전에 나가는 사람이다. 화를 잘 낸다. 뒤끝이 없다.

소심하여 일찍 약속장소에 나간다. 성격이 좁고, 화를 잘 낸다. 애노(哀怒)의 감정 표시를 잘한다. 그러나 뒤 끝이 없다. 가슴부위가 성장하여 충실하다. 솔직 담백하고 의협심이나 봉사정신이 강하다. 성격이 급하고, 마무리가 부족하다. 소양인 인구 분포는 30% 정도.

 

3. 肝大而肺小者(간대이폐소자) 名曰太陰人(명왈태음인)

소위 간뎅이가 부은사람. 과감하게 일한다. 술을 잘 먹는다. 이런 사람은 하초가 강하고 상초가 약하다. 사업가, 국회의원 등. 자본주의시대는 태음인의 시대. 키가 크고 체격이 좋으며, 목덜미의 기세가 약하다.

꾸준하고 침착하여 맡은 일은 꼭 성취하려고 한다. 보수적이어서 변화를 싫어한다. 봄을 만나면 아프다. 봄에 조심해야 한다. 봄을 탄다는 것은 체질적으로 봄에 간화가 성해지기 때문이다. 봄에 조심해야 한다.

태음인 인구분포는 50% 정도.

 

4. 腎大脾小者(신대비소자) 名曰小陰人(명왈소음인)

신장이 크고 비장이 작으며 비위가 좋은 사람. 정치가. 이재(理財)에 밝은 사람. 예술가 등. 육식은 좋지 않다. 흡연도 피해야 된다. 돈에 대한 관심이 많다.

()를 버리고 안일한 것을 좋아하는 형으로, 게으르기 싶다. 하체 비만 스타일 - 엉덩이가 크고 어깨가 좁은 형. 유순하고 침착하다. 내성적이며 적극성이 적고 추진력이 약하다.

소음인 인구 분포는 20% 정도.

 

영상 : 도올 김용옥 - 우리는 누구인가 제13 '사상의학과 봄' 1 of 4

 

 

 

 

오늘은 복잡하고 어려운 이야기를 피하고, 꼭 알아야 하는 최근의 국제정세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동북아 국제정세에는 두 개의 문제가 있는데, 대만문제와 남북문제가 있습니다. 대만문제는 이념문제, 통일문제 등이 상당히 복잡해서 역사적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대만의 역사를 알아야 합니다.

대만()은 중국문화권 밖에 있었는데 명나라 때부터 중국역사와 관계를 맺기 시작하게 됩니다.

 

대만은 원주민이 사는 섬이었습니다. 이들은 남방어계(南方語系)의 폴리네시안이며, 필리핀 최북단의 Bantam군도와 생활습관 및 언어가 비슷하고 동일한 문화권에 속하는 고산족입니다.

대만을 영어로 Formosa, 즉 ‘아름다운 섬’이라 하는데 대만을 처음 발견한 사람이 포르투갈과 스페인 사람들이고, 그들이 이 섬을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Ilha Formosa라고 했습니다.

 

포르투갈과 스페인 사람들이 대만을 처음 발견했지만 이 섬을 최초로 식민 지배한 나라는 네델란드(Netherlands)입니다 Netherlands의 총독이 1624~1662 38년간 식민지 지배를 한 것입니다.

1653년 효종 당시 제주도에 표류한 하멜이 탔던 상선(商船) Netherlands의 대만 총독부에서 일본 나가사키로 가던 배였습니다.

 

대륙에서 명()이 망하고 청()이 들어서자 반청(反淸)운동을 일으켰던 정성공(鄭成功)은 대만으로 망명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청나라가 정성공을 격파하고 대만을 청나라 복건성 관할의 대만부로 만들었고, 이렇게 해서 청나라가 대만을 212년간 지배한 것입니다.

 

한국에서의 동학(혁명) 이후에 일본이 중국을 침략하는 청일전쟁이 발발하고 일본이 승리합니다. 이토히로부미(안중근의사에 의해 하얼빈 역두에서 저격 피살됨)가 시모노세키(下關)조약에서 청국으로부터 전쟁배상금조로 대만을 넘겨 받아 1895~1945까지 50년간 식민지 지배를 합니다. 즉 조선 동학혁명의 대가로 일본은 대만을 얻은 것입니다.

 

대만은 일본에 의해 50년간 지배되었지만 식민지 피해의식은 없었습니다. 대만사람들은 자기들이 한번도 나라를 가져 봤다는 생각을 가지지 않았는데, 그런 이유 때문인지 식민지 피해의식이 없습니다.

대만의 지배자는 스페인→네덜란드→명나라→청나라→일본→중국국민당으로 바뀌어 왔습니다.

 

대만사람들에게는 식민지 통치자가 바뀐 것이 더 좋았습니다. 특히 일본의 대만통치가 대만인들에게 가장 좋은 정치였습니다. 학교도 세워 주고, 도로도 만들어 주었습니다.

대만인들의 저항이 없었기 때문에 일본통치자들과 50년간 좋은 사이로 지냅니다.

 

대만은 일본이 패망할 때까지, 1945 8월까지 50년간 일본의 통치를 받았는데, 일본의 패전으로 전승국인 중국에 반환되었습니다.

당시 중국은 (국민당과 공산당) 내란 중이었기 때문에 중국에는 주체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일본은 대만을 (중국 국가가 아닌) 국민당에게 넘겨줍니다.

대만을 접수한 국민당 패잔병들은 중국말은 못하고 일본말을 하는 대만인들을 모든 사회분야에서 쫓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이로 인하여 대만사람들의 불평이 이만저만 아니게 됩니다.

 

1947 2 27, 저 유명한 대만인 대학살사건이 발생합니다.

양담배를 팔던 한 대만 노파가 국민당 병사에게 무참하게 타살되자 불만에 쌓여있던 대만사람들의 민중봉기가 타이베이시 연평북로에서 일어나는데, 이 민중봉기를 저 유명한 2.28사건이라 합니다. 이 사건에서 약 2만 여명의 대만인이 학살됩니다.

 

오늘 날의 대만 사람 가운데 2.28사건과 연루되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행정 보도 자료에 28,000명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민간 소문에는 10만 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대만 전체의 산하가 피로 물들여졌습니다. 이때부터 38년간 대만은 국민당 정부의 계엄령 하에 놓여있었습니다.

우리는 (국민당이 대만에 세운 정부를) 자유중국이라고 불렀습니다.

 

영상 : 도올 김용옥 - 우리는 누구인가 제13 '사상의학과 봄' 2 of 4

 

 

대만 국민의 85% 가량은 본성인(本省人)과 대만인이고 나머지 13% 정도가 외성인(外省人)입니다.

본성인은 청나라 때부터 대만에 와서 사는 사람이고, 외성인은 1945 8월 이후 대륙에서 온 국민당원들과 가족들을 말합니다. 본성인과 외성인 사이에는 피맺힌 한이 있습니다.

본성인 출신인 이등휘가 1984년 중화민국역사상 최초로 직접선거에 의해서 부총통(부통령)으로 당선되고 (총통인 장징궈의 죽음으로) 1988~2000년까지 국정을 주도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대만 독립정신이 고취됩니다.

 

1986. 여전히 계엄령 치하인 대만에서 본성인 130여명이 중심이 되어 야당인 민주진보당(민진당)을 창당하는데, 2004년 천슈이벤(陳水扁)이 외성인 후보와의 직접선거에서 승리함으로서 대만 역사상 최초로 국민당이 아닌 야당 출신의 총통이 선출됩니다.

 

본토민(本土民) 중심의 본성인과 대만 원주민은 기나긴 400년 동안 국가의식을 가져 보지 못했습니다. 민진당의 집권으로 인하여 대만 민중들은 400년 동안의 외세지배로부터 주체적인 나라를 가져야겠다는 갈망을 한 층 높게 가지고 있지만 外省人들은 이것에 반대하고 있습니다.

 

과거의 철저한 반공산주의자였던 국민당 출신의 외성인들이 하루아침에 친공(親共)의 대륙주의자로 변해버립니다. 이 상황은 이데올로기가 얼마나 코믹한 것인가를 실감케 하는 것입니다. 본성인들이 볼 때는 웃기는 일입니다.

과거에는 자기들에게 반공(反共)을 부르짖다가 이제는 친공산주의자가 되어 “대만은 대륙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반공의 보루였던 대표적 신문, 연합보(聯合報), 중국시보(中國時報) 등 의 신문들도 대륙의 인민일보(人民日報)와 논조를 같이 하며 “대만은 대륙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대만사람들은 이제 그들의 정체성을 확보하려 합니다.

일변일국(一邊一國)을 표방하며 그들은 해양국가로써의 독자적인 국가를 세우려고 노력하는 한편, “대만은 이미 더 이상 중국의 일부가 아니다”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대만(자유중국)은 미국의 힘(영향력)으로 UN상임 5개국의 하나였지만 미국은 대만과 단교하고 본토의 중국과 수교를 했습니다. 그러나 현재(2004) 대만의 GNP 22,000, 우리보다 훨씬 선진국입니다. 외화 보유고 세계 2, 해외투자 2,000억불의 부국입니다.

 

미국의 최대 목적은 어떻게 하면 중국을 견제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미국은 북핵 문제를 빙자해서 중국을 견제하려는 속셈이 있다. 한편 북한이 말썽을 부리니 한국과 일본이 MD(미국이 주도하는 대북한 미사일 방어체제)에 참여하라고 (압박하며)... 이런 문제가 걸려있는 한, 미국은 쉽사리 한국에서 철군하지 않습니다.

 

미국의 입장에서 볼 때, 대만은 중국 본토에서 떨어지는 것이 더 낫습니다.

대만은 미국에게 “영원히 가라앉지 않는 항공모함이다.” 미국은 대만을 결코 포기할 수 없습니다. 미국은 대만 독립을 주장하는 陳水扁(민진당 출신, 본성인)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陳水扁은 국민당의 옌친(蓮戰)과 본성인 출신의 친민당(親民黨)의 송초유(宋楚瑜)와 대전하다가 결국에는 친민당과 합쳐서 승리했습니다.

 

박빙의 신승(辛勝)이긴 하지만 최초로 본성인에 의한 정권이 수립되었습니다.

민진당 후보(천수이벤)의 승리는 그것이 비록 압도적이지는 않다고 할지라도, 대만 인민의 자주적 열망 확산의 표상이며, 동아시아 역사의 민주세력의 진보를 나타냅니다.

 

중국은 대만을 흡수하는 문제에 급급하지 말고, 대만 문제를 해결하기에 앞서 자신의 도덕성을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대만 사회의 내재적 모순에 상응하는 자신의 모순을 해결하는 데 주력해야 합니다. 무리하게 해결하려고 하면 문제가 더 커집니다.

티베트문제와 고구려 (동북공정) 문제도 그럴 것입니다.

 

고구려 문제가 왜 생겼는지 아십니까?

과거의 고구려 역사를 중국 사람들이 자기네 역사로 무리하게 흡수하려 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말이 안 되는 것인데 중국은 왜 그렇게 하고 있는가?

남북통일의 대비책인 것입니다.

남한과 북한이 통일국가를 이루게 되면 당장 고구려의 고토인 만주 땅의 역사적 정체성이 문제가 됩니다. 그러므로 중국은 이 문제를 미리 못박아 두자는 것입니다.

 

중국은 한 때 세계를 지배하려 했던, 거대한 제국주의를 운영했던 나라입니다.

그런 나라가 세계를 그렇게 보고 있는데 우리는 이게 뭐냐?

문제는, 우리가 이렇게 복잡한 국제정세 속에 살고 있으니 정신을 차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힘이 없으면 그대로 멸시당하고 처참하게 당하는 것입니다.

 

강남에 가면 필리핀(출신) 식모들이 많다는데, 필리핀도 막사이사이가 집권하고 있을 때만 해도 일본 정도의 수준이었지만, 마르코스의 잘못된 정치로 인해 필리핀 사람들은 세계의 식모국 처럼 되었습니다. 이런 이미지 추락은 회복하기 어렵습니다.

우리나라도 조금만 있으면 대학을 나와도 그렇게 (식모로) 나가지 않으면 안 될지도 모릅니다.

 

힘이 없으면 금방 처참한 나라가 됩니다.

우선 우리는 국방력강화를 해야 합니다. 우선 자주국방을 해야 합니다. (자주국방을) 무엇으로 하느냐, 돈으로 합니다.

자주 국가는 자주국방, 경제 활성으로 가능합니다.

대기업 같은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경제활동이 제 자리를 찾아 빨리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먼저 정치가 바로 서야 합니다. 빨리 정치를 개혁해야 합니다.

한반도는 일본과 중국 사이에 끼어 있습니다. 그들에게 깔보이면 안됩니다.

 

내 자식을 서울 대학에 보낼 것만 걱정하고 있지요?

세계정세 속에서 하루 속히 제 궤도에 올라가느냐, 인접국이 우리를 깔보지 못하게, (우리의 국력이 그들과 같아질 수는 없지만) 그들 나라들이 우리나라를 필요로 하게 되는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나라가 건재함으로써 동아시아의 평화질서가 보장되고 우리나라로 인해서 모든 것이 소통되며 (국제)평화 협력에 실효성 있는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 중에 가장 높은 도덕성을 가져야 하고, 돈을 벌어야 하고, 국방력을 키워야 됩니다.

 

영상 : 도올 김용옥 - 우리는 누구인가 제13 '사상의학과 봄' 3 of 4

 

 

그러기 위해서는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정치적 혼란이 빨리 종결되어서 빨리 부패가 청산되고, 썩은 시대가 지나가고, 우리나라가 빨리 경제 및 국방문제에 매진할 수 있는 나라가 될 수 있기를 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최근 총선에 관한 여러 가지 논의가 있습니다만, 나 도올은 선거관리위원회에서 표창 받을 수 있는 이야기만 하겠습니다. 어김없이 츠르게 될 오는 4.15 총선은 세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1. 보스(Boss)없는 선거

우리나라 최초로 보스(Boss) 없는 정당이 보스 없이 선거하여 보스 없는 정치를 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 모든 선거는 보스체제하에 이루어졌는데 이번에는 철저하게 보스가 없습니다. 과거엔 전두환, YS, DJ 등의 보스가 있었지만, 이번에는 누구도 정치판을 지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최초의 보스 없는 선거를 하게 됩니다.

 

2. 금권 없는 선거

이번 선거는 금권과 결탁되지 않는 최초의 선거가 될 것입니다.

그 동안 우리나라의 선거가 얼마나 금권에 썩은 선거였던가를 알 것입니다. 공정선거는 한번도 없었습니다. (이번 선거는) 금권이 최소화 되는 최초의 선거입니다.

 

3. 국민적 관심이 높은 선거

이번 선거는 국민적 관심이 높은 선거가 될 것입니다.

가장 (국민 의식이) 깨어난 선거가 될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가 투표를 하는, ‘투표율이 가장 높은 선거가 될 것이다.

 

 

이번 선거는 우리 역사에 획기적인 진보를 이룩할 선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역사가 하루 빨리 제자리를 찾아서 진정한 민생 안정을 이룩하고 부국강병으로 달려갈 수 있는 새날이 올 것으로 확신합니다.

 

영상 : 도올 김용옥 - 우리는 누구인가 제13 '사상의학과 봄' 4 of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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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헌적이고 위법적인 역사교과서 국정화"

'초중등교육법' 일부 개정에 야당공조 법률안 발의

정의당은 '역사교과서 국정화 폐지법안' 발의 예정

 

 

 

반 역사(反 歷史)적인 역사교육

 

역사교육을 특정 정권과 집단의 관점에 맞추기 위하여 사실관계를 편집하는 것은 반 역사적인 '역사 쿠데타적 발상'이다.

'교학사교과서'로 드러난 뉴라이트 계열 역사교과서가 일제의 수탈을 '수출'로 표기하는 등 일제와 친일 매국행위를 미화하고 친일반민족행위자들에 의해 자행된 민족주의자 및 양민학살에 대한 내용을 누락하는 등 축소, 왜곡하는가 하면 이승만과 박정희의 독재에 관한 내용은 삭제, 축소하는 반면에 업적을 과대포장하는 등으로 역사를 편집하는 것은 결코 역사적이지 않으며 이런 반역사적이고 정권안보적인 창작물을 역사교과서로 채택하는 것은 아이들에게 거짓을 가르치고 세뇌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일이다.

 

광범위하고 포괄적인 역사학계의 의견을 수집, 반영하지 않고 오히려 대다수 역사학자들과 교사, 그리고 국민이 반대하고 있는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밀실'에서 비밀리에 추진 중인 박근혜 정부의 역사국정교과서 집필 및 추진 과정은 반 역사적, 반 시대적, 위법적 행정행위라는 비난에 직면해 있다.

특히 집필진에 '뉴라이트계열' 인물들이 다수 포함되었다는 의혹에 대해 일체의 해명이나 집필진 공개를 외면하고 있는 것은 박근혜 정권의 역사교과서 국정화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를 드러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더 이상 방치한다면 심각한 역사적 직무유기다.

 

정부와 새누리당은 '여소야대'의 민심에 승복하고 비정상적인 행정과 정치행위를 중단해야 한다. 만일 이를 거스른다면 역사와 민주주의를 훼손하는 역사반역, 체제반역과 다를 바가 무엇이겠는가.

여소야대의 20대 국회 개원과 함께 야당 3당 공조로 역사교과서국정화 폐지를 위한 법안을 발의했다는 점에 안도하며, 새누리당은 이에 겸허히 따를 것을 충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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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교과서 국정화 "이거 속으시면 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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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향신문 교과서 국정화 금지법안 발의…야3당 '입법 공조' 착착

뉴스1 "역사교과서 국정화 반대 교사 행정처분 즉각 취소하라"

한겨레신문 "교과서 국정화는 재집권 포기 선언"

팩트TV 집필진도, 편찬기준도 모든 것이 '비밀'인 '졸속' 국정교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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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조 당할 것인가, 바로 잡을 것인가

'역사는 현실이고 현실정치다'

 

영상 : 친일 수구세력들의 '역사쿠데타'와 시민역사관

 

3.1운동 절대 거족적으로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친일파들은 다 빠졌어요. 이완용, 박영효, 송병준 이런 사람들, 그리고 매판자본가, 예속지주들, 만세 하나도 안불렀어요.

 

남작 한 사람에 장석주라고 있었습니다.

장석주가 "만세를 무력으로 진압해야 된다." 하는 얘기를 한게 있는데, 군대를 끌어 내가지고, 탄압을 해 가지고 잡아 죽여 버려야 된다, 이 얘기예요.

현영섭이고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내선일체라는걸 완전히 하기 위해서는 조선 말을 완전히 없애 버려야 된다. 조선의 민족주의자는 인류의 평화를 교란하는 페스트이다."

이게 친일파들이예요.

 

 

친일파들이 하는 얘기가 그렇습니다.

"다 같은 한국 사람인데 친일하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느냐, 총독부에서 하도 하라고 하니까 못 이겨서 했다."

이건 멀건 거짓말들이예요.

탄압을 하기 전에 자진해서 했고, 하나를 하라고 했는데 둘을 했어요.

근데, 8월 15일이 되선 정신을 차렸어야 되는거 아니냐 말이예요.

왜정 때 친일하고 온갖 짓을 다 하던 사람이 독립운동자로 떡, 둔갑을 해버린다, 이건 도저히 이건 이해를 할래야 할 수가 없고 용서를 할래야 할 수가 없는 겁니다.

해방되고 나서 40년 동안 여러 가지 점에서 친일 세력들이 득세하는 바람에 민족의 가치관을 흐려 뜨려 놓고, 민족의 정기를 영 이걸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고, 우습지도 않아요.

그러나 이런 속에서도 우리가 정신을 차라고 우리가 똑바로 갈 길을 찾을 것 같으면 어딘가에 뚫고 나갈 수 있는 길이 있을 거예요..

- 故 임종국 선생 생전 담화 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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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부터 우리 학생들은 새로운 역사교과서에 의한 교육을 받게 됩니다.

그 역사교과서 집필기준에 의하면 8.15 이후 친일파청산에 대한 모든 노력을 빼라, 이승만 독재정권에 대한 비판을 빼라, 박정희 독재정권에 대한 비판도 빼라, 광주 5.18민주화 항쟁에 대한 기술도 빼라, 이런 교과서 집필기준으로 해서, 이런 책으로 배운 학생들이 앞으로 우리나라를 짊어지고 나가야 됩니다. 그 학생들이 어떻게 변하겠습니까?

 

학교에서는 교과서로 배우고 집에서는 방송에서 익히고 거리에 나서면 각종 동상과 전시회, 기념관을 통해서 또 왜곡된 역사를 배우는 이런 비참한 현실이 우리 앞에 다가 오고 있습니다.

(이미 진행 중인 온 현실입니다. – 편집자 주 -)

 

친일에 뿌리를 둔 수구세력이 역사적 정통성을 완전히, 통째로 가져가겠다는 것입니다.

 

역사는 과거가 아닙니다.

역사는 현실 정치입니다.

시민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역사, 여러분들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역사, 그것을 위해서 우리는 시민의 역사관을 만들고자 합니다.

수구세력들이 수백억원 씩을 들여 거짓 역사관을 짓는다면, 우리 연구소는 작지만 옹골찬, 시민을 위한 역사관을 만들고자 합니다.

 

민족의 역사,

시민의 역사,

정의와 진리의 역사를 반드시 지켜 나가겠습니다.

시민 여러분! 많은 지지와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임헌영 –

 

 

Posted by 망중한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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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이냐 臣이냐'

오늘날 우리사회는 대의(大義)를 생각하지 않고 목전의 소리(小利)만을 추구하고 있다.

 

- 서두에 -

이번 강의로 나 '도올'도 많이 알려졌습니다. 전에는 못 알아보는 사람이 많았는데 요즘은 거의 알아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로부터 봉변을 당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드려야겠습니다. 만나는 사람들이 사인을 해 달라고. 사진을 찍자, 악수를 하자고 요구합니다. 거절했더니 욕질을 하고 갔습니다. 담배 갑에다가, 길바닥의 종이를 주워서 사인해 달라고도 합니다. 이런 것들이 나에게 혼돈을 주고 있습니다.

 

나는 정치인이나 탤런트가 아닙니다. 그들은 한 표라도 더 얻기 위해서, 또 인기를 얻기 위해서 그렇게 해야 하지만 학자는 일반인들로부터 받아 낼 것이 없습니다. 우리 사회가 도올 김용옥을 한 사람의 학자로 인정한다면 학자 대접을 해주어야 합니다.

선비는 여러분들이 관심을 갖는 과제로 책을 보고, 논문을 쓸 때가 가장 행복합니다.

선비는 정치가나 연예인들과는 근본적으로 사회적 관계가 다르게 설정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이 사회가 가고자 하는 도덕적인 양심만 지키면 되는 것입니다.

 

나는 이 사회의 인기에 영합해서 사는 사람도 아니고, 인기를 얻기 위해서 여기에 나와 있는 것도 아닙다. 사방에서 강의를 해달라고 요청했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가장 효율적으로 내 사상을 전달하기 위한 방법을 택해서 여기에 나온 것뿐이지, 인기를 얻기 위해서 나온 것도 아니고, 권력을 탐해서 나온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이 오해하면 내일이라도 당장 그만 둘 수 있는 사람입니다.

 

존천리거인욕 (存天理去人慾)

'천리를 보존하고 인욕을 버린다'는 <주자학>의 제1명제를 좋아한다.

 

또 <중용>에 이런 말이 있다.

 

군자계신호기소부도 (君子戒愼乎其所不賭) 막견호은 (莫見乎隱) 고군자신기독야 (故君子愼其獨也)

군자는 그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경계하고 삼가고, 그 들리지 않는 곳에서도 매우 두려워하는 것이다. 숨어 있는 것이라도 보이지 않는 것이 없으며, 작은 것이라도 나타나지 않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군자는 그 홀로 있을 때에 삼가는 것이다.

 

군자는 홀로 있을 때 반성하고 행복할 줄 알아야 한다.

 

대통령을 탄핵하고, 이것이 뭔가 말이다. 노무현 개인은 흔들 수 있어도 국민을 대의한다는 사람들이 그 자리 자체를 흔들어서는 안 된다. 나라 꼴이 어떻게 될지 걱정이다. 우리 사회가 반성해야 한다. 학교 나올 것 다 나오고 지도자라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 국민들 앞에 나와서 "죄송하다. 무언가 잘못된 것을 다같이 빨리빨리 털고 화합해서, 새로운 나라를 만드는데 합심해서 나가겠다."고 해도 시원치 않을 판에!

 

우리 사회가 반성을 해야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이 땅에 태어난 지식인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송대(宋代)의 주자나 고려 말엽의 삼봉, 조선중엽의 퇴계(退溪 이황 李滉의 호) 등 우리나라의 오늘이 있게 한 모든 학자들이 했던 것과 같이 결국은, "인간 본연의 심성으로 돌아가자"라는 호소 밖에 할 것이 없다.

 

앞으로 동학을 강의하게 되는데, 동학 때 많은 사람이 고통 받고 피살되고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는 처절한 살육전이 벌어져 처참하게 죽어 갔던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20세기를 맞이했으며, 그 피의 대가도 없이 일제 식민지로 들어갔던 것이다.

 

※ 우금치 전투

1894년 11월 초, 일본군의 신식장비 앞에 10만 동학 대군 중 5000명만 살아남았다는 처절한 격전. 이 전투를 고비로 갑오동학 혁명은 실질적으로 종료되었다.

 

지난 (16대) 대선의 결과를 보자.

내가 생각하기에는, 구한말 때는 선거라는 민의가 표출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없었다. 지금도 (선거 같은) 민의 표출의 제도적 장치가 없었다면 동학의 몇 천 배가 되는 폭동이 일어날 지경이었다. 그 냉엄한 현실을, 역사의 수레바퀴를, 되돌릴 수는 없다.

 

어떠한 경우에도, 이것은 노무현의 문제가 아니고 어떤 거대한 당과 아무 관계도 없다. 우리 민중들은 역사의 수레바퀴가 뒤로 돌아가기를 원하지 않는다. 무언가 더 깨끗하고, 더 합리적이고 더 정직한 사회로, 모든 사람들이 다 같이 협력해서 살 수 있는 사회로 가기를 원하고 있다.

 

영상 : 도올 김용옥 - 우리는 누구인가 제11강 '王이냐臣이냐'

 

정도전은 일종의 신권(臣權)정치, 즉 유교이념으로 무장된 엘리트 신하집단이 통치의 주체세력이 되는 정치형태를 지향했다. 고려 말의 사회가 워낙 썩었기 때문에 뜻 있는 사람들, 신진 유림이 생겼다.

고려 말은 정도전, 정몽주, 권근 등 탁월한 대석학들이 많은 사회였다. 격동기에는 인물들이 많이 태어난다.

정도전은 당시의 지식인들을 대변하는 한 사람으로서, 모든 지식인들이 공통적으로 원하는 '신하들의 합리적인 상식'에 의해서 국가가 운영되기를 바랐다.

 

왕 한 사람이 모든 걸 지배하는 사회에는 항상 문제가 노출되었다.

 

정도전 같은 탁월한 신하가 리더십을 가지고 있을 때에는 신권정치가 가능했을 것이나, 그의 구상은 너무 과격했다. 왕권을 극도로 제한했다.

중앙집권적 절대왕정(Absolute Monarchy)의 화신인 이방원의 입장에서 보면 "혁명은 누가 했는데 왕권을 무시하고 신권을 달라고 하느냐?"였던 것이다.

이방원은 간단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왕권의 집중을 강조했다. 그 정도가 좀 지나쳤다. 그는 왕권을 제약할 수 있는 요소들은 모조리 죽였다. 이방원이 만큼 (사람을) 많이 죽인 사람은 없다. 자기 형제, 처남 4명도 죽였다. 자기의 사돈 심은은 세종 즉위 초 영의정이었으나 권세를 부리자 가차 없이 사사되었다. 그러나 이방원의 피의 숙청과 왕권의 강화 속에서만 성군 세종이 등장할 수 있었다. 이방원의 가차 없는 숙청 때문에 세종은 성군정치를 펼 수 있었고, 세종 등극 이후는 군말이 없었다. 성균관 학자들도 꼼짝 못하고 순종했다.

 

위대한 성군은 항상 뒤끝이 나쁘다. 세종, 세조 때의 명신들은 대부분 정도전을 신봉한 권근(權近) 밑에서 배출되었다. 따라서 이들 대의 정치는 기본적으로 정도전의 틀대로 갔던 것이다.

 

조선조의 2대성군은 세종과 정조다.

정조는 대학자였으며 세종을 능가할 정도였다. 또 정치가였다. 세종 이후에 정치가 문란 해졌고, 정조 후에도 정치가 문란 해졌다. 완벽한 왕은 자기만으로 끝난다. 고도의 학식을 소유한 성군이었지만 신권에 다시 눌려 당대의 영화스러운 모습을 계승시키는 데는 실패했다. 만개한 후 스러지는 꽃과 같았다.

 

조선왕조의 역사는 신권과 왕권의 시소(See-Saw)게임

 

문종(세종의 맏아들)은 세종 때 한글창제에 주도자가 되었다. 대학자였다. 세종의 아들 중에 가장 문장이 뛰어났었다. 문종은 등극 전에 공부만 했다. 결과로 문약해서 등극한 후 2년 3개월 만에 3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단종이 계승했으나 정치권력은 김종서, 황보인에게 집중되고 또 다시 신권이 강화되었다.

 

조선왕조를 단순한 왕권의 역사로 보는 오류를 범해서는 아니 된다. 정도전이 왕권을 제약한 이래로 왕은 함부로 권력을 휘두를 수 없는 제도 속에 묶여 있었다.

세조는 왕권의 강화를 위해서 단종을 빙자해서 공신, 신하들을 모조리 쫓아낸다. 세조(수양대군)의 아들은 병약했다.

예종은 등극한 후 1년 2개월 만에 죽는다. 사람들은 세조가 단종을 죽인 업보라고 생각했다.

 

성종은 세조의 손자였다. 성종은 대단한 인물이었다. 성종주변에는 그를 압박하는 권신(Clown)들이 비교적 적었다. 그래서 새로운 사림들이 많이 정치에 진출할 수 있었다.

조선왕조의 문물은 세종 때 시작이 되어 반석을 다졌고, 그 반석위에 집을 지은 임금은 성종이었다. 성종의 치세기간(1469-1494, 25년간 즉위)에 조선왕조의 문물제도가 완성되었다. <경국대전> <동국여지승람> <동국통감> <삼국사적요> <동문선> <오례의> <악학궤범> 등이 모두 성종 때 편찬되었다.

 

성종은 공부를 좋아하고 배우기를 좋아했기 때문에 선비들을 끌어 모았으며 이 때 영남의 골수 성리학자들이 대거 진출했다. 이때 사림(士林)이라는 것이 형성된다. 영남사림의 거두 김종직(金宗直:1431~1492) 등 문신을 가까이 하면서 권신들을 견제했다. 다시 성종대왕의 신권이 강화되었다. 임사홍, 유자광을 유배시키고 신진세력들의 진로를 열어주었다. 성종은 끼가 있는 왕이었다. 말년에 가면 밤에 미복으로 궁궐 바깥으로 나가 로맨스도 벌렸다. 여기에서 성종비, 윤씨의 질투가 생겨 왕의 얼굴에 흠집을 내고 해서 폐비가 되었다. 그녀의 아들이 연산군이다.

 

조선 초기에 사림(士林)이라는 말과 훈구파(勳舊派)라는 말이 나오는데, 훈구파란 세조의 찬위를 도와 정치적 실권을 장악한 공신 집단, 훈국공신(勳國功臣)을 말한다. 이들은 정도전 계열이다. 이들에 대항하는 세력이 성리학을 중심으로 한 사림(士林)이다. 혁명가 정도전의 개혁세력도 권력을 잡으면 기득권자가 되고 훈구세력이 되었다. 이들 기득권자는 보수 세력으로 전락했다. 개혁세력도 기득권자가 되면 보수 세력으로 전락한다.

 

※ 김종직 (金宗直 1431~1492)

경상도 밀양출신의 사림파 거두. 항우(項羽)가 초나라의 의제(義帝)를 폐한 것을 단종에 비유해서. 단종을 조위하는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지었다. 이것이 발단이 되어 연산군 때 무오사화(戊午史禍)가 일어났다.

 

폐비 윤씨의 아들인 연산군은 두 개의 사화를 일으켰다. 사화란 "사림이 화를 입는다." 는 의미이다. 무오사화만 사초(史草)가 발단이었기 대문에 사화(史禍)라 고 부른다. 사화(士禍)란 공신, 외척, 인척 세력이 사림을 견제한 사건이다.

 

연산군은 영민하고 예술적 기질이 있고 학식도 있었다. 초기에 정치를 잘했는데, 사림에서 간섭이 계속 심해지자 그들을 숙청하게 되었고, 연산군 때 일어난 양대 사화가 무오사화(戊午史禍)와 갑자사화(甲子士禍)이다. 갑자사화 때에는 연산군이 그의 어머니 폐비 윤씨의 사건을 알게 되면서 그와 관련된 사람을 모조리 죽인다. 이때 김종직의 제자이며 조광조의 선생인 김굉필도 사형 당한다.

 

사림을 쫓아내던 훈구파들이 연산군을 폭군으로 몰아 쫓아내고 중종이 등장한다. 바로 지금 드라마 '대장금'에 나오는 중종이다. 드라마 속의 중종과 장금의 관계는 물론 픽션이다. 그러나 중종이 57세로 세상을 떠나기 직전, 내의원들이 약제를 상의하고 있는데 "내 증세는 여의 장금이 안다"라고 전교하는 결정적인 한 줄의 글이 <중종실록>에 실려 있다.

 

중종은 훈구파들에 의해 괴롭힘을 당하자 갑자사화 때의 피해자들인 사림을 다시 끌어들이게 되는데, 그 중 대표적인 사람이 조광조(趙光祖)다.

 

※ 조광조 (趙光祖 1482~1519)

김굉필의 유배지에서 2년간 성리학을 공부하고 젊은 나이에 사림파 영수가 되어 발탁된다. 34세에 등용되어 대사헌에 올랐다가 기묘사화로 38세에 죽는다.

 

조광조는 김굉필로부터 엄격한 성리학을 배웠다. 그는 항시 의관을 정제하고 먹는 것도 단정하게 먹고, 성격이 칼 같은 사람이었다. 도덕적으로 완벽하게 산다는 사람이었다. 그는 당시의 조선조를 요순상태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도덕적인 열정에 불타고 있었다. 이것을 흥지치(興至治 지극히 이상적인 나라를 일으킨다)라 불렀다.

 

(조광조에 대한) 퇴계와 율곡의 평가가 재미있다.

퇴계는 조광조를 극히 존중하는 반면, 율곡은 공부가 덜된 상태여서 융통성은 없고 이상만 높고, 현실에 어두운 자로 평가했다. 조광조는 급진적이고 엄격했다. 위훈자(僞勳者) 72명을 적발해서 공신록에서 삭제하고 궁궐 내에 설치되어 있었던 소격서(昭格署)를 철폐하게 했다. 유교적인 합리주의 국가에서 미신을 믿어서 되겠는가? 밤낮으로 왕에게 읍소해서 철폐시켰다고 한다.

 

※ 소격서 (昭格署)

고려 때 부터 설치된 궁정 내 도교의 제식을 거행하는 관서. 우물에 비친 북두칠성을 보고 점을 치기도 한다. 1518년 조광조에 의해 철폐되었다.

 

위훈삭제(僞勳削除), 중종반정을 도모한 공신들의 과장된 공훈을 없애버려야 한다고 주청해서 76명이 공훈록에서 삭제되었다.

 

조광조를 역사적으로 비판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러나 조광조의 급진적이고 엄격한 국정은 문제가 생기고 반발이 심했다. 그는 조선왕조에 도덕군자의 새로운 기풍을 불어넣어준 사람이긴 했으나 중종은 그를 내치고 말았다. 조광조는 능주로 귀양을 갔다가 곧 이어 사사되었다.

 

조광조의 절명시 (絶命詩)

애군여애부(愛君如愛父) 우국약우가(憂國若憂家)

임금을 내 어버이처럼 사랑했고 나라를 내 집처럼 걱정했다

 

조광조는 조선왕조에 칼날 같은 도덕군자의 기풍을 세웠고, 죽어서도 신진사림의 상징이 되었다. 조광조가 투옥되었을 때 유생 일천여명이 광화문에 모여 무죄를 호소했다.

 

중종 이후 조선왕조의 역대 사림들, 지식인들은 스스로가 조광조의 후예라는 것을 자처하고 있다.

조광조의 순수한 도덕군자의 이상을 추구하면서 커 나온 대표적 인물이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이다. 그는 연산군 때부터 선조 때까지의 조선중기 대학자였으며, 조선왕조가 유교국가로서의 가닥이 잡히게 했다.

 

이퇴계는 대단한 사람이다. 그는 주자 이후 동아시아 최고의 성리학자로서 평가받고 있다. 이퇴계의 시대에 들어 와서 우리나라의 유교가 제자리를 잡아갔다. 즉, 정도전으로부터 시작된 조선의 유학은 이퇴계에 이르러 조선 사람들의 내면적인 삶의 철학이 되었다. 나(도올)의 학문적 성향이 기론(氣論) 쪽이었기 때문에 젊었을 때는 이퇴계를 싫어했었는데 공부를 해갈수록 그에게 매력을 느꼈다. 그의 학문적 태도에는 존경스러운 면이 많다.

 

1558년 10월, 58세 노인이었던 퇴계가 지금의 국립대 총장 격인 성균관 대사성으로 재직하고 있을 때, 새로 급제한 고봉(高峰) 기대승(奇大升)이 찾아왔다. 당년 32세의 청장년이었던 기대승을 만난 58세의 퇴계는 그의 학문에 충격을 받고 그에게서 배웠다. 이퇴계는 마음이 열린 학자였다. 평생 손아래 사람에게 배우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 기대승 (奇大升 1527~1572)

퇴계시대의 대학자. 본관은 행주. 1558년 문과에 급제한 후 성균관 대사성까지 오른다.

 

기씨(奇氏)는 희성이나 기대승과 같은 행주 기씨성을 가진 여자가, 궁녀로 원나라에 가서 마지막 황제 순제의 황후가 되어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이것을 계기로 고려에서도 기씨가 세력 기반을 얻었다.

 

이퇴계와 기대승의 대면

 

기대승

사단발어리 (四端發於理) 칠정발어기 (七情發於氣)

사단은 리(理)에서 나오고, 칠정은 기(氣)에서 나온다

 

이퇴계

사단리지발 (四端理之發) 칠정기지발(七情氣之發)

사단은 리의 발현이고 칠정은 기의 발현이다.

 

리기(理氣)는 인간의 마음에서 발현되는 두 개의 주체가 된다.

 

기(氣)→발(發)→칠정(七情), 리(理)→발(發)→사단(四端)

주자학에서는 리(理)는 순선(純善)한 것이기 때문에 이상적 이념일 뿐 구체적 작위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리발(理發)은 주자학에서도 이단적인 생각이다. <주자어류>에도 리발(理發)이라는 말은 있으나 퇴계의 주장과는 어감이 다르다.

 

기대승 (반문)

맹자왈(孟子曰) 惻隱之心(측은지심) 仁之端也(인지단야)

 

단(端)=측은지심(惻隱之心)=정(情)≠성(性)

단(端)은 측은지심(惻隱之心)이고 정(情)이기는 하나 성(性)은 아니다. 인의 단초로 보인다.

 

사단 (四端)

측은지심(惻隱之心)=인(仁), 수오지심(羞惡之心)=의(義)

사양지심(辭讓之心)=예(禮), 시비지심(是非之心)=지(智)

단(端 tip)이란 본체가 들어난 하나의 단서이다. 단(端)은 성(性)이 아니라 심(心)이다.

 

기대승

비칠정지외복유사단야 (非七情之外復有四端也)

칠정의 바깥에 다시 사단이 있는 것이 아니고

사단(四端) 내칠정중발이중발이중절자지묘맥야(乃七情中發而中發而中節者之苗脈也)

사단은 희노애락(喜怒哀樂)의 감정이 발현되어서 제대로 상황에 딱 들어맞아서 도덕적으로 보일 때 우리는 그것을 사단이라 한다. 사단과 칠정은 나누어질 수 없다.

 

사단(四端)은 사덕(四德=인의예지仁義禮智)이 아니다. 기대승의 학문이 정확하다고 본다.

 

이퇴계

부사단정야(夫四端情也) 칠정역정야(七情亦情也) 균시정야(均是情也)

무릇 사단은 정이고 칠정도 정이고, 둘 다 같은 정이다.

 

정에는 사단과 칠정이 있는데 그 소종래(所從來), 즉 감정의 근원을 캐 들어가 보면 사단(四端)은 본연지성, 리(理)이고 칠정(七情)은 기질지성, 기(氣)이다.

 

사단(四端)이건 칠정(七情)이건 똑같이 이기(理氣)가 될 수 없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사단과 칠정을 똑같다고 인정해버리면 사단이라는 인간의 도덕 원리가 칠정에 의해 제멋대로 움직이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인간의 도덕성에 대해서 자의적인 해석을 내리게 된다. (사단칠정론은) 인간 심성의 도덕적인 아름다움을 종교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퇴계는 정치에 뜻을 두지 않았음에도 조정의 부름을 많이 받았다. 사림과 왕정 간에는 갈등이 있기 마련인데 출사하지 않으려는 사림을 출사시킬 때 왕정의 정통성이 인정되기 때문이다.

 

※ 소수서원 (紹修書院)

퇴계가 제자들을 가르친 곳. 퇴계가 풍기 군수로 있을 때 명종으로부터 편액(扁額)을 받음. 이 서원은 하버드대학 보다 93년 앞서는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대학이다.

 

퇴계 다음에는 율곡이 등장한다. 이율곡의 철학은 퇴계와는 계통이 다르다. 율곡은 고봉(高峯 기대승의 호)의 논리를 계승했다.

율곡은 이발(理發)을 인정치 않았다. 율곡사상은 기발(氣發)만을 인정했다. 퇴계 사상은 순수한 인간의 도덕의지를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퇴계의 사상은 관념화되기 쉽다. 이발은 이상주의적 인간관이고, 기발은 현실주의적 인간관이다.

 

기발적인 인간은 잘못도 저지르게 되고 감정적으로 행동하게도 되는 현실적인 인간이다. 인간의 현실적인 모습을 강조한다. 율곡과 기대승 같이 기발을 숭상하는 사람들은 현실정치에 적극참여하고 사회 개혁에도 참여한다.

이율곡은 10만양병설을 주장했다. 사회적 관심도 많았다. 현실적인 인간의 모습을 중시했다. 철학도 이발보다 기발을 강조했다. 현실적인 인간을 중시한다.

 

조선왕조의 관료 중심의 정통유학은 율곡 중심으로 간다. 율곡 밑에서 나온 사람이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다.

기호학파가 형성되고 조선사상사의 주류를 형성한다. 이퇴계는 비주류이다. 그러나 우리는 퇴계에 무게를 많이 두고 있다. 퇴계학파가 비주류라 할지라도, 그의 도덕적인 철저함과 인간의 내면을 깊숙하게 보는 주리론으로 현실주의적인 주기론자들이 점점 기울어져 왔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경향은) 조선왕조가 잘 되어가는 것이 아니라 관념화되어 간 것이다.

조선 성리학은 말로를 맞이하게 된다.

 

※ 송시열 (宋時烈 1607~1689)

호는 우암(尤庵). 조선후기 기호학파, 노론의 영수. 장희빈이 왕비로 책봉되는 기사환국 때 죽임을 당함.

 

조선 후기에 오면 이러한 주기(主氣)계열의 현실파 학풍이 체계적으로 퇴화되어 관념화되는 현상이 생긴다. 그리면서 성리학은 생명력을 잃고 현실감각을 상실해 간다. 즉 관념화되고 종교적인 도그마(Dogma)로 간다. 구한말에 와서는 현실 대처능력을 잃어버린다. 그래서 조선왕조가 멸망하게 된다. 이것이 내가 간단하게 정리한 조선 사상사의 흐름이다.

 

(그러나) 이렇게 쉽게 말하기는 어려운 주제이다. 조선사상사를 이런 시각에서 보면 된다는 것이다. 세계사상의 흐름 속에서 우리 조선 성리학의 의미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이것을 다음 시간에 여러분에게 정확하게 다시 한번 짚어드리겠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강의이다. 이런 강의는 다른 데서 절대로 들을 수 없다.

 

우리 민족은 어떻게 살아온 사람들이고 이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 사상을 매개로 해서 어떻게 뼈저리게 노력해 왔는가를 깨달아야 할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 민족에 대한 아주 본질적인 프라이드를 가져야 한다. 허튼 수작들 그만하고 무언가 정도를 향해서, 바른 길을 향해서 우리 역사가 나아가야 한다.

 

 

 

 

Posted by 망중한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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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민중항쟁을 되돌아 본다.

 

5.18민중항쟁 영상 – 5.18기념사업회 –

 

1980년 5월, 계엄군에 의한 피의 살육이 일어나기 전까지 광주는 여느 도시와 다르지 않았다.

민주화를 요구하는 평화적인 '시국성토대회(1980년 5월 14일)'가 열리고 있었지만 그나마도 5월 15일 이후에는 잠잠해있었다.

 

 

그러나 5월 17일, 전국에 비상계엄령이 확대되고 전 대학에 휴교령이 떨어졌다. 이에 대학생들은 교문 앞의 군인들과 소규모 투석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5월 18일, 광주에는 공수부대가 투입됐다.

 

작전명 '화려한 휴가'

 

광주시내는 순식간에 피로 얼룩졌다. 소총에 대검까지 장착한 유혈진압이었다.

군인들의 무자비한 진압에 시민들은 분노했다. 이틑날, 학생시위는 민중항쟁으로 변해갔다. 제 나라 군대에 의한 이 같은 유혈진압은 대체 어떻게 해서 빚어지게 된 것일까?

 

1979년 10월 26일

18년 만에 박정희 독재권력은 몇 발의 총소리와 함께 끝이 났다. 그러나 유신권력의 붕괴는 예고되어 있었다.

4.19민주혁명을 쿠데타로 밟고 일어섰던 박정희, 그는 민중들의 자유와 인권을 희생시키더니 마침내는 자신의 영구집권을 보장할 유신헌법을 휘둘러 민중들의 높은 불만을 사고 있었다.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과 노태우 등 '하나회' 소속의 정치군인들은 박정희의 죽음을 이용했다.

국내 정보를 폭널게 파악하고 있던 그들은 공백상태에 빠진 권력을 찬탈하기 위해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그들은 계엄사령관 등 당시의 육군 수뇌부를 체포하고 무력으로 육군본부와 국방부를 점령했다. 12.12라 불리우는 이 같은 쿠데타를 통해 그들은 권력의 핵심으로 떠올랐다.

 

당시, 유신독재에 억눌렸던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은 봇물처럼 터져 나오고 있었다.

민주인사들이 석방되고 김대중과 김영삼, 김종필 '3김씨'도 선거에 나설 준비를 하고 있었다. 신군부가 권력 장악을 준비해 가던 시기에 맞은 이른바 '서울의 봄'이었다.

대학생들도 민주주의를 외치며 거리로 나섰다. 그들은 계엄령해제 등을 요구했고 노동자들도 노동조건 개선과 임금인상을 위해 싸웠다.

 

1980년 5월15일

학생들의 시위는 서울역 앞의 대규모 가두시위로 번졌다. 그러나 학생들은 스스로 시위를 접고 돌아섰다. 신군부에게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학생시위 마저 잠잠하던 5월 17일, 신군부는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했다.

권력 장악을 위한 기회를 노리고 있던 그들은 민주화 열기를 사회혼란으로 몰아 부쳤고 때마침 민주화 열기를 꺾을 본보기로 선택된 것이 바로 광주였다.

 

5월 20일

광주항쟁이 사흘째 되던 날 시위는 조직적으로 변해갔다. 택시 200여 대가 시위를 시작하자 버스와 트럭까지 합세하면서 시위대는 20만 명으로 불어났다.

21일에는 너른 금남로가 30만 명의 시민들로 메워졌다.

 

계엄군은 광주시를 외곽으로부터 조여왔다. 광주의 저항이 전국으로 퍼져 나갈 것을 우려한 것이다.

그리고 오후 1시, 그들은 일제히 사격을 가했다.

 

"대한민국 군인은 우리의 이웃이고 내 형이고 내 아들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시민을 학살하러 나타나니까 처음에는 두려웠지만 이제 분노가 더욱 증폭된거죠. 어떻게 대한민국 군대가 이렇게 대한민국 국민을 무차별 죽일 수 있느냐? 상상도 못했죠." – 당시 시민군 상황실장 –

 

 

죽어 간 사람들은 그 날 아침에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집을 나섰던 시민들이었다. 그 때 얼마나 많은 시민이 우리 군대가 쏜 총에 맞아서 죽어 갔는지에 대해서는 아직껏 국민들이 납득할 만한 발표가 없다.

 

수 많은 죽음을 지켜 본 시민들은 총을 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화순이나 영암, 나주 등지에서 무기고를 털어 무장했다. 며칠 전까지도 생업에 여념이 없던 시민들이 자기 나라의 군대에 맞서 총을 든 것이다.

당시 언론에서는 그들을 국가전복을 위해 내란을 일으킨 불순세력, 폭도들이라고 했다. 그러나 시민들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총을 들었고, 광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내 걸었다.

 

"대낮에 무장하지 않은 사람들이 행진하려고 하는데 거기에 그대로 발포를 해버린 상황에서 내가 죽지 않으려면 내가 총을 가지고 있어야 될 거 아니어요. 왜냐면 자기가 죽을 것을 생각하니까, 생존의 본능입니다. 총을 든 것은.." – 김상집 당시 시민군 참가자 –

 

시민들이 총을 들자 계엄군은 시내에서 철수했다. 광주는 해방된 도시가 됐다. 광주엔 모처럼 평화가 찾아 온 듯 했다.

그러나 광주의 교통과 통신은 모두 끊겼다. 계엄군은 광주를 완전히 포위해 고립시켰다. 광주 밖에서는 아무도 광주의 실상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고립된 광주의 시민들은 서로 도우며 버텨갔다. 생필품 사재기나 폭리가 없었고 식량도 함께 나누어 먹었다. 시민군은 치안과 질서를 유지하면서 시민 자치의 힘을 발휘했다.

 

"광주 시내 금은방이 하나 털렸다던가, 또는 어디 상점이 약탈을 당했다던가, 수많은 은행 지점들이 있습니다마는 그런 지점의 금고가 하나 털렸다던가 하는 이런 사건 자체가 하나도 없습니다." – 박남선 당시 시민군 상황실장 –

 

"누가 먼저 이렇게 사과를 줬는지 음료수를 줬는지 그때 당시에는 주로 밥보다는 그런거였거든요. 시민들이 많은 양의 김치나 또 생김치를 담궈서 날라주고요, 내일 먹을 것이 부족할 것 같다 싶으면 그 아줌마들이 리어카에다 이렇게 많은 양의 김밥이라던가 이런 것을 말아가지고 '양1동 아줌마들', '양2동 아줌마 일동' 한다던가 길거리에다 가마솥을 이렇게 걸어 놓고 거기서 불을 즉석에서 때면서 우리 시민군들한테 밥을 해서 먹이고.." - 정향자 당시 도청 취사담당 -

 

5월 22일

시민군과 광주의 주요인사로 구성된 '시민학생수습위원회'가 결성됐다. 그들은 연행자 석방 등을 요구하며 계엄군과 협상을 벌였다. 그러나 계엄군은 이를 거부하고 무조건 무기를 반납하라고 강요했다.

수습위원회는 '끝까지 광주를 지키자는 쪽'과 '무기를 반납하고 협상을 계속하자는 쪽'으로 나뉘었다. 아무런 대책도 없이 수습위원들은 무기를 반납하자고 결정했다.

 

무장한지 하루 만인 22일, 시민군은 해체되어 갔다. 그들 가운데는 끝까지 싸우자는 시민들도 있었다. 그들은 광주를 지키기 위해 전남도청 안으로 들어 갔다.

 

26일 아침

계엄군이 도천진압작전을 시작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당시 도청 안에는 천여 명의 시민이 남았었다. 할머니나 초등학생도 있었지만 그날 밤 그들은 집으로 돌려 보내졌다.

그 날 자정 무렵, 도청 안에는 수류탄과 소총으로 완전무장한 특공조가 투입됐다. 도청을 지키던 시민군들은 27일 새벽 다섯시까지 계엄군과 맞서 싸웠다. 권력을 장악하려는 군부에 대한 광주 시민들의 최후의 저항이었다.

 

"그들은 전혀 죽을 이유가 없었다. 군은 무력으로 광주시를 점령할 필요가 없었다. 광주 사람들은 평화로운 해결을 원했다. 애당초 광주에서 항쟁이 일어난 이유는 5월 18일부터 시작된 군의 만행 때문이었다." - 노먼 쏘프 당시 아시안월스트리트저널 기자 -

 

"민간인 피해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폭도들은 생포 207명, 사만 두명입니다.이상은 전남북계엄본부에서 알리는 말씀이었습니다'' – 당시 방송 보도 -

 

27일의 도청 진압작전으로 광주시민들의 저항은 일단락됐다.

그러나 그 뒤에도 계엄군의 폭력은 끝나지 않았다. 그들은 광주 전역에서 시민들을 무자비하게 연행해 갔다. 부녀자들은 물론, 초등학생까지 폭도로 몰렸다.

 

5.18민중항쟁은 실패한 역사인가?

 

5.18은 부도덕한 전두환과 노태우 정권의 가장 치명적인 오점이 됐다. 5.18을 경험한 국민들의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은 결코 식지 않았다.

 

그 해 8월, '광주사태내란음모죄'를 뒤집어 쓰고 김대중이 사형을 선고 받았다.

전두환은 마침내 '체육관 선거'를 통해 대한민국의 대통령에 취임했다.

 

5.18민중항쟁을 피로 딛고 일어 선 살인독재정권.

 

전두환은 유신독재 못지 않은 절대권력을 휘두르며 민주화운동을 탄압했고, 임기 내내 의문의 죽음들이 꼬리를 물었다.

그러나 5.18의 진실은 아직 다 밝혀진 것이 아니다. 88년에 광주청문회가 열렸지만 신군부는 발포명령 등에 대해 입을 다물었다.

 

"제가 알고 있기에는.." - 주영복 당시 국방부 장관 -

 

"발포 명령에 증인께서 관여했다고 줄기차게 공격을 하고 있습니다. 이 자리에서.." - 김길홍 청문회 당시 민정당 전국구 의원 –

"저는 절대 관여를 안했습니다." - 정호용 5.18 당시 특전사령관 -

 

아직 정확한 사망자 수나 실종자 수도 밝혀지지 않았다. 당시 계엄군이 급하게 파묻은 신원을 알 수 없는 유골들은 90년대에 이르러서도 곳곳에서 발굴됐다.

당시 미국이 전두환을 위해 어떤 역할을 했는지도 규명돼야 한다.

 

"당시 미국 정부가 본 3김씨와 전두환 씨에 대한 평가, 그리고 끝내 군부의 손을 들어 준..' - 엄기영 MBC뉴스데스크 앵커 1996년 3월 22일 보도 -

 

한국군의 부대 이동을 위해서는 미국의 승인이 필요하다.

미국은 당시 친미적인 인물로 전두환을 꼽고 있었고, 5.18 당시에는 항공모함을 보내 신군부를 도왔다.

현재까지 밝혀진 것은 미국이 군대 이동을 승인해 광주학살을 가능하게 했다는 사실이다.

 

"미국은 평화적인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서 자신들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군사력을 이용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미국은 특전사가 어떻게 훈련 받았는지 잘 알고 있고, 즉 미국은 광주나 부산에서 (공수부대가) 얼머너 폭력적으로 진압할지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특전사는 원래 자국민이 아닌 북한사람들을 죽이도록 훈련 받은 군인들이 아닌가.." - 팀 셔록 미국 저널리스트 -

 

이 땅의 민주주의를 위해 죽음 앞에서도 굴복하지 않았던 5.18 민주영령들.

그들의 뜨거웠던 항쟁은 80년대 이후 우리의 민주주의를 이끌어 온 출발점이었다.

1980년의 5월 투쟁은 이후, 해마다 5월 시위를 불러 오며 87년 '6월 대항쟁'으로 이어졌고 경국 살인정권의 두 주역, 전두환과 노태우는 역사의 심판을 받았다.

그리고 다시금 새로운 세대는 피로써 일궈낸 5.18민중항쟁을 자양분 삼아 한국민주주의의 새 날들을 열어 가고 있다.

Posted by 망중한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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心과 性

불교는 마음의 종교다.

 

불교에서는 종교적 문제가 인간의 마음에 있다고 생각한다. 마음에 대한 이론이 굉장히 발달한 종교다. 세계 어느 종교보다 마음에 대한 이론이 정교하다. 오늘은 정도전에 의한 불교의 마음 이론을 비판하려 한다. 제목이 불씨심성지변(佛氏心性之辯)으로 되어있다.

(원시불교의 핵심은 무아론(無我論)이다. 무아(Anatman)는 모든 존재론적 실체를 거부한다. 하느님<God>도 나<Ego>도 모두 심적현상<心的現象 : Psychological Phenomenon>일 뿐이다.)

 

고려말엽의 사상가요, 혁명가요, 조선왕조 창건의 주역이었던 정도전은 불씨심성지변(佛氏心性之辨)을 통해서 불교의 심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비판하였다. (불씨심성지변 : 불교의 심(心)과 선성(善性)을 분별함)

 

심자(心者) 인소득어천이지생기(人所得於天以之生氣)

성자(性者) 인소득어천이지생리(人所得於天以之生理)

심(心)이라는 것은 인간이 하늘로부터 얻어서 생한 기요, 성이라는 것은 인간이 하늘로부터 얻어서 생한 리(理)라고 했다.

 

조선 사상의 이기론(理氣論)이 여기에서부터 태동한다. 조선사상의 이기론은 우주의 근원을 리(理)에 두느냐, 기(氣)에 두느냐에 관한 조선사상사의 논쟁을 의미한다.

 

심(心)=기(氣) 심은 우리가 하늘에서 얻어 가진 기,

성(性)=리(理) 성은 우리가 하늘에서 얻어 가진 리

 

동양적인 우주관에서의 세계, 즉 천지(天地)는 기로 구성되어 있다.

예를 들면 여기의 책상, 펜, 고로쇠 물 등은 모두 기(氣)다. 기가 움직이는 법칙을 리(理)라고 한다.

(고로쇠 물 : 고로쇠나무에서 뽑은 수액인데, 봄에 이것을 마시면 생명이 약동하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다는 좋은 물이다.)

 

자연의 질서를 탐구하는 것이 과학이다.

인간세계를 둘러싼 환경의 객관적 리(理)를 자연의 법칙(Law of Nature)이라고 한다. 우리는 상식적으로 리가 기 바깥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기를 떠난 리를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 자연과학적 태도(Scientific Attitude)이다.

 

리가 기 속에 있다고 한다면 리는 기에 지배당하고 종속될 뿐이다.

성리학자들은 기에 종속되지 않는 리의 독자성을 확보하고자 했다. 그것이 인간을 명령하는 도덕적 법칙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리는 인간의 도덕적 품성과 관련되어 있다. 인간이 도덕적으로 사는 것은 기(물질)만 있는 것이 아니고 리(법칙)가 있기 때문이다.

 

성리학에서는 자연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가 연속된 것으로 이해되었다.

존재(Sein)와 당위(Sollen)가 같은 차원에서 이해되었다. 인간의 심성에 내재하는 리가 곧 인의예지(仁義禮智)였다. 性에 理가 내재한다고 생각한 이론을 우리가 성리학(性理學)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맹자의 성선(性善)은 인간의 도덕적 성품의 선천성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기보다 리를 중시한 성리학은 맹자 성선설(性善說)의 적통을 잇고 있는 것이다.

 

심(心)은 인간의 의식현상 일반(Consciousness)을 말하고, 성(性)은 마음의 도덕적 핵심(Moral Core)을 의미한다.

우리는 성선설과 성악설을 이야기하고 있다. 성(性)은 원래적으로 선(善)하다. 이것은 맹자의 성선설이고 '성은 원래적으로 악하다'라고 하면 순자의 선악설(善惡說)을 연상한다.

 

순자왈 (荀子曰) 인지성악(人之性惡) 기선자위야(其善者僞也)

순자는 '인간의 성은 좋지 않아서 선하다는 것은 거짓'이라고 했다.

 

순자는 인간을 이기적 욕망의 주체로 파악하였다.

자연 상태에서 인간은 쟁탈(爭奪), 호색(好色), 호리(好利), 음란(淫亂)에 빠질 뿐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인간이 성을 따르게 된다면 세상은 어지러워진다고 한다.

 

기선자위야(其善者僞也)

선하다고 하는 것은 인위적인 노력일 뿐이다. 인간의 성이 악하기 때문에 예의라는 것이 필요하다. 예의라는 것은 성(性)이 만들어내는 인위적인 것이다.

 

범예의자(凡禮義者) 시생어성인지위(是生於聖人之僞) 비고생어인지성야(非故生於人之性也)

무릇 예의라고 하는 것은 성인의 위선에서 나온 것이며 모든 사람의 성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순자>

 

인간이 힘써야 할 것은 적위(積僞)다.

적위란 인위적 노력을 쌓아가는 것이다. 그것이 공부(工夫)이다. 위(僞)는 거짓, 위선이 아닌 인위적(人爲的)이라는 의미의 위(僞)로 해석해야 한다.

 

위기이생예의(僞起而生禮義)

(인위적인 노력이) 일어나서 예의가 생겼다. 예의가 인간 본성 속에 있는 것은 아니다. <순자>

 

성선(性善)과 성악(性惡)은 결코 인간의 본성을 선(God)과 악(Evil)으로 규정하는 논의가 아니다.

 

 

<영상 '심과 성' 1/4>

 

노자 2장에

천하개지미위미(天下皆知美之爲美) 사오의(斯惡矣)

천하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하는 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것은 추할 수도 있는 것이다.

아름다운 미(美)⇔추할 오(惡). 오(惡)는 어디까지나 미(美)의 반대말이다. 선(善)의 반대말은 아니다.

 

개지선지위선(皆知善之爲善) 사불선의(斯不善矣)

모든 사람들이 선한 것을 선하다고 알고 있는데 그것은 불선(不善)일 수도 있다.

선의 반대어는 악(惡)이 아니고 불선(不善 :선하지 않음)이다.

 

동양인의 관념 속에서는 실체로서의 악(惡)은 근원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악은 불선(不善)일 뿐이다.

동양인들의 관념 속에 천사와 악마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서양인들에게는 천사가 있고 악마가 따로 있다. 선과 악으로 2분되어 있다. 동양에서는 선의 반대는 불선이지 악은 아니다. 중국 고전에서의 악(惡)이라는 글자는 모두 추할 오(惡)로 읽어야 한다. 악(惡)으로 읽는 것은 서양언어와 서양종교의 영향일 뿐이다.

 

성선설(性善說)의 반대말은 성악설(性惡說)이 아니고 성불선설(性不善說)이라야 한다. <순자>의 성악(性惡)은 성악이 아니라 성오(性惡)다.

순자는 성악설을 말한 적이 없다. 순자의 성오설(性惡說)은 성선(性善)을 전제하지 않으면 성립할 수 없다. <순자>의 성불선설도 성선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래야만 인간의 교화가 가능 한 것이다.

 

'순자'의 글에서

인지성악(人之性惡) 필장대예의지화(必將待禮義之化) 연후개합어선야(然後皆合於善也)

사람의 성악은 예의 교화를 거쳐 성선이 된다.

 

동양사상에는 인간의 본성이 본래적으로 '선:善'하니 '악:惡'하니 하는 논의는 없다.

인간의 심(心)에는 두 측면이 있다. 하나가 정적(情的) 측면(욕망의 세계 : Sentiments)이고 다른 하나는 성적(性的) 측면(순수한 선 : Moral Nature)이다. 근세 유학의 문제(과제)는 심통성정(心統性情), 즉 심(心)이 성(性)과 정(情)을 통괄하는 것이다.

 

심(心), 성(性), 정(情)은 셋으로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의식현상이다.

인간의식의 작위적 주체는 어디까지나 心이다.

심은 일심(一心 : 하나)인데, 동전의 양면처럼 어떤 때는 심으로 나타나고, 어떤 때는 정으로 나타난다. 정도전이 (볼 때) 불교도 심, 마음의 종교이다. 그래서 마음에는 정적인 측면이 끼여 있기 때문에 문제가 많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성(性)은 능동적 촉발성(觸發性)을 갖지 않는 비작위적(非作爲的) 순수한 도덕적 이상(Moral Ideal)일 뿐이다.

심(心) : 정(情)↔성(性), 기(氣)↔리(理), 용(用)↔체(體), 인욕(人慾)↔천리(天理)

 

고려왕조는 불교사회면서 개인주의적(Individualistic)사회였다. 조선왕조는 유교사회로써 공동체적(Communalistic)사회였다.

불교에서는 나 혼자 천국이 가능하고 해탈도 가능하고 성불도 가능하다. 불교는 철저하게 개인주의적인 종교이다. 마음을 다스려서 번뇌로부터 벗어나면 그것이 곧 해탈이요, 성불이다. 스스로 마음을 다스리고 개별적으로 행한다.

 

불교이론으로는 정치이론을 만들기 어렵다. 불교에서는 모두가 개별적으로 놀기(행하기) 때문이다. 불교사회도 잘만 돌아가면 제대로 의미가 있는 것이지만 고려 말에는 문제가 나타났다.

새로운 과거시험제도를 도입했다. 굉장히 이상적인 제도다. 과거제도란 시험을 통해서 권력을 주는 제도인데, 중국에서 나왔다. 중국문명의 유니크(Unique)한 시도였다. 법조문만 외워서 합격하면 권력을 갖게 되는 오늘날의 고시와 같이 당시의 중국에서는 '서경(書經)' 등을 외워서 합격하면 권력을 갖게 되었다.

 

인재를 등용하는 방법에는 시험(Examination)과 추천(Recommendation)이 있다. 과거제도에서는 객관적인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영상 '심과 성' 2/4>

 

사회가 잘 돌아갈 때는 추천제도도 좋겠지만 추천제도는 주관적이며 문란해지는 문제가 있었다. 반면에 시험제도는 객관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고려 때부터 중국에서 과거제도를 도입했다. 신라시대에는 화랑제도가 있었으나, 과거제도는 없었다. 과거제도에서 종이쪽지 하나로 권력을 준다는 것은 불안했다.

 

이러한 과거제도에 대해서 주자는 관료 제도를 시행함에 있어 관리들에게 권리를 주는 동시에 철저한 윤리의식을 의무지우지 않으면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주자학의 목표는 사대부 관료 계층에 철저한 도덕적 가치를 심어주기 위한 것이다. 주자철학은 기본적으로 공무원 교육철학이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정보다는 성을 더 강조했다. 인의예지(仁義禮智)가 갖추어진 인간이다. 그러기 때문에 性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감정적으로 움직이는 것은 기(氣)요, 이성적으로 움직이는 것은 리(理)다. 주기론자(主氣論者)는 감정에 대해 관용적(Liberal)인 반면 주리론자는 감정에 대해서 엄격하다. 조선왕조에서는 주리(主理)의식을 강조했다. 사대부들의 엄정한 윤리의식을 강조했다. 주자학에서는 '네가 원래 가지고 있는 리(理)가 너의 기(氣)를 지배하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불교에도 심(心)과 성(性)에 대한 논의가 많이 있었다.

불교에서도 심(心)은 본성을 말한다. 그 본성을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 즉 인간 본래의 성은 청정한 것이라고 불렀다. 인간의 마음에는 정심(淨心), 즉 깨끗한 마음과 염심(染心), 즉 더러운 마음이 있다. 그러나 결국 이 정심(淨心)과 염심(染心)은 한마음(一心)이다.

 

불교는 번뇌즉보살(煩惱卽菩薩), 즉 번뇌가 곧 보살이라고 한다. 불교는 심과 성을 이원화(二元化)시키지 않는다. 불교의 원래 이론은 좋은 것인데 잘못 해석하면 항상 도덕적 해이를 가져올 수 있다. 불교는 리적(理的)인 세계의 진여문(眞如門)과 기적(氣的)인 세계의 생멸문(生滅門)으로 이원화(二元化)시키지 않았다. 근본적으로 초윤리적(Transethical)이기 때문에 도덕적 해이를 가져올 수 있다.

 

정도전의 철학은 주자학에 기초했다.

불교에서는 심과 성을 구별하지 않았다. 심과 성이 일체화되는 것은 곤란하다. 인간의 마음에는 항상 환원될 수 없는 도덕적 핵심인 성이 있다고 했다. 그의 이론이 전적으로 옳은 것은 아니지만 조선왕조는 주리론적 전통을 고수했고, 따라서 매우 규범 윤리적 사회가 된 것만은 틀림없다.

 

'주자학'은 한 마디로 요약된다.

존천리(存天理) 거인욕(去人慾)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은 항상 몸에) 하늘의 이치를 보존하고 사람의 욕심을 버리는 것이다. 천리(天理)=도심(道心), 인욕(人慾)=인심(人心).

 

'주자'는 또 이렇게 말했다.

음식천리(飮食天理) 요구미미(要求美味) 인욕야(人慾也)

(인간이 배고플 때) 먹고 마시는 것은 천리다. 그러나 맛있는 것을 많이 먹으려는 것은 욕심이다.

 

'주자'는 인욕중자유천리(人慾中自有天理). 즉 사람의 욕심 속에도 천리가 있다고 했다. 천리와 인욕의 구분은 무욕(無慾), 유욕(有慾)의 구분이 아니라 공(公)과 사(私), 시(是)와 비(非), 정(正)과 사(邪)의 구분이다.

주자는 과거제도를 통해 등용되는 공직자들에게 사(私)를 버리고 공(公)을, 비(非)를 버리고 시(是)를, 사(邪)를 버리고 정(正)을 추구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주자학'의 가장 큰 명제는

천리인욕수동시병유지물(天理人慾雖同時竝有之物) 연자기선후공사사정지반이언지(然自其先後公私邪正之反而言之) 역부득불위대야(亦不得不爲對也)

천리와 인욕을 비록 동시에 가질 수 있으나 인욕을 버리고 천리를 따르는 '보편적 가치'를 실천할 수 없는 사람은 공직자가 될 수 없다.

공직자는 시험에 의해서만 권력을 부여 받는 자가 아니다.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은 세종이 지은 악장체(樂章體) 찬불가(讚佛歌)다. 부처님의 중생교화를 예찬하고 있다. 월인천강(月印千江)은 달이 천 개의 강에 비친다는 뜻이다. 즉 부처님의 공덕이 달과 같이 모든 삼라만상에 고루 베풀어진다는 뜻이다.

'석보상절(釋譜詳節)'은 1447년 세조가 지은 석가모니 일대기인데 석가의 영웅적 일생을 찬탄하는 서사시다.

 

정도전은 불교를 비판하고 개혁하는 패러다임을 정했는데, 조선왕조에서 가장 위대하다는 세종임금은 공자를 찬양하는 글을 지어도 시원찮을 판에 불교를 찬양하는 서사시를 지었다. 왜 그랬을까? 조선 왕조는 1392년 창건되었지만 왕조초기는 아직도 고려문화 즉 불교문화가 잔존하고 있었다.

<영상 '심과 성' 3/4>

 

예나 지금이나 개혁은 어려운 것이다. 아직 민중들은 혁명의 실감을 느끼지 못하였다. 향교보다 절로 가고 싶었다. 세종 때 집현전을 만들고 학사들을 중용하며, 유교를 진흥시켜도 민중들은 불교가 지배하고 있으므로 타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세종은 '월인천강지곡'을 지었던 것이다. 이것은 역사로 볼 때 개혁의 후퇴라고도 할 수 있다. 역사의 패러다임을 바꾼다는 것은 다이나믹(Dynamic)하며 어려운 것이다.

 

정도전의 불교비판

시기심여천상지월(是其心如天上之月) 기응야여천강지영(其應也如千江之影) 월진이영망(月眞而影妄) 기간미상연속(其間未嘗連續)

마음은 하늘 위의 달과 같은 것이다. 달은 실물이지만 천강에 있는 그림자는 모두 헛것이 아닌가? 그 달과 그림자 사이에는 연속성이 없는 것이다.

 

정도전의 문제의식은 세종 보다 훨씬 앞서 있었다.

불교는 감각적 세계를 허환(虛幻)으로 본다. 정도전은 현상과 실제의 이원성을 본질적으로 거부한다. 그래서 월인천강(月印千江)의 노래는 fiction(허구)일 뿐이라고 비판한다. 정도전의 유학적 의식은 세종 때보다 훨씬 앞서 나가있었다. 허망된 것, 그림자적 세계하고 실제 세계를 나누어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림자를 받아들일 수 없다. 모든 것은 실(實)해야만 한다.

 

여지무량지형(如持無量之衡) 칭량천하지물(稱量天下之物) 기경중저앙(其輕重低昻) 유물시순(惟物是順) 이아무이진퇴칭량지야(而我無以進退稱量之也)

이것은 마치 눈금이 없는 저울대를 가지고 천하의 사물을 저울질 하겠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저울 쟁반에 올려진 물건이 무거운가, 가벼운가, 저울대가 내려가는가, 올라가는가, 이것을 오직 물건에만 맡겨둔다면, 내가 추를 움직여서 무게를 잰다는 행위가 없게 될 것이다.

 

고왈(故曰) 석씨허(釋氏虛) 오유실(吾儒實) 석씨이(釋氏二) 오유일(吾儒一) 석씨단절(釋氏斷絶) 오유연속(吾儒連續) 학자소당명변야(學者所當明辯也)

그리고 말하기를 석씨는 허하고 우리 유가는 실하다. 석씨는 둘이고, 우리 유가는 하나다. 불가는 단절적이지만 유가는 연속적이다. 배우는 자들이 어찌 이것을 명확하게 분별하지 않겠는가

 

정도전의 불교비판은 단순한 불교비판이라기 보다 인간이 살아가는데 있어서의 이원(二元)적 사유에 대한 본질적인 도전장을 내고 있는 것이다.

유교는 현실주의적이며 인간세계의 윤리를 주장하고 있다. 반면, 불교와 기독교는 초월주의, 윤회, 열반·지옥, 천당을 믿고 있다.

 

삼봉의 언어는 어디까지나 삼봉 고유의 문제의식 속에서 생겨난 그 자신의 언어이다. 이 조선 땅의 역사현실이 잉태시킨 언어다.

여태까지 우리는 살아있는 우리 조상의 언어를 너무도 읽지 못했다. 그들의 살아 움직이는 삶, 그 자체를 살아있는 모습대로 구성할 능력이 우리에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여기에 우리가 인류의 가장 위대한 사상가이며, 혁명가의 한 사람으로서 삼봉을 재조명해야 하는 당위성이 있는 것이다.

삼봉의 유혼(幽魂)은 아직도 조선의 푸른 창공을 배회하고 있는 것이다.

 

<영상 '심과 성' 2/4>

 

 

 

Posted by 망중한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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