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즉기 기즉천 (天卽氣 氣卽天)
항상 이렇게 강의를 들으려 와주시는 여러분께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격려 덕분에 이 강의를 열심히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저는 지난 주 문화일보 기자직을 그만 두었습니다. 2002년 12월 2일에 발령이 난 이후로 2004년 4월 3일까지, 문화일보의 평기자로서 1년 반 동안 나름대로 행복하게 지냈습니다.
문화일보의 편집국 분위기는 일체의 외부 간섭이 없었기 때문에 편집국은 그들의 상식 위에서 신문을 만들어 왔습니다. 하지만 신문사 측에서 저의 기고문인 ‘도올고성’의 주관적 해설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였기 때문에 제가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도올 고성'이라는 칼럼에 실린 제 글이 너무 한 쪽으로 치우쳐 있다는 것입니다. 문화일보는 치우침 없는 신문을 만들고자 하기 때문에 '도올 고성'을 실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문제라고 여기는 부분에 대해서 수정이라도 하겠다고 했으나 그들은 저의 제의를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결국 저는 “선비는 각필(閣筆)은 할 수 있으나 곡필(曲筆)은 할 수 없다” 하고 문화일보를 그만 둔 것입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오로지) 객관적인 사실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든 글에는 해석이 들어가 있고 치우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언론에서 치우지 않는다는 기사는 있을 수 없습니다. 치우치는 (치우칠 수 밖에 없는) 기사를 어떻게 공평하게 싣느냐가 안 치우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사태에 대해서 서로 상충되는 견해의 기사라 할지라도 열린 마음으로 포용하는 아량이야 말로 치우치지 않는 언론의 자세인 것입니다.
제가 칼럼에서 표현하고자 했던 내용 중에서 한쪽으로 치우쳤다고 하는 중요한 부분에 대해서 설명해 보겠습니다.
지금, 법에 대한 국민의 인식이 크게 잘못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영화 등을 통해서 미국의 재판과정을 볼 때는 법원이 마치 극장 같습니다. 원고 · 검사 · 피고 간에 형사 사건에 대한 공방을 진행하는데, 이 장면에서 법정은 하나의 드라마 무대와 같습니다. 재판은 12명의 배심원 앞에서 진행됩니다.
배심원은 다수결로 유죄(Guilty), 무죄(Innocent)가 여부를 결정하고 판사는 형량만을 결정합니다. 중요한 사실 인정은 배심원이 하며, 후속적인 형량결정만 판사가 하는 것입니다.
재판정에 참석한 배심원은 전혀 법률 전문가나 법조인이 아닙니다. 아주 평범한 일반 시민이며, 사법부에서 무작위로 뽑은 사람입니다.
법관이 전적으로 법을 적용하는 것이 아니고 범죄에 관한 진위 판단이나 사실인정은 법관이 아닌 그 시대에 살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의 상식에 맡기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에서 배심원 제도가 생긴 것입니다.
▶당사자주의 : 형사소송절차에 있어서 원고인 검사와 피고인이 소송의 당사자가 되어 소송을 진행시키는 주의. 직권주의에 대칭되는 말.
배심원제도에는 진위 자체의 인위적 결정은 인식론적으로 많은 문제점을 내포한다는 생각, 즉 진위 여부나 시비의 판단은 그 사태가 속한 사회의 상식적 컨센서스(Consensus=합의)에 맡기자는 생각이 깔려있습니다.
영미법에서의 법(Law)은 있는 것(Being)이 아니라 그 사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것(Becoming)입니다.
법을 존재론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생성론적으로 생각합니다.
영미법, 특히 시민의 권리에 관한 민법은 법전이 없습니다. 사람들의 상식에 의해서 법률이 만들어지는 것이며, 그것을 불문법(Unwritten Law)이라고 합니다. 영미법은 불문법이며. 관습 및 판례 중심의 법입니다.
불문법(不文法 Unwrittenlaw) : 영미법 : 관습•판례 중심
성문법(成文法 Writtenlaw) : 대륙법 : 법전 중심
그에 반해서 성문법은 법전 중심이며, 독일과 프랑스 계통의 대륙법을 말합니다.
법전은 하나의 시스템이며, 법관이 그것을 해석하고, 인간사회의 질서, 규범을 내려주고 있습니다. 대륙법 중에서는 참심제도를 두어 국민의 참여를 허용하고 있는 나라도 있습니다.
서양에서 법이라는 것은 마그나 카르타 이래로 귀족들이 왕권을 제약하기 위해 자기들이 낸 일종의 성명서 같은 것입니다. 그런 성명서들이 역사 속에 계속 쌓여서 법이 된 것입니다. 법은 반드시 그 역사의 내재적 맥락과 체험으로부터 우러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법조계는 법관권위주의를 고집하고 있습니다.
헌법학자 뢰빈슈타인은 헌법을 ①규범적 헌법, ②명목적 헌법, ③장식적 헌법으로 분류했습니다.
1948년 7월 17일에 대한민국 헌법이 제정 공포되었지만 우리나라 헌법은 역사의 내재적 맥락과 관계가 희박한 명목상의 헌법입니다.
법이란 옷과 같은 것으로 신체가 바뀌면 옷이 바뀌어야 합니다. 하지만 마치 어린 아이에게 멋진 어른의 옷을 입혀놓고 어린이가 커서 맞춰지도록 하는 것과 같은 것(우리 헌법과 같은 것)을 명목적 헌법이라고 합니다.
성문헌법으로는 미국의 헌법이 대표적인 것입니다.
대표적인 성문헌법인 미국 헌법은 독립전쟁을 거치면서, 영국에 항거하면서, 신대륙에 어떠한 나라를 만들어야겠다는 미국의 사상가 비전을 요약해서 제임스 메디슨을 비롯한 55명의 대표가 필라델피아에 모여 1787년에 성립한 것이 미국 헌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시민들은 그들의 헌법을 달달 외우고 있습니다.
모든 민권헌법은 계속 수정될 수 밖에 없고, 계속 수정되어 오고 있습니다. 미국의 헌법도 Amendment 즉 수정안들이 누적되어 이루어진 헌법입니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제2조.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지금은 이런 말이 굉장히 설득력이 있지만 전두환 시대에 이런 말을 하면 어땠을까? 당시의 헌법은 “대한민국은 독재국가다. 주권은 독재자에게 있고 권력은 독재자로부터 나온다.”라고 되어 있어야 맞는 헌법이었다는 말입니다.
영상 : 우리는 누구인가 제14강 '법과 기학' 1/4
영국의 헌법은 불문율로 되어 있는 불문헌법(Unwritten Constitution)입니다.
세계 역사상 법치와 민주주의가 가장 발전한 나라가 영국이라고 하지만, 막상 영국에는 헌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마그나 카르타(1215), 권리청원(1628), 인신보호법(1697), 권리장전(1689), 왕위계승법(1701) 등이 계속 이어져온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
Status of judicial precedent, text books, law books, the writings of historians and political theorists, the biographies and autographies of statesmen, the columns of every serious newspaper, the volumes of Hansard, the minutiae of every type of government record and publication. This is what is meant by saying the English constitution is unwritten.
교과서, 법률저서, 역사가들과 정치이론가들의 저작, 정치이론가들의 저작, 정치가들의 자서전과 자필문서, 모든 주요 신문의 사설, 정부의 기록 간행물 등등 모두가 영국 불문법 헌법에 속한다.
영국의 헌법이 불문법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초기 정도전에 의해 ‘조선경국전’이라는 이름의 성문헌법이 최초로 만들어지고, 성종 때 <경국대전:經國大典>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불문법이 있었는데, 공자의 사상에 예(禮)와 법(法)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子曰(자왈): 道之以政(도지이정), 齊之以刑(제지이형), 民免而無恥(민면이무치), 道之以德(도지이덕), 齊之以禮(제지이례), 有恥且格(유치차격)
정치로써 백성을 이끌고, 형벌로써 가지런히 한다면 백성들은 법망(형벌)을 피하기 위해 염치를 버리게(부끄러움을 모르게) 될 것이다.
백성을 덕으로서 이끌고 예로서 가지런히 한다면 백성들은 염치도 있고 질서도 있을 것이다.
조선왕조의 <경국대전>은 왕의 통치수단으로써의 법이기 때문에 골격은 형법(Criminal Law)이었습니다. 한국의 전통적 법은 형법이었습니다. 법을 포도청 나졸이 백성들을 때려 잡는 무서운 것으로만 알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백성들은 법을 ‘피해야 하는 것’으로만 생각하게 됐습니다.
민법(民法)은 것은 법을 통해서 백성(국민)들의 권리를 찾으려는 사상을 법으로 규정한 것입니다.
조선시대에는 법을 통해서 나의 권리를 주장하고, 법을 통해서 역사를 바꾸고, 법을 통해서 혁명을 하고, 법을 통해서 진리를 밝힌다는 것이 없었습니다. 조선시대(까지)의 법은 형법뿐이었습니다. 불행히도 오랜 세월 동안 전통적 규범이었던 우리의 예(禮)와 법(法)은 (백성의 권리를 밝히는) 민법으로 발전하지 못했고, 불문법으로도 발전하지 못했습니다.
유교사상은 불문법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법 체제에서 유리되어 갔습니다.
조선역사 500년 동안 추구한 것은 4단(四端)이었는데, 이것은 서양의 자연법(Natural Law)사상이 말하는 바와 같이 ‘인간의 본성에 내재하는 도덕적 질서’를 말합니다.
조선의 주리론(主理論) 전통은 자연법의 추구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리론, 곧 자연법 추구는 노모스(Nomos)를 뛰어넘는 피지스(Physis)였습니다. 법이 인간을 위해 있는 것이지 우리가 법을 위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이 법을 위해 있는 것 같은 이런 난센스(Nonsense)가 또 어디에 있습니까?
▶노모스 Nomos : Latin어로 Melody, 즉 ‘가락’
▶피지스 Physis : Latin어로 ‘자연의 작품’ 또는 ‘물리적인 성질’
우리는 조선 사상사를 다시 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조선사상사를 강의하는 중요한 이유는 바로 이러한 모든 (근원적인) 문제가 현재의 우리 현실과 얽혀있다는 것에 있습니다.
조선왕조는 500년을 지내면서도 근원적으로는 시대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조산 후기에 이르러) 바야흐로 새로운 역사의 변화가 오기 시작할 때 그것을 감지하고 새로운 역사를 만들려는 대표적인 사상가로 혜강 최한기(惠岡 崔漢琦)라는 인물이 꼽힙니다.
▶최한기(1803~1877)의 본관은 삭녕(朔寧), 호는 혜강(惠岡), 19세기 중엽, 새로운 사상 패러다임을 만든 대 사상가. 원래 개성 사람으로, 서울로 이주했다.
최한기의 선조는 집은 부유한 편이었지만 10대를 통해 과거급제자가 없었습니다. (家素裕 : 집은 원래 부자였다).
최한기는 어려서 양자를 갔는데, 무과에 급제한 양(養)증조부인 최지숭(崔之崇)에 이어 양부인 최광현(崔光鉉)도 무과 급제를 하여 벼슬은 곤양군수와 진주진관 병마동첨절제사에 이르렀습니다.
19세기 우리나라 최고의 사상가인 최한기는 서울 남대문 시장 쪽, 지금의 한국은행 본점 자리에 대궐 같은 집을 짓고 살았습니다.
육당 최남선 선생의 <조선상식문답속편>에 의하면, 조선 역사에서 가장 저술을 많이 한 사람이 최한기이며, 저서는 <명란주집>이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천 권을 저술했다고 하므로 아마 300~400권은 족히 되었을 것입니다(보통 3~4책이 한권 임). 그가 저술한 책 중 상당부분이 유실되었으나 아직도 많이 남아 있습니다.
최한기는 신비로운 인물입니다.
당대의 명망가들과 교류가 없었고 제자가 없었고 문집도 없었습니다. 정약용은 제자가 있었지만 최한기는 제자가 없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조선조 말에 가장 많은 저서를 소장하고 있었는데, 동양 전통 고서 외에도 당대에 출간된 서양의 (인문) 서적은 물론 모든 과학서적까지도 갖추고 있었습니다.
영상 : 우리는 누구인가 제14강 '법과 기학' 2/4
그리하여 중국 북경 정양문 내의 인화당(人和堂)에서 최한기의 30대 저서인 <신기통>과 <추측론>을 묶어 <기축체의>라는 이름의 활자 디럭스판으로 간행되었습니다.
조선의 학계에서는 최한기를 잘 몰랐고 19세기 조선에서는 중인들이 가장 깨어있었으며, 그들은 해외여행도 자주했기 때문에 역관(譯官)이나 중인(中人)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중인(中人)이란 조선 시대에 양반과 상민의 중간에 있던 신분 계급을 말합니다.)
실제로 최한기는 당대의 어마어마한 양반임에 틀림없습니다.
역사적인 대작(大作)들을 저술한 그의 저택 안에는 기화당(氣和堂), 양한당(養閒堂), 장수루(藏修樓), 긍업재(肯業齋) 등의 네 채의 건물과 24명의 종(남 13명, 여 11명)이 있었습니다.
당시(구한말)의 조선은 안동 김씨, 풍양 조씨 등의 세도정치와 민비(閔妃=명성황후), 대원군, 고종황제 간의 세력다툼이 벌어지고 있던 혼탁한 사회였습니다.
이처럼 엉망인 정치상황 속에서도 최한기는 정치와 권력의 변화와는 무관하게 인류 평화를 생각하고 세계를 바라보면서 살다가 갔습니다.
우리는 조선 후기가 최한기와 같은 사상가가 활동할 수 있었던 문화였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정치사적 맥락과는 무관하게 최한기는 너무도 멋지게 살다 간 희대의 인물이었습니다.
최한기를 19세기 조선의 Cosmopolitan(=세계인)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최한기 사상의 특이점은 오륜(五倫)에 일륜(一倫)을 더한 육륜(六倫)이라 하는 데서 엿볼 수 있습니다.
君臣有義(군신유의), 父子有親(부자유친), 夫婦有別(부부유별), 長幼有序(장유유서), 朋友有信(붕우유신)의 오륜(五倫)에 兆民有和(조민유화)를 더했습니다.
兆民有和(조민유화)란 억조창생, 즉 모든 인간은 화합한다는 뜻입니다.
최한기는 55세에 한국 역사상 최초의 세계인문지리서인 지구전요(地球典要)를 저술하기도 했습니다. 지구전요(地球典要)에는 나라이름, 수도, 인구 등이 상세히 기술되어 있습니다.
최한기의 유일한 친구는 대동여지도의 저자인 김정호입니다. 조선시대에 이분 이상의 위대한 인물은 없을 것입니다.
(국민이라면) 우리나라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아야 합니다. 나라의 모습을 그린다는 것은 근대정신의 소산입니다.
김정호의 지도는 오늘날의 인공위성이 촬영한 것보다 더 정확합니다. 생김새(지형)도 정확합니다. 걸어 다니면서 어떻게 그렸을까? 현대과학으로는 풀 수 없는 미스터리 투성이입니다.
종래의 지도는 김정호의 지도에 비교도 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김정호의 친구인 최한기도 정확한 세계지도를 그렸습니다. 모든 나라의 수도, 인구, 정치제도 등을 적었습니다.
文一平(1886~1936)의 조선명인전(朝鮮名人傳)에는 최한기와 김정호가 남산 꼭대기에 올라 밤의 별을 쳐다보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나눈 것으로 기술되어 있습니다. 두 위인은 기(氣)를 토하면서 말했습니다.
“조선의 기를 먹고 살고 있으니 무언가 조선을 위해서 의미 있는 인생을 살아야 하지 않는가!”, 그리고 “학문으로서 치안(治安=치민<治民>과 안민<安民>)을 이룩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가 아닌가!”
“조선의 정치가 무엇 하나 돌아가는 것이 있는가? 안동김씨, 풍양조씨들이 전부 사랑방 정치를 하고 있지 않는가? 국정은 날로 혼미해가고 있다. 정호야! 너는 지리(地理 : 땅의 이치)를 맡아라. 나는 천문(天文=天紋=하늘의 무늬=하늘의 질서=모든 보편적 법칙)을 맡겠노라”고 기염을 토했다고 합니다.
지리를 공부한 김정호는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를 남겼고, 천문을 공부한 최한기는 기학(氣學)을 연구했습니다.
천즉기(天卽氣), 기즉천(氣卽天) 하늘은 기로 되어 있고 기는 곧 하늘이다. 즉, 우주는 기다.
“나는 기를 연구하겠다.”한 최한기는 평생을 기(氣) 하나의 연구에 몰입했습니다.
과거 우리가 알았던 (성리학) 이기론의 기가 아니라, 이 사람의 기는 100% 과학적인 기였습니다.
‘기학(氣學)’은 최한기가 55세 때 연구한 우주론의 대작입니다. 이 책은 19세기 조선의 가장 개명한 사상가인 최한기의 포괄적 우주론을 담고 있다. 최한기의 ‘기학(氣學)’은 정말로 위대한 책입니다.
‘기학(氣學)’ 서두에,
中古之學(중고지학), 多宗無形之理(다종무형지리), 無形之神(무형지신), 以爲上乘高致(이위상승고치)
옛날부터 지금까지의 학문에서 사람들은 여러 가지 무형의 리(理)와 무형의 신(神)을 받들었다. 애매모호한 것을 숭상했다.
신기(神氣)는 신천(神天=God)에 해당하는 최한기의 기(氣)개념입니다.
혜강 최한기는 하느님도 기일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기 자체가 형체이며, 신적인 것이므로 모든 것은 유형으로 환원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혜강 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 논점은 바로 무무(無無)입니다.
무무(無無)란, 무(無)는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유형의 구체적 증거가 있는 것이고 형태가 없는 것은 무(無)라는 말입니다.
“모든 것은 유체적인 유형의 근거가 있는 것이고 그 유형의 근거도, 형체가 있는 것이라 할지라도 (어떤 경우에도), 우리가 무형이라 생각하는 모든 것이 유형이다. 앞으로 내가 하는 학문은 형체가 없는 것이라고는 없다.”
이것이 바로 ‘최한기의 근대 과학사상’의 출발이다.
영상 : 우리는 누구인가 제14강 '법과 기학' 3/4
정도전에서 이퇴계에 이르는 모든 유학적 패러다임은 최한기에 의해서 완전히 바뀌게 됩니다.
우리 민족에게도 개명(開明)한, 현실적인, 세계의 학문으로 발전해 가게 됩니다.
개화기의 사상가들(김옥균, 유길준, 박영효 등)은 서양 콤플렉스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일본에 가서 서양을 배웠습니다. 서양 제국주의 학문인 진화론의 희생양들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동도서기(東道西器) 운운하는 유치한 논리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입니다.
▶東道西器 : 동양의 도에 서양의 그릇, 즉 정신은 동양적인 것을 유지하는 가운데 서양의 물질문명을 수용한다는 의미
최한기는 조민유화(兆民有和), 즉 지구상의 모든 민족, 종족이 편견 없이 대등하게 교류되어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19세기 당시에도 그는 “흑인들도 우리와 똑같이, 세상의 모든 사람과 같이 대접해야 한다.” 고 했습니다.
“우리는 서양으로부터 배울 것이 많다. 서양의 과학은 뛰어나다. 기학에 있어서도 그들은 근거 있는 유형의 기로부터 법칙화시켰다. 그들은 모든 것을 계량화시키고 잴(계측할)수 있게 해 주었다. 이때까지 우리가 무형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잴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러면서 “서양문명은 우리가 갖고 있는 정신문명을 깊게 배워야 한다”고 질책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19세기 중엽이라 하면 민란이 가장 많이 일어나고, 외세가 가장 빈번히 침범해 오는 처참한 역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 역사는 이렇게 위대한 사람, 가장 위대한 사상가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바로 최한기입니다. 그의 저서는 2세기가 지난 오늘날에 읽어도 현재의 어떠한 물리학자의 세계관보다 뛰어난 것이며, 거의 2세기가 지난 오늘날에도 이 책에 상응하는 과학적 우주론이 한국인에 의해 시도된 바는 없습니다.
제가 여기까지 나와서 소리치는 것은 도올 김용옥이 잘 나서가 아닙니다.
이 땅에는 저보다 몇 백배 훌륭한 사상가들이 꾸준히, 남모르게 피눈물을 흘리며, 조국의 운명을 걱정하면서 키워 온 역사가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날 이 역사의 수레바퀴가 바야흐로 이들이 꿈꾸었던 세계를 이룩하려는 역사로 진입하고 있는 것이며, 우리가 우리의 역사를 바르게 알아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투표장에 가야 합니다.
특히 젊은이들은 한 명도 빠지지 말고 투표장에 가서 귀중한 한 표의 권리와 의무를 행사해야 됩니다.
만 20세의 어린 아이들에게까지 한 표의 투표권이 주어지기까지 인류 문명은 희랍인들의 데모크라시로부터 시작해서 2,500년 동안 노력했고, 그 노력의 결과로 오늘의 여러분들에게 투표권이 주어진 것입니다.
이것은 인류가 2.500년 동안 왕정과 투쟁해서 얻은 (민주주의 투쟁의) 결과인 것입니다.
현재의 나의 존재를 우연적 존재로 생각하지 말고 기나긴 인류사의 정신문명의 성취 속에 나의 존재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귀중한 한 표를 행사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영상 우리는 누구인가 제14강 '법과 기학'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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