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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하는 지성 - 역사/역사 바로알기

5.18민중항쟁

5.18민중항쟁을 되돌아 본다.

 

5.18민중항쟁 영상 – 5.18기념사업회 –

 

1980년 5월, 계엄군에 의한 피의 살육이 일어나기 전까지 광주는 여느 도시와 다르지 않았다.

민주화를 요구하는 평화적인 '시국성토대회(1980년 5월 14일)'가 열리고 있었지만 그나마도 5월 15일 이후에는 잠잠해있었다.

 

 

그러나 5월 17일, 전국에 비상계엄령이 확대되고 전 대학에 휴교령이 떨어졌다. 이에 대학생들은 교문 앞의 군인들과 소규모 투석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5월 18일, 광주에는 공수부대가 투입됐다.

 

작전명 '화려한 휴가'

 

광주시내는 순식간에 피로 얼룩졌다. 소총에 대검까지 장착한 유혈진압이었다.

군인들의 무자비한 진압에 시민들은 분노했다. 이틑날, 학생시위는 민중항쟁으로 변해갔다. 제 나라 군대에 의한 이 같은 유혈진압은 대체 어떻게 해서 빚어지게 된 것일까?

 

1979년 10월 26일

18년 만에 박정희 독재권력은 몇 발의 총소리와 함께 끝이 났다. 그러나 유신권력의 붕괴는 예고되어 있었다.

4.19민주혁명을 쿠데타로 밟고 일어섰던 박정희, 그는 민중들의 자유와 인권을 희생시키더니 마침내는 자신의 영구집권을 보장할 유신헌법을 휘둘러 민중들의 높은 불만을 사고 있었다.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과 노태우 등 '하나회' 소속의 정치군인들은 박정희의 죽음을 이용했다.

국내 정보를 폭널게 파악하고 있던 그들은 공백상태에 빠진 권력을 찬탈하기 위해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그들은 계엄사령관 등 당시의 육군 수뇌부를 체포하고 무력으로 육군본부와 국방부를 점령했다. 12.12라 불리우는 이 같은 쿠데타를 통해 그들은 권력의 핵심으로 떠올랐다.

 

당시, 유신독재에 억눌렸던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은 봇물처럼 터져 나오고 있었다.

민주인사들이 석방되고 김대중과 김영삼, 김종필 '3김씨'도 선거에 나설 준비를 하고 있었다. 신군부가 권력 장악을 준비해 가던 시기에 맞은 이른바 '서울의 봄'이었다.

대학생들도 민주주의를 외치며 거리로 나섰다. 그들은 계엄령해제 등을 요구했고 노동자들도 노동조건 개선과 임금인상을 위해 싸웠다.

 

1980년 5월15일

학생들의 시위는 서울역 앞의 대규모 가두시위로 번졌다. 그러나 학생들은 스스로 시위를 접고 돌아섰다. 신군부에게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학생시위 마저 잠잠하던 5월 17일, 신군부는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했다.

권력 장악을 위한 기회를 노리고 있던 그들은 민주화 열기를 사회혼란으로 몰아 부쳤고 때마침 민주화 열기를 꺾을 본보기로 선택된 것이 바로 광주였다.

 

5월 20일

광주항쟁이 사흘째 되던 날 시위는 조직적으로 변해갔다. 택시 200여 대가 시위를 시작하자 버스와 트럭까지 합세하면서 시위대는 20만 명으로 불어났다.

21일에는 너른 금남로가 30만 명의 시민들로 메워졌다.

 

계엄군은 광주시를 외곽으로부터 조여왔다. 광주의 저항이 전국으로 퍼져 나갈 것을 우려한 것이다.

그리고 오후 1시, 그들은 일제히 사격을 가했다.

 

"대한민국 군인은 우리의 이웃이고 내 형이고 내 아들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시민을 학살하러 나타나니까 처음에는 두려웠지만 이제 분노가 더욱 증폭된거죠. 어떻게 대한민국 군대가 이렇게 대한민국 국민을 무차별 죽일 수 있느냐? 상상도 못했죠." – 당시 시민군 상황실장 –

 

 

죽어 간 사람들은 그 날 아침에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집을 나섰던 시민들이었다. 그 때 얼마나 많은 시민이 우리 군대가 쏜 총에 맞아서 죽어 갔는지에 대해서는 아직껏 국민들이 납득할 만한 발표가 없다.

 

수 많은 죽음을 지켜 본 시민들은 총을 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화순이나 영암, 나주 등지에서 무기고를 털어 무장했다. 며칠 전까지도 생업에 여념이 없던 시민들이 자기 나라의 군대에 맞서 총을 든 것이다.

당시 언론에서는 그들을 국가전복을 위해 내란을 일으킨 불순세력, 폭도들이라고 했다. 그러나 시민들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총을 들었고, 광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내 걸었다.

 

"대낮에 무장하지 않은 사람들이 행진하려고 하는데 거기에 그대로 발포를 해버린 상황에서 내가 죽지 않으려면 내가 총을 가지고 있어야 될 거 아니어요. 왜냐면 자기가 죽을 것을 생각하니까, 생존의 본능입니다. 총을 든 것은.." – 김상집 당시 시민군 참가자 –

 

시민들이 총을 들자 계엄군은 시내에서 철수했다. 광주는 해방된 도시가 됐다. 광주엔 모처럼 평화가 찾아 온 듯 했다.

그러나 광주의 교통과 통신은 모두 끊겼다. 계엄군은 광주를 완전히 포위해 고립시켰다. 광주 밖에서는 아무도 광주의 실상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고립된 광주의 시민들은 서로 도우며 버텨갔다. 생필품 사재기나 폭리가 없었고 식량도 함께 나누어 먹었다. 시민군은 치안과 질서를 유지하면서 시민 자치의 힘을 발휘했다.

 

"광주 시내 금은방이 하나 털렸다던가, 또는 어디 상점이 약탈을 당했다던가, 수많은 은행 지점들이 있습니다마는 그런 지점의 금고가 하나 털렸다던가 하는 이런 사건 자체가 하나도 없습니다." – 박남선 당시 시민군 상황실장 –

 

"누가 먼저 이렇게 사과를 줬는지 음료수를 줬는지 그때 당시에는 주로 밥보다는 그런거였거든요. 시민들이 많은 양의 김치나 또 생김치를 담궈서 날라주고요, 내일 먹을 것이 부족할 것 같다 싶으면 그 아줌마들이 리어카에다 이렇게 많은 양의 김밥이라던가 이런 것을 말아가지고 '양1동 아줌마들', '양2동 아줌마 일동' 한다던가 길거리에다 가마솥을 이렇게 걸어 놓고 거기서 불을 즉석에서 때면서 우리 시민군들한테 밥을 해서 먹이고.." - 정향자 당시 도청 취사담당 -

 

5월 22일

시민군과 광주의 주요인사로 구성된 '시민학생수습위원회'가 결성됐다. 그들은 연행자 석방 등을 요구하며 계엄군과 협상을 벌였다. 그러나 계엄군은 이를 거부하고 무조건 무기를 반납하라고 강요했다.

수습위원회는 '끝까지 광주를 지키자는 쪽'과 '무기를 반납하고 협상을 계속하자는 쪽'으로 나뉘었다. 아무런 대책도 없이 수습위원들은 무기를 반납하자고 결정했다.

 

무장한지 하루 만인 22일, 시민군은 해체되어 갔다. 그들 가운데는 끝까지 싸우자는 시민들도 있었다. 그들은 광주를 지키기 위해 전남도청 안으로 들어 갔다.

 

26일 아침

계엄군이 도천진압작전을 시작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당시 도청 안에는 천여 명의 시민이 남았었다. 할머니나 초등학생도 있었지만 그날 밤 그들은 집으로 돌려 보내졌다.

그 날 자정 무렵, 도청 안에는 수류탄과 소총으로 완전무장한 특공조가 투입됐다. 도청을 지키던 시민군들은 27일 새벽 다섯시까지 계엄군과 맞서 싸웠다. 권력을 장악하려는 군부에 대한 광주 시민들의 최후의 저항이었다.

 

"그들은 전혀 죽을 이유가 없었다. 군은 무력으로 광주시를 점령할 필요가 없었다. 광주 사람들은 평화로운 해결을 원했다. 애당초 광주에서 항쟁이 일어난 이유는 5월 18일부터 시작된 군의 만행 때문이었다." - 노먼 쏘프 당시 아시안월스트리트저널 기자 -

 

"민간인 피해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폭도들은 생포 207명, 사만 두명입니다.이상은 전남북계엄본부에서 알리는 말씀이었습니다'' – 당시 방송 보도 -

 

27일의 도청 진압작전으로 광주시민들의 저항은 일단락됐다.

그러나 그 뒤에도 계엄군의 폭력은 끝나지 않았다. 그들은 광주 전역에서 시민들을 무자비하게 연행해 갔다. 부녀자들은 물론, 초등학생까지 폭도로 몰렸다.

 

5.18민중항쟁은 실패한 역사인가?

 

5.18은 부도덕한 전두환과 노태우 정권의 가장 치명적인 오점이 됐다. 5.18을 경험한 국민들의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은 결코 식지 않았다.

 

그 해 8월, '광주사태내란음모죄'를 뒤집어 쓰고 김대중이 사형을 선고 받았다.

전두환은 마침내 '체육관 선거'를 통해 대한민국의 대통령에 취임했다.

 

5.18민중항쟁을 피로 딛고 일어 선 살인독재정권.

 

전두환은 유신독재 못지 않은 절대권력을 휘두르며 민주화운동을 탄압했고, 임기 내내 의문의 죽음들이 꼬리를 물었다.

그러나 5.18의 진실은 아직 다 밝혀진 것이 아니다. 88년에 광주청문회가 열렸지만 신군부는 발포명령 등에 대해 입을 다물었다.

 

"제가 알고 있기에는.." - 주영복 당시 국방부 장관 -

 

"발포 명령에 증인께서 관여했다고 줄기차게 공격을 하고 있습니다. 이 자리에서.." - 김길홍 청문회 당시 민정당 전국구 의원 –

"저는 절대 관여를 안했습니다." - 정호용 5.18 당시 특전사령관 -

 

아직 정확한 사망자 수나 실종자 수도 밝혀지지 않았다. 당시 계엄군이 급하게 파묻은 신원을 알 수 없는 유골들은 90년대에 이르러서도 곳곳에서 발굴됐다.

당시 미국이 전두환을 위해 어떤 역할을 했는지도 규명돼야 한다.

 

"당시 미국 정부가 본 3김씨와 전두환 씨에 대한 평가, 그리고 끝내 군부의 손을 들어 준..' - 엄기영 MBC뉴스데스크 앵커 1996년 3월 22일 보도 -

 

한국군의 부대 이동을 위해서는 미국의 승인이 필요하다.

미국은 당시 친미적인 인물로 전두환을 꼽고 있었고, 5.18 당시에는 항공모함을 보내 신군부를 도왔다.

현재까지 밝혀진 것은 미국이 군대 이동을 승인해 광주학살을 가능하게 했다는 사실이다.

 

"미국은 평화적인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서 자신들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군사력을 이용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미국은 특전사가 어떻게 훈련 받았는지 잘 알고 있고, 즉 미국은 광주나 부산에서 (공수부대가) 얼머너 폭력적으로 진압할지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특전사는 원래 자국민이 아닌 북한사람들을 죽이도록 훈련 받은 군인들이 아닌가.." - 팀 셔록 미국 저널리스트 -

 

이 땅의 민주주의를 위해 죽음 앞에서도 굴복하지 않았던 5.18 민주영령들.

그들의 뜨거웠던 항쟁은 80년대 이후 우리의 민주주의를 이끌어 온 출발점이었다.

1980년의 5월 투쟁은 이후, 해마다 5월 시위를 불러 오며 87년 '6월 대항쟁'으로 이어졌고 경국 살인정권의 두 주역, 전두환과 노태우는 역사의 심판을 받았다.

그리고 다시금 새로운 세대는 피로써 일궈낸 5.18민중항쟁을 자양분 삼아 한국민주주의의 새 날들을 열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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