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행동하는 지성 - 역사/역사 바로알기

도올 김용옥 - 우리는 누구인가 제5강 '정몽주와 정도전'

정몽주가 정도전에게 맹자와 이성계 소개

맹자(孟子)의 사상은 공자(孔子)의 사상하고는 매우 다르다.

공자는 체제의 변혁 보다 인간의 심미적 완성에 관심이 컸던 반면에

맹자는 철두철미한 사회적 관심 속에서 혁명(革命)을 논한다.

정몽주로부터 맹자를 받은 정도전은 하루에 반쪽 이상을 읽지 않는 정독을 하며 맹자를 공부했다. 정도전의 혁명에 대한 의지는 이 때에 시작된 것이다.

정몽주(鄭夢周 1337 ~ 1392)

고려 말기 문신 겸 학자. 의창을 세워 빈민을 구제하고 유학을 보급하였으며, 성리학에 밝았다.《주자가례》를 따라 개성에 5부 학당과 지방에 향교를 세워 교육진흥을 꾀했다. 시문에도 뛰어나 시조〈단심가〉외에 많은 한시가 전해지며 서화에도 뛰어났다.

경제적 토대가 빈약하면 그 나라는 흔들린다. 정치라는 것은 경제를 떠나서 생각할 수 없다.

고려 말의 경제상황은 매우 불합리한 상태가 되어 있었다. 토지에 대한 소유권이 없는 관리도 퇴임 후에 수조권(收租權)이 계속 유지되는 불법적 관행이 뿌리 깊고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심지어 한 토지에 9명이 불법 수조권을 주장하며 수탈하는 경우도 허다했으므로 소작농들의 생활은 말할 수 없이 피폐해져 있었다.

고려말의 불합리한 정치 및 경제구조에 대한 변혁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던 개혁파의 중심에는 정몽주가 있었다. 정몽주는 남달리 비상한 정도전을 이성계에게 소개하고, 정도전은 함경도 함주의 막사로 이성계를 찾아 가서 구체적인 혁명안을 제안한다. 위화도 회군 5년 전인 1383년 가을이었다.

조준(趙浚 1346 ~ 1405)

고려 말·조선 초의 문신. 고려 말 전제개혁을 단행하여 조선 개국의 경제적인 기반을 닦고, 이성계를 추대하여 개국공신이 되었다. 제1차 왕자의 난 전 후로 이방원의 세자책봉을 주장했으며, 태종을 옹립하였다. 토지제도에 밝은 학자로 《경제육전(經濟六典)》을 편찬하였다.

정도전은 사전을 폐지하고 모든 토지를 공전으로 하는 균전제를 주창했는데, 모든 자영농자가 땅을 골고루 분배 받는 개인수전(個人授田)의 원칙을 고수했다.

이것은 최초의 완벽한 토지공개념이었다.

이에 대하여 조준은 토지에 대한 수조권만을 문제시하여 수조권을 현직관리에만 한정시켜서 권문세가의 모든 불법적 수탈을 박탈했다. 과전법(科田法)의 시행이었다.

과전법(科田法)

고려 말기에 정도전(鄭道傳)·조준(趙浚) 등 개혁파 사대부들이 사전(私田)의 폐단을 없애고 새로운 경제 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1391년(공양왕 3)에 제정한 토지제도이다. 조선이 건국된 이후에도 계승되어 1556년(명종 11) 직전법(職田法)을 폐지하고 녹봉제(祿俸制)를 실시할 때까지 조선의 양반관료사회를 유지하는 제도적 기초가 되었다.

정몽주는 고려왕조를 유지하는 개혁사상을 구상했다. 혁명노선에 반대했던 정몽주에 의해 정도전은 영주 봉화에서 체포되어 보주(甫州 예천)의 감옥에 갇힌다.

그러던 중 이성계가 해주에서 사냥 중에 낙마하여 부상을 입자 혁명파는 크게 타위축되고 정몽주가 득세한다. 바로 이 때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의 활약이 시작된다. 이방원이 26세 때였다.

방원이 이성계를 개성 집으로 모셔 들이자 정몽주가 문병을 한다.

이 때에 방원은 하여가(何如歌)를 불러 정몽주의 속 마음을 떠보려 했고, 정몽주는 역성혁명의 뜻이 없음을 단심가(丹心歌)로 화답한다.

하여가(何如歌)

此亦何如 彼亦何如 城隍堂後垣 頹落亦何如 我輩若此爲 不死亦何如

이런들 엇더며 져런들 엇더료, 만수산(萬壽山) 드렁○이 얼거진들 엇더리, 우리도 이치 얼거져 백년(百年)지 누리리라

 

단심가(丹心歌)

此身死了死了 一百番更死了 白骨爲塵土 魂魄有也無 向主一片丹心 寧有改理也歟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여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역사의 아이러니, 비정함이란 여기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난다.

조선 건국에 성공한 이씨왕조는 충절의 표상으로써 정몽주를 우대하고 혁명의 1등 공신이며 조선 건국의 주역이었던 정도전을 '역적' 내지는 '권력투쟁의 패자'로 각인시키고 만다.

조선 초기부터 진행된 정도전에 대한 이런 작업들로 인해서 조선은 진취적이지 못하고 낙후되어 갔으며 보수적인 사회가 될 수 밖에 없었다.

이런 것이 바로 지배자의 역사왜곡이며 민중의 불행이었던 것이다.

정몽주가 자기 신념에 따라 충절을 지킨 비장한 인물로 평가되듯이 정도전 또한 자기 이념에 따라 비장한 최후를 맞은 성공적 혁명가로 평가되어야 마땅하다.

삼봉 정도전의 조선경국전에는 철학이 있다. 그것은 철저하게 민본주의적이며 철저하게 개혁적인 것이었다. 성종 때에 편찬된 경국대전은 지배력 유지와 강화를 위한 통치수단일 뿐, 이러한 철학이 빠져버린 것이다. 위대한 혁명가를 배척한 결과는 그렇게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광범위한 노예제도를 배제한 그리스의 민주주의 사상과 달리 동양의 공자와 맹자의 민본주의는 신분의 차별이 없는 진정한 민주주의였다. 다만 '민의'를 반영하는 제도적 장치가 미비했을 뿐이다.

마그나카르타(Magna Carta)

1215년의 대헌장. 이것은 왕권으로부터 귀족들의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귀족헌장에서 발전한 것이 17세기에 이르러 왕권과 의회의 대립에서 왕의 전제(專制)에 대항하여 국민의 권리를 옹호하기 위한 최대의 전거(典據)로서 이용되었다.

한국은 서구의 선거제도가 가장 빨리 정착된 나라다. 이것은 동아시아는 물론 전세계적으로도 유래를 찾기 어려운 일인데, 그 이유는 한국민에게는 이미 유구한 민본, 민주의 사상이 내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민주라는 개념에 있어서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앞서있는 민족이고 전통을 가진 민족이다.

하지만 민주라는 용어는 추상적이기 때문에 애매하고 국민을 기만하기 쉬운 용어다. 여기에 속으면 안된다.

민주는 치세(治世)의 방법에 관한 것이며 역사의 목표가 될 수는 없다. 말하자면 민주는 그것 자체로 목표가 될 수 없고 항상 무엇인가를 위해서 존속하는 정치방법론일 뿐이다.

포은이나 삼봉이 가장 고뇌하고 가장 이루고자 했던 역사의 목표는 '반부패'였다. 역사의 목표는 '반부패'인 것이다.

동학의 이념은 보국안민이었다. 외세로부터 나라를 보호하자는 보국(保國)이 아니라 그릇된 것을 바르게 하고 썩은 것을 도려내야 한다는 보국(輔國) 안민(安民)이었던 것이다.

조선경국전 정보위 (正寶位)에서 인용한 주역(周易) 계사(繫辭) 하전(下典)의 인용문에 정도전의 혁명사상이 드러나 있다.

天地之大德曰生이요 聖人之大寶曰位니 何以守位오 曰仁(人)이요 何以聚人고 曰財니 理財하며 正辭하며 禁民爲非曰義라

천지(天地)의 큰 덕(德)을 생(生)이라 하고 성인(聖人)의 큰 보배를 위(位)라 하니, 무엇으로써 지위를 지키는가? 사람이며, 무엇으로써 사람을 모으는가? 재물이다. 재물을 다스리고 말을 바르게 하며 백성들의 비행(非行)을 금함을 의(義)라 한다.

정도전은 주역 계사 하전 본문의 순서를 바꾸고 편집하여 인용했다.

즉 조선의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서 국가 보다도 군주를 앞에 두고(聖人之大寶曰位), 뒤에 군주의 자리를 지키는 덕목으로서 백성의 마음을 생생하게 하는 인(何以守位曰仁)을 두었으며 그 사이에 천지 대덕인 생(天地之大德曰生)을 배치함으로써 위(位)→생(生)→인(仁)의 '국가통치철학'을 정리한다.

통치자는 언제 새롭고 새로와져야 하며, 민중의 마음도 언제나 새롭고 새로와지도록 하는 것이 바로 정도전이 세운 조선의 통치이념이자 국가철학이었다.

우리가 정도전을 공부하고 논하는 것은 역사의 생명력을 새로 느끼자는 것이고, 우리가 앞으로 해야만 할 일은 역사의 혁명, 가치관의 혁명을 이루는 것이다.


"); wcs_d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