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코 사그라들지 않는 불씨, 그것이 민족혼이며 겨레의 얼

 

 

 

 

광복 이후 대부분의 권력을 차지한 친일파들은 당연히 자신들의 친일 기득권을 인정해준 이승만과 이승만을 앞 세운 미국에 대하여 복종하고 추종했다.

이들이 차지한 것은 정치권력뿐 만이 아니었다.

사회 각계의 요직과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자리를 모두 선점하고 일제와 친일에 적대적인 인사 및 분위기를 제거, 말살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백범 암살사건이고, 반민특위 습격사건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일제가 설립, 운영한 조선사편수회 출신 또는 그 추종자들이 대거 역사교육의 중추적인 요직을 쥐고 친일 식민사관을 교육하기 시작했다. 국정교과서가 이들에 의해 집필되었으니 기타 참고서를 비롯한 역사학계의 주류가 친일 식민사관으로 심각하게 변질되어 갔다.

역사교육에서 시작된 왜곡은 교육 전 분야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국어교과서에 등장하는 시인, 수필가, 소설가 등 대다수의 문인이 친일파들로 채워졌다. 문학적 호소력과 친화력을 통해 (일제와 친일에 대한 감수성을 조종하고자 했던 일제의 조선식민정책과 흡사한 상황이었다.

 

불법사찰과 검문, 구금이 공공연하던 시절이었다.

권력의 지침을 비판하거나 비난하는 것은 그야말로 화약을 지고 불구덩이로 뛰어드는 것이나 다를게 없는, 암흑 같은 시절이 계속 이어졌다.

그 모두가 일제의 잔재요, 미국이 선택한 남한의 권력구조요, 이승만에 의해 공고화된 친일기득권의 만행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구한 세월 이어 온 블씨는 결코 사그라들지 않았다. 그리고 앞으로도 면면히 계승될 것이다. 그 불씨는 바로 불의에 침묵하지 않고 정의를 외면하지 않는 우리 겨레의 얼이다. 우리의 민족혼인 것이다. <편집자 주>

 

 

 

▲ 임종국선생 조형물 건립촉구 관련 행사에서 인사하는 김지철 교육감. ⓒ 김지철

 

 

전교조 해직교사 출신의 김지철 충청남도교육감과 '앙상한 손에 만년필을 쥐고

원고지 빈칸을 메우던' 임종국 선생의 인연은 숙명적이라고 불러야만 할 것 같다.

 

 

친일청산에 대한 찬반논란이 있다

 

"대한민국은 민족반역자를 심판하지 못한 세계 유일의 국가다. 역사는 잘못한 것과 잘한 것을 사실대로 적어야 교훈이 되고 이를 통해 역사정의와 민족정기를 세워야 하는데 우리는 부끄럽게도 그렇게 하지 못했다. 어떤 사람들은 친일파들이 세상을 거의 떠났으니 이제 그만하자고 한다.

 

용서와 화해는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나치 부역자를 철저히 청산한 프랑스에서 관용을 배워야 한다. 대충 묻어두는 게 관용이 아니라 역사의 죄과를 명명백백 밝힌 다음에 용서를 구하고 용서하는 게 관용이다.

 

친일청산을 반대하는 세력들은 친일파의 후손이거나 친일파가 퍼뜨린 오염된 주장에 부화뇌동하는 이들이다. 친일파 청산 없는 용서와 화해란 있을 수 없다. 이 나라가 왜 이렇게 부정부패와 협잡이 판을 치는 나라가 됐나. 그건 친일파 청산을 바로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반민족 행위는 시대가 아무리 흘러도 반드시 심판하고 청산해야 한다. 그래야 민족의 미래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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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 [스토리펀딩] 3화 "모윤숙 친일파" 외친 학생 교육감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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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망중한담

친일파들이 득세하면서 나만 잘살면 된다는 망국의 풍조가 만연

부친의 친일행적까지 기록한 친일문학론은 고발장 아닌 성찰을 촉구한 진실의 기록

 

영상 : 민족문제연구소 친일 연구의 선구자 임종국

 

 

임종국(林鍾國) 선생 약력

 

임종국 선생은 경상남도 창녕에서 출생하고 1956년 고려대학교 정외과를 졸업하였다. 시작품 (文學藝術, 1956.11.)자화상 自畵像(思想界, 1960.1.) 등이 추천되어 시작 활동을 하였다.

 

1929 경남 창녕 출생

1952 고려대학교 정치학과 입학

1959 문학예술에 시 <()>발표로 등단, 60년대 '사화집(詞華集)' 동인으로 詩作 활동

1965 굴욕적 한일회담을 계기로 일제침략사와 친일파에 대한 연구 시작

1966 친일문학론》 《이상전집출간. [친일문학론]을 낸후 그의 친일연구는 철저한 조사를 통해 정치,경제,사회,교육,종교,군사,예술 분야 등 사회 모든 분야로 확산되었고 임종국은 친일파 개인의 친일행적뿐 아니라 그 집안의 친일내력까지도 연구했다.

1968 고려대학교 4학년 재입학

1969 고려대학교 정치학과 졸업

1970 발가벗고 온 총독출간(선문출판사)

1974 한국문학의 사회사출간(정음사)

1978 醉漢들의 배출간(평화출판사)

1980 韓國社會風俗野史출간(서문당). 여전히 친일파가 활개치는 세상, 친일파와 비굴한 학계의 외면 속에 아사 지경에 이를 만큼 가혹한 생활고와 학자들의 비아냥 속에서도 오직 연구에만 전념한다. (천안의 한 외딴집 요산재(樂山齋)에서 병과 가난에 시달리면서도 계속된 집필 활동)

1981 정신대 실록출간(일월서각)

1982 일제침략과 親日派출간(청사)

1984 밤의 일제침략사출간(한빛출판사)

1985 일제하의 사상탄압출간(평화출판사)

1986 한국문학의 민중사출간(실천문학사)

1987 친일논설 選集출간(실천문학사)

1988 日本軍朝鮮侵略史 1출간(일월서각)

1989 日本軍朝鮮侵略史 2출간(일월서각).

1989 '친일파총서' (10) 발간을 계획하고 1994년 완간 계획으로 저술 중 폐기종으로 타계.

1992 임종국 선생 제6회 심산상 수상 (수상저서 : 친일문학론≫≪일제침략과 친일파)

2003 KBS1TV 인물현대사 '임종국'편 방영(연출 김정중)

2005 임종국선생기념사업회 출범(회장 장병화)

2005 보관문화훈장 추서 <편집자 주>

 

 

 

 

 

한민족은 원래 인심이 넉넉한 민족이었는데 일제에 의해 이 지경이 됐다.” 임종국 선생은 나라와 민족을 망친 인물로 이성계, 이완용, 이승만을 꼽았다.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하지 않고 그대로 요동정벌에 나섰다면 대륙의 기질을 가진 우리 민족은 웅대한 민족이 됐을 것인데 이성계가 반역하는 바람에 당파 싸움이나 하는 좀스러운 민족으로 변질되었다고 비판했다.

친일파 이완용은 가렴주구로 번 재산을 지키기 위해 나라를 팔아먹고, 이승만은 독립운동 세력을 말살하고 친일파들이 순식간에 친미파로 둔갑해 득세하면서 나라와 민족이 어떻게 되든 나만 잘살면 된다는 망국의 풍조가 만연해졌다고 탄식했다.

 

임종국 선생의 아버지 임문호는 최린(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3·1독립선언에 참여했다가 친일파로 돌아선 뒤 천도교 최고 지도자가 된 인물)의 수제자였는데 천도교가 친일로 돌아서면서 당수였던 아버지도 친일 노선을 따라가야 했던, ‘변절 친일파의 한 사람이었다.

 

영상 : 뉴스타파 친일문제 연구의 선구자 임종국’ 1~3

 

 

친일파가 득세한 나라에서 친일파를 단죄하는, 그 무겁고 버거운 삶의 무게

 

 

 

 

일제 하의 항일 독립투사들의 삶이 그러했듯이 친일파가 득세한 나라의 역사독립군 임종국 선생의 삶 또한 고단하고 아픈 나날의 연속이었다.

처음엔 벗들이 떨어져 나가고, 그 다음엔 형제가 떨어져 나가고, 또 그 다음엔 돈이 떨어지고, 그 다음엔 아예 쌀과 원고지마저 떨어졌다.

선생의 정신은 오롯했으나 삶의 비수를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찔리고 찔리고 또 찔리면서 선생의 삶은 만신창이가 되어 갔다.

글을 쓰다 피를 토하고, 토한 피를 수건으로 닦아 내며 다시 글을 쓰고, 글을 쓰다가 병마에 쓰러지고 쓰러졌다 일어서 다시 글 쓰기를 반복했지만 고단한 삶을 앞세운 병마는 녹녹치 않았다. 어느날 쓰러져 다시 일어서지 못했다.

과연 선생의 피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삶의 무게가 역사의 무게보다 더 무거울 수 있다

 

 

 

새파랗게 날 선 일본도와 총으로 무장한 일제의 군인과 순사 앞에 선 우리의 할아버지와 아버지, 할머니와 어머니들은 그저 당신과 당신의 가솔들이 무탈하게 이 험악한 고비를 넘어가 주기를 염원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일제의 조선 강탈에 눈 감고 귀 막고 입 다물며 속히 고난의 시기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던 그들에게 서슬퍼런 군부 친일세력의 쿠데타는 감은 눈, 다문 입을 더 굳게 여미었는지도 모른다.

그들이 그렇게 삶의 무게를 역사의 그것 보다 무겁게 받아들인 채, 회피하고 굴종하면서 속히 지나가기를 바라고, 누군가가 나서 끝내 주기를 원했던 그 험악하고 처참한 상황들은 그들의 바람과는 달리 끝나 주지 않았다.

친일파들의 생존과 기득권 유지를 향한 야욕은 조금도 사그라들지 않았고 오히려 더 극악무도하고 교활하게, 치밀하게 사회 전반의 영향력을 장악해 나가고 있다.

 

친일이 친미로 변신하고 매국이 애국으로 탈바꿈되면서 반민족 매국 행위로 쌓아 올린 기득권(권력과 금력)을 영구적으로 세습화하기 위하여 범 친일세력이 똘똘 뭉쳐서 언론을 장악하고 안하무인으로 역사 쿠데타를 일으키고 있다.

순간만 넘기면 홀가분할 줄 알았던 삶의 무게가 날이 갈수록 무거워지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독약을 먹을 수는 없듯이 아무리 삶이 괴로워도 회피하거나 용인할 수 있는 한계는 분명히 있다.

우리는 선대로부터 삶의 무게가 역사의 무게 보다 무거울 순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있을 뿐이다.

 

 

 

역사독립군그 대열의 선봉에 서자

 

현재에 안주하는 안이함과 삶의 무게를 역사의 무게 보다 무겁게 치부하는 비굴함으로는 후대에 더 큰 삶의 무게와 굴종을 남겨 줄 뿐이라는 것이 우리가 선대로부터 받은 교훈이다.

옳은 것을 옳게 하지 못한다면 옳지 않은 것이 그 자리를 메울 것이다.

옳지 않은 것을 방치한다면 어느 사이엔가 온통 옳지 못한 것들에 포위되고 말 것이다.

나를 위하여, 내 가족을 위하여, 아이들과 그 아이들을 위하여 더 이상 비굴하지 말자.

역사독립군의 선봉에 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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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 [스토리펀딩] 2화 부친의 친일 행적까지 기록한 임종국

오마이뉴스 자기 아버지 '친일'까지 기록 일본인 교수 "임종국은 무서운 사람"

Posted by 망중한담

친일파에 대한 발본색원이 없는 한 민족사회의 기강은 헛말

혼이 없는 사람이 시체이듯이 혼이 없는 민족도 죽은 민족이다

 

 

 

'임종국' 민족사를 일으킨 역사독립군

 

일제 강점기에 임시정부의 김구, 의열단의 김원봉을 비롯하여 홍범도, 김좌진, 윤세주, 이회영 등 투철한 조국애와 민족정신으로 항일독립투쟁의 선봉에 섰던 수 많은 독립투사들이 있었다면 친일파들이 득세한 나라에서 죽어가는 민족사를 회생시키기 위한 외로운 고난의 투쟁, 임종국의 삶은 그 어느 독립투사 못지 않은 민족사의 빛이었다.

 

서울대의 이어령, 고려대의 임종국

 

임종국은 대학시절부터 장래가 촉망되던, 미래를 보장 받을 수 있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친일파들의 천하에서 '친일문학론'을 출간함으로써 비열한 풍요가 아닌 의로운 궁핍을 선택했다. 평생 친일 매국의 역사를 찾아 내고 입증하며 죽어 가는 민족혼을 회생시키고자 '고난하지만 빛나는 삶'을 선택했다. 그의 의로운 고난은 수 많은 제2의 임종국, 역사독립군을 양성하고 배출하였으며 오늘도 그 대열은 멈춤 없이 이어지고 있다.

 

임종국의 숫자 '4389'

 

임종국 선생의 업적 중 하나인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친일매국노의 숫자가 바로 4389다. 일제의 주구가 어찌 4389명에 불과하겠냐만, 최대한의 동족적 관용으로 걸러진 첫번째 숫자이며 뒤를 잇고 있는 역사독립군들에게 남겨진 과제이기도 하며, 또한 '임종국선생조형물건립추진위원회' 추진위원 숫자이기도 하다.

 

 

 

거짓 역사, 비틀어진 역사의 피난민으로 살 것인가?

 

일제에 의해 우리 역사는 축소되고 왜곡되고 변질되고 삭제되었다. '조선사편수회'의 목적은 바로 일제를 합리화하고 일제의 주구들을 양성하기 위한 '한반도역사조작'이었다. 조선사편수회를 통해 일제의 비열한 조작에 동조하고 세뇌된 친일 매국 역사학자들에 의해 이 땅의 민족혼은 회생이 불가능한 '의식불명'의 직전까지 내동댕이쳐져 있었다. 여기에 임종국 선생이 민족사의 새 동아줄을 맬 굵고 긴 쇠막대를 박은 것이다. 민족혼의 기사회생이 시작된 것이다.

백년도 못살 인생, 불의에 방관하며 비루하게 살다 갈 것인가, 민족사의 동아줄로 후대의 빛이 될 것인가?

 

이 나라는 친일파의 나라가 아니라 독립군의 나라, 민족혼이 숨쉬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

 

필독을 권함

역사독립군 임종국 1화 '펜으로 싸운 항일레지스탕스 임종국'

 

 

'임종국선생조형물건립' 관련기사

▶내일신문 "조형물 건립은 지금에도 여전한 시대적 과제 푸는 계기"

▶뉴시스 천안에 '친일문제선구자 임종국' 조형물

▶오마이뉴스 '친일 연구 선구자' 임종국 선생 기념조형물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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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망중한담

진정한 의미의 광복은 오지 않았다.

용서하되 잊지 말아야…제2의 독립운동이 필요

   



2016년의 대한민국은 세계 많은 국가들 중에서 가장 모범적이고 역동적이며 성공한 나라다. 무역규모가 수천만 달러에 불과하던 나라가 1조 달러를 넘겼으며, 가장 가난했던 나라가 세계부자클럽이라는 OECD에 가입했다. 정보통신산업은 세계를 선도하고 있으며, 조선산업은 세계 수위를 다투고 있고, 자동차산업은 세계 5위다. 전 세계에서 사용하는 TV 등 가전제품 10대 중 3~4대는 대한민국의 제품이다.

단지 경제적인 부분만 괄목상대한 것이 아니다. 한류 특히 K-POP은 세계 문화의 아이콘이 됐으며,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고 영향력이 있는 음악잡지 미국 빌보드는 J-POP을 제외한 후 그 자리에 K-POP을 넣었을 뿐 아니라 J-POP을 K-POP의 분류에 포함시켜 버렸다.

적어도 빌보드 안에서 일본은 문화적 독자성을 잃어버린 채 대한민국의 식민지로 전락한 셈이다. 이외에도 K-DRAMA나 영화 음악 등 문화민족의 우수성을 세계만방에 널리 떨치고 있다. 세계 3대 국제기구인 세계보건기구(WHO) 이종욱 사무총장과 세계은행(IBRD) 김용 총재 그리고 세계의 대통령이라는 유엔(UN)의 반기문 사무총장까지 모두 한국인이 거쳐 갔거나 재임 중이다.

광복 이후 대한민국이 이룬 성과는 다른 나라에서 존경과 경외의 눈으로 볼 수밖에 없을 놀라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내적으로는 자존감을 잃어버리고 자신감을 상실해 가고 있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올해 1월 1일 0시에 대한민국 국회의원들은 선거구를 상실했다. 여야가 제 눈앞의 이익에 급급해 마지막 시한 전까지 협상을 마무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부문에서 괄목상대하고 있지만 정치는 늘 발목을 잡고 있다.

 

혹자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한 나라 중 가장 모범적으로 정치발전을 이뤄 민주주의를 정착 시킨 나라가 대한민국이라고 한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정치인이 이룬 업적이 아니다. 5•18광주민주항쟁과 6•10민주항쟁 등 국민의 피의 항쟁을 통해 정치인들이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최근 한일 위안부협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대다수 국민들은 정치인을 전혀 신뢰하지 않는다. 그 까닭이 무엇일까? 이명박 정부에서 갑작스럽게 건국절 시비가 일기 시작했다. 우리 헌법은 3•1독립만세운동의 영향으로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법통으로 한다.

영토와 주권을 상실했지만 그렇다고 원시적으로 전혀 없는 것이 아니었다.

아들과 딸을 일시적으로 잃어버렸다고 해서 '자식이 없는 부모'라고 말하지 않는 것과 같다. 일시적으로 빼앗겼다 되찾아 왔으니 대한민국의 법통이 임시정부에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1948년 8월 15일을 건국일로 주장하는가? 여러 논란이 있지만 그 중의 가장 분명한 사실은 그 동안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친일의 후손들이 사회의 기득권이 돼 나라를 좌지우지하기 때문이다.

만일 건국절이 1919년 4월 13일이 아닌 1948년 8월 15일이라면 1919년 4월 13일부터 1948년 8월 15일 사이의 친일파들의 행적은 대한민국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역사 속의 행적이 될 뿐이며, 1948년 8월 15일 정부수립에 적극 관여한 대부분의 친일파들이 대한민국 건국공신이 되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친일은 장롱 깊숙이 넣어버리고 건국공로를 만천하에 드러내 빛내자'는 뜻이다.

그렇다면 왜 오늘날 유력한 정치인들은 국민의 불신을 자초하면서도 이런 말이 되지 않는 파렴치한 행동을 거리낌 없이 하는가? 그들의 조부모가 대부분 이 시기의 친일파들이기 때문이다.

 

광복 71주년을 맞는 지금, 과거 민족반역자들의 반민족행위를 어떻게 징벌하고 청산할 것인가? 이미 대한민국 정치 사회 문화 경제의 중심에 있는 그들에게 조부모의 책임을 어떻게 물을 수 있다는 말인가? 해답은 '친일연구의 선구자 임종국 선생님'에게서 찾을 수 있다.

 

영상 : 뉴스타파 김진혁 PD '친일연구의 선구자 임종국'

 

몇 해 전 뉴스타파에서 임종국 선생님의 일생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해 방영했다.

그는 광복 후 독서클럽에서 '현실의 벽 앞에 도피와 자기분열로 치달았던 작가 이상'에 대해 알게 된다.

그는 이상의 처지와 자신의 처지가 놀랍도록 비슷하다는 것을 깨닫고 이상 연구에 매달려 독학으로 이상 전집(평론집) 3권을 펴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알게 된 당시 현대문학계의 중심에 있는 거장들의 친일행적들을 알고 분노해 친일파들의 행적을 낱낱이 조사하기 시작했다.

친일행적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부친이 친일연설을 한 사실이 드러나자 망설이지만 "내 이름도 넣어라. 그 책에서 내 이름이 빠지면 그 책은 죽은 책이다."는 부친의 격려로 '친일문학론'을 완성한다.

   

누가 임종국 선생님을 친일파의 후손이라 할 것이며 누가 임종국 선생님의 부친을 친일파라 비난할 수 있겠는가?

세계적인 육종학자 우장춘 박사는 명성왕후시해사건에 개입해 천인공노할 패륜을 저지른 우범선의 아들이다. 그러나 누구도 우장춘 박사를 패륜매국노의 자식이라고 비난하지 않는다.

최근 건국절 논란에서 보는 바와 같이 친일파들의 후손은 우리 사회의 각계각층에서 주류를 형성하고 선대들의 친일행적을 감추거나 미화하려고 한다.

그들은 '그 당시에는 어쩔 수 없었다'면서 친일을 옹호하고 있다. 그 말은 '나도 그런 상황이 오면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친일의 뿌리가 그 후손에게 아직까지 생생하게 살아 있음을 보여주는 의미다. 임종국 선생님처럼 조부모의 친일을 참회하고 앞으로 그런 비열한 반민족행위를 저지르지 않으려는 행동이 필요하다.

오늘날까지 우리는 왜 일본에게 식민지시대의 잘못을 반성하라면서 참회와 배상을 요구하는가? 우리 내부에서의 처리도 똑같다. '나'가 아닌 '우리'로 돌아가야 한다. '내 부모의 자식'이 아닌 '이 땅을 살아 온 우리 조상님의 후손'으로 돌아가야 한다.

 

 

멸사봉공의 마음가짐을 갖지 않으면 결코 해결되지 못할 난제다.

내 부모의 수치를 감추기 위해 건국절 시비를 일으키고, 하나를 감추려고 둘을 탄압하려는 친일파들의 후손들은 민족의 이름으로 반드시 단죄해야 한다.

독립운동으로 패가망신하고 자녀의 교육을 소홀히 하여 오늘날에 와서 사회의 하층민으로 전락한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을 위해 친일 후손들은 재산을 출연하고 용서를 구해야 한다.

정부 역시 국가보훈처를 두고서도 정작 독립운동가들의 후손에게는 인색한 정책을 펴지 말고 '독립운동가후손지원청(가칭)'을 두고 친일재산환수와 함께 국가예산으로 독립운동가의 최소 3대까지 교육 • 의료 • 생활을 지원해야 한다.

   

우리 내부에서 스스로 참회와 반성, 그리고 용서를 하지 못하면서 일본에게 요구하는 것은 순리에 맞지 않을 뿐 아니라 다른 나라들에게 볼 낯이 없는 짓이다.

자기 조부모의 매국행위는 감추고 미화하는 정치인들이 일본의 잘못을 지적하며 반성을 요구하는 행위는 옳지 못하다.

 

우리는 프랑스와 이스라엘이 반민족행위를 어떻게 처리했는지 본받아야 한다.


제2의 독립운동은 온전한 나라가 되기 위한 용서와 화해의 운동이다. 잘못을 반성하고 행동으로서 용서를 구하면 그들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주는 운동이다.


이제 제2의 독립운동의 불길이 노도와 같이 일어나야할 때다.


영상 : 민족문제연구소 박한용 연구실장 연설 '제1차 민중총궐기 '국정교과서 반대' 집회 현장'

   

KNS뉴스통신

2016년 01월 04일 (월) 10:56:35

최문 논설위원 vgk@naver.com

 

연관 만악(萬惡)의 근원, 친일파가 판치는 나라

Posted by 망중한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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