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老子)강의가 끝날 때 어머니를 EBS에 모셔서 인사를 드린 적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저를 만날 때마다 감동적 이었다고 하면서 안부를 물어주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지난 45일 향년 95세로 유명을 달리 하셨습니다. 1910년생이니까 20세기를 거의 완벽하게 채우신 분입니다. 우리 민족의 모든 고난과 영광을 역사와 함께 하신 분입니다.





어머니께서 운명하시는 순간에 느낀 것 하나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머니는 혼수상태로 계시다가 깨끗하게 돌아가셨습니다. 숨이 딸깍하는 순간에 육신을 보니까 완벽하게 그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그러나 그 딸깍하는 그 순간의 느낌은 너무도 달랐습니다. (한의학에서 말하는) 살아 움직이는 경락이 순간적으로 사라지고 (얼굴 모습은 그대로였지만) 시신의 얼굴(느낌)은 정말 달랐습니다. 가슴에 귀를 대어보니 심장은 안 뛰고 꾸르륵하는 소리가 났습니다. 그 순간에 펑펑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막내인 저는 엄마 젖을 오래 빨았는데, 초등학교 때까지도 나오지도 않는 젖을 빨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제가 막내기 때문에 (어머니의) 정이 깊었습니다. 나오지도 않는 젖을 빨던 때가 생각났습니다.

인간이 태어나서 죽는 순간까지의 변화는 인간의 생애에 있어서 0.001%의 변화도 안되는 것입니다. 바로 딸깍하는 순간의 변화가 99,999%의 변화였습니다. 죽는 순간의 변화는 너무나 큰 것입니다.

 

인간의 생명이라는 것은 손가락 하나를 움직이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과의 사이에 있습니다. (이것이) 기적 같은 사실입니다.

손가락 하나를 움직이려면 생명의 작동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생명이 있고 없고의 차이라는 것은 그게 전부라는 것입니다.

태어나서 죽는 순간까지의 사이에서 변화라는 것은 너무나 미미한 것임에도, 그 안에서 우리는 싸우고 남을 미워합니다.

생명을 보유하고 있는 한, 인간은 더없이 귀하고 소중하며 평등한 존재입니다. 생명이 있는가와 없는가, 그것이 인간의 전부입니다. 생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 사는 것의 고귀함을 한번 생각해 봐야 되겠습니다.

 

돌아가신 자리에서 시신을 옮기지 않고, 전통적인 예식에 따라 그 양반이 사시던 곳, 즉 집에서 했습니다

그대로 백()이 가라앉고 혼()이 날아 갈 수 있다고 믿기에 시신을 옮기지 않았습니다. 빈소는 영안실을 빌렸지만 시신을 옮기지는 않고 집에서 염을 하고 입관을 했습니다.

 

누나가 어머니의 수의가 든 함을 가져왔습니다.

어머니가 생전에 손수 마련하신 수의 보따리 속에는 80년 전 시집 올 때 입었던 다홍치마와 연두색 저고리가 있었습니다. 어머니께서는 그 옷을 입고 가시겠다는 뜻이었습니다. 어머니의 수의 같은 이런 수의가 우리 민족사의 마지막 수의일 것입니다.

장례식 집사자는 이렇게 정성스럽고 아름다운 수의는 처음 보았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운명했었을 때 자기의 삶의 터전이었던 그 자리에서 염()을 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그 삶의 코스모스에서 혼()은 하늘로 가고 백()은 땅으로 스미게 됩니다.

 

코스모스(Cosmos) 질서와 조화의 구현으로서의 우주

 

저는 평생을 기독교신앙으로 살았으면서, 기독교 철학을 공부했으면서, 기독교 울타리 안에서만 인류 운명을 다룰 수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신앙의 영역을 넓혀갑니다. 기독교도 입장에서 본다면 제 행동이나 사상이 이단자 같을 수 있고 기독교를 부정하는 것 같이 보일 수도 있습니다.

빈소에 스님이 찾아오면 저는 염불을 하게 하고 (염불 못할 것이 어디 있어요?!) 교회에서 조문객이 오면 앉아서 찬송가를 부르게 했습니다. 당연한 거지요.

 

어머니는 당신의 아들 김용옥의 사상에 대해서 개입하신 적이 한번도 없었습니다. 제가 대학을 다닐 때 어떤 사상을 깨닫게 되어 어머니께 이야기를 하면 어머니는 참으로 재미있게 들어주셨습니다. ‘칸트헤켈이니, 무슨 이야기 등 제가 나름대로 깨달은 것을 이야기하면 어머니는 몇 시간이건 들어주셨습니다. 어머니처럼 제 강의를 잘 들어 주신 분이 없습니다.

 

우리 사회는 인간에 대한 평등관이 더 필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어머니는 나처럼 공부를 하신 분이 아닙니다. 대단한 교육을 받으신 분이 아니지만, 내가 아무리 어려운 이론을 개발했어도 그것들을 모두 이해해주셨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그러한 제 모습을 통해서 당신이 교화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한 이야기의 상당부분은 어머니의 신앙을 무너뜨리는 이야기였습니다.

형들은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이단이라 할지 몰라도, 우리 어머니는 100% 나의 사상을 이해하시고 한번도 내가 그릇된 길로 가고 있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없습니다.

 

영상 : 도올 김용옥 - 우리는 누구인가 제15'죽음과호적' 1/4

 

 

진짜 기독교 신앙이라 하는 것은 나를 핍박하는 자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나를 죽이려는 원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사랑)이 없으면 기독교가 아닙니다.

나를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하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선거를 앞두고 있는 시점에서 우리는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만 좋아하고 선거의 당락만 생각한다면 우리 사회의 본질과 대의는 잊어버리게 됩니다.

 

기독교는 증오의 종교가 아니고 사랑의 종교입니다.

구약이 인간에게 증오를 가르쳤다면, 신약은 철저하게 사랑, 무조건 적인 사랑을 가르쳤습니다.

인간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모두가 평등합니다. 숨을 딸깍하는 순간까지도 인간의 고귀한 모습입니다.

 

저는 늙어가고 있습니다. 젊은이가 부럽습니다.

벌써 공부도 제대로 못했는데 벌서 이렇게 늙어 가는구나그렇지만, 결국은 이렇게 살아 숨쉬고 있다는 것 자체가 고귀하고, 이것이 기쁘고, 이것이 고귀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앞으로 동학을 강의할텐데, 동학사상은 오늘의 우리 모습을 이해하는데 아주 중요한 우리 민족의 Bible이라고 생각합니다.

동학사상의 모든 가능성은 동학 이전의 최한기(崔漢綺)라는 사상가에 의하여 그 시대적 정신이 구현되어 있었습니다. 최근에 이 최한기라는 걸출한 사상가에 관한 아주 재미나는 문헌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오늘은 그것을 중심으로 그분의 족적을 한번 보기로 하겠습니다.

 

(조선시대) 양반집 호적등본은 어마어마했습니다. 지금 보시는 것은 정확하게 준호구(準戶口)‘라는 것입니다.

조선왕조를 우습게 보는 사람도 있지만, (사실) 조선왕조는 대단한 나라입니다. 조선시대에는 백성(국민)이 누구인지를 알기 위해 3년마다 호구조사를 했는데, 출생자, 이주자, 사망자를 모두 조사했습니다. 그것을 호적중초(戶籍中草)라 하며, 정식 호적을 만들기 위한 전단계의 기초 자료로써 신청자(호주)가 직접 작성합니다.

 

호주(戶主)라는 말은 일제의 산물이고 당시는 주호(主戶)라고 했습니다.

主戶는 그 호()의 주인이라는 호주의 개념이 아니라 그 집에서 부역, 병역 등의 국역(國役)을 담당할 대표적 인물을 말하는데, 호주라는 말 자체가 남성 중심입니다.

 

미국과 일본은 여자가 결혼하면 여자의 성()이 없어지는데 한국은 여자 성이 없어지지는 않습니다.

 

주호(主戶) : 단순한 호주의 개념을 넘어서 국역(國役)을 담당

 

우리나라의 호적제도는 완벽하게 양성 평등, 즉 남녀평등제도입니다.

(이 부분에서 우리나라는) 17세기 중엽까지만 해도 거의 남녀가 평등한, 세계적으로 드문 남녀 평등 사회였기 때문에 남편이 죽으면 부인이 승계했습니다.

19세기 말엽 최한기의 호적에도 남자 쪽 4(四祖)가 나오고 그 다음에 여자 쪽 4(四祖)(함께) 나옵니다.

 

호적중초(戶籍中草)는 집에서 작성해서 향청(鄕廳 지방의 말단 기관=주민센터)에 제출하는데, 최한기는 서울에 살았기 때문에 한성부에 제출합니다.

이 당시의 한성부는 서울의 호적만 관리하는 것이 아니고 전국의 호적을 모두 관리했습니다. 제출된 호적문서는 호적고(戶籍庫 호적을 보관하는 곳)에 보관되었기 때문에 인구가 많은 곳의 호적고는 규모가 컸습니다.

 

호적단자(戶籍單子)를 제출하면 받았다는 (접수) 도장을 찍고 관청에서 보관했습니다. 호적에는 주소가 적혀 있었고, 과거(科擧) 보러 갈 때나 송사(訟事) 등에 초본이 필요하면 관청에 가서 필사본을 발급받을 수 있었습니다.

 

함풍(咸豊 중국의 연호) 2(1852) 모월 한성부에서 발급.

(당시 최한기의 주소지) 한성부 (漢城府) 서부(西部), 양생방(養生坊), 송현계(松峴契), 삼통(三統), 삼호(三戶)에 사는 생원(生員) 최한기(崔漢綺). (() > ())

 

호적단자(戶籍單子)는 호주가 손수 써서 향청(鄕廳)이나 한성부(漢城府)에 제출하는 호적원문입니다.

한성부(漢城府=서울)는 태조 5년에 1396년 정도전이 552방으로 나누고 그 이름도 만들었는데, 조선말까지 유지되었습니다.

 

(과거시험의) 문과에는 대과와 소과가 있었습니다.

소과는 생원시, 진사시로 나뉘었는데, 초시(初試)를 거쳐 회시(會試)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갈 자격을 얻는 자를 생원(生員)이라고 했습니다.

 

崔漢綺 호적 서문

崔漢綺 年五十 癸亥生 本朔寧

通政大夫 昆陽郡守 兼晋州鎭管兵馬同僉()節制使 光鉉

生父 學生致鉉 學生配觀 曾祖 成均生員之嵩

外祖 本安東 娶朴氏 齡五十三 庚申生 籍蕃南 父 學生宗赫 學生經源 曾祖 學生師完

外祖 通訓大夫 行魯城縣監 兼公州鎭管兵馬節制徒尉 李集明 本慶州 率有幼學柄大 年三十四 己卯生 娶申氏 齡三十七 丙子生 籍高齡 率奴婢秩 五月 年庚子生 不知 母婢一分 一所生

최한기는 나이가 50이며, 계해생이고, 본관은 삭녕이다.

아버지는 통정대부이며 곤양군수와 진주진관병마동첨절제사(무관 벼슬)를 겸직한 광현이다.

사조의 생부는 학생 치현이고, 조부는 학생 배관이다. 증조부는 성균관 생원이며 이름은 지숭이다.

외조부는 김박 이고 (이 당시 호적 기록에 사용된 종이는 호적지라고 해서 질이 좋지 않았는데, 특히 이 종이는 질이 나쁜 것이기 때문에 이름의 가운데 자가 없어졌다) 본관은 안동이다.

아내는 박씨이고 나이는 53(최한기 보다 3세 위)인 경신생이며 본관은 반남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학생 종혁, 조부는 학생 경원이다.

 

영상 : 도올 김용옥 - 우리는 누구인가 제15'죽음과호적' 2/4

 

 

증조는 학생 사완이고, 외조는 통훈대부로, 로성 현감과 공주진관병마절제도위를 겸직한 이집명이다. 본관은 경주이며. 슬하에 유학 병대가 있는데 그의 나이는 34로 기묘생이고 아내는 신씨이며, 나이는 37, 병자생이고 본관은 고령이다.

 

노비를 여러 명 거느리고 있는데 차례로 말하면, 여자 노비는 이름이 오월이며, 나이는 경자생이고, 그녀의 아비는 알 수 없으며, 어미의 이름은 일분이고 소생이 하나 있다.

 

기유(己酉 1849) 호구상준자(戶口相準者)

이 호적은 3년 전의 호구와 비교하여 같다는 의미

 

최항(崔恒 1409~1474)

삭녕 최씨(朔寧崔氏) 중 유명인사. 조선 초기의 문신(文臣).

<용비어천가> <동국정운> <훈민정음 해례> <경국대전> 등 찬진.

 

최한기의 호적에 들어있지 않은 아들과 딸들은 반드시 딴 곳에 등재되었을 것입니다. 당시 국가(조선)에서는 호구가 많아야 세수(稅收)가 많았기 때문에 등재하는 쪽에서는 될 수 있는 대로 (호적을) 줄이려 했던 반면에 조정에서는 늘리려 했습니다. 이런 것은 조선조 호적제도의 문제점이엇습니다.

 

조선조의 호적은 양반이라는 신분을 과시하고 과거 때 사용되는 것이기도 하지만,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양반들의 재산인 노비문서도 되었기 때문에 호적에는 노비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적었습니다.

 

노비(奴婢) ()=남자 종, ()=여자 종.

 

양반들은 노비의 숫자를 증가시키기 위하여 천자수모법(賤子隨母法)을 제정했습니다.

고려시대인 1039년 처음 제정된 이 법은 고려시대부터의 풍습이 된 악법(惡法)이었습니다.

어미가 천인이면 비록 아비가 양인이라 할지라도 어미의 신분을 따라 천인이 된 것인데, 노예의 숫자를 늘리려는 데에 이 법의 목적이 있었습니다.

양반들에게는 좋은 법이었으나 국가적으로는 손해였습니다. 노비로부터는 세금을 거두지 않았기 때문에 노비제도는 조선왕조의 큰 문제점이었습니다.

 

노비제도를 폐지하려고 해도 양반들이 반대했습니다.

(조선왕조에서) 노비제도가 없어진 것은 동학농민혁명 때인 갑오경장 이후 부터입니다. 갑오경장(甲午更張) 당시에, 동학혁명의 요구 중 하나는 노비제도의 폐지였는데, 갑오경장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노비제도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17세기 내지 18세기에는 노비의 인구가 확실하게 전체 인구의 절반을 넘었습니다. 오늘 여기에 계신 여러분들 중 절반이 노비의 후손들입니다. 그것은 속일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와서 양반 상놈 따지는 것은 전부 사기입니다.

 

종들은 아버지를 모르고 태어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노비 문서의 성명은 대부분이 이뿐이=, 개똥=, 칠돌=七乭(돌 밑에 을의 음을 따서 씀) 등등 아무렇게나 지은 이름이다.

 

영상 : 영상 : 도올 김용옥 - 우리는 누구인가 제15'죽음과호적' 3/4

 

 

조선시대의 공문서 결재(決裁)는 한성의 당상관(堂上官 정삼품-지금의 국장급 이상)이 수결(手決)로 했습니다. 서양보다 우리가 먼저 수기(사인 私印)을 했던 것입니다. (도장은 일제의 산물)

그러나 한성 같은 데서는 민원이 많아 사인을 도장화(圖章化)하여 사용했습니다. 최한기의 호적에 나오는 결재 사인(私印)은 수결이 아니고 사인을 도장화한 것입니다.

 

사조(四祖)란 부(), (), 증조(曾祖), 고조(高祖)를 말하는데, 호적에는 먼저 남자 쪽 사조(四祖)가 나오고 그 다음 여자 쪽 사조(四祖)가 나옵니다.

호주인 남자 쪽이 사망했을 때, (지금은 아들이 승계하지만) 고려시대를 거쳐 17세기 중엽까지, 즉 장자상속의 유교 종법사회 이전까지는 완전히 남녀평등이었기 때문에 여자가 승계(상속)를 했습니다.

이것은 세계적으로 드문 일입니다.

 

최한기는 44살에 문과에 급제했습니다.

부자간의 연령 차이가 16살이었는데, 16살 연하의 아들이 그의 평생 친구였습니다. 책을 저술하면서 아들과 담소하고 아들이 아버지의 글을 필사하면서 사이 좋게 살았다고 합니다.

 

많은 노비를 거느리고 살았던 최한기의 말년은 엄청나게 가난해져서 저서를 쓰는데 종이가 없어서 쌀을 외상으로 빌려 종이를 사왔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최한기가 망한 이유는 책을 너무 많이 사느라 가산을 탕진했기 때문입니다.

당시에 신간 서적이 나오면 한양(서울)의 모든 서점이 최한기에게 가져갔다고 합니다. 최한기는 이처럼 책을 사기 위해서 집도 팔고 패가망신을 했다고 하는데, 다음의 일화를 읽으면 책에 대한 그의 애착을 알 수 있습니다.

 

或言購書多費者(혹언구서다비자) 惠岡曰(혜강왈) 假令此書中人(가령차서중인) 竝世而居(병세이거) 雖千里(수천리) 今吾不勞以座致之(금오불로이좌치지) 購書雖費(구서수비) 不猶愈於齎而適遠乎(불유유어재리이적원호)

어떤 사람들은 내가 책을 사는데 돈을 많이 쓴다고 하는데, 가령 이 책 속의 사람이 수 천리 떨어져 살고 있다면 그 먼 길을 갔다 와야 할 것인데 책을 사면 돈이 들지언정 나는 지금 힘 안 들이고 앉아서 그 사람을 볼 수 있으니 얼마나 행복한가!

 

구서(購書 책 구입)에 가산을 탕진한 최한기는 말년을 초라하게 보내다가 죽었지만 그는 죽을 때까지 학문에 대한 열정 속에서 살았던 분이며, 이런 분들의 노력으로 우리는 이렇게 개명된 세상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영상 : 영상 : 도올 김용옥 - 우리는 누구인가 제15'죽음과호적' 4/4

Posted by 망중한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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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이냐 臣이냐'

오늘날 우리사회는 대의(大義)를 생각하지 않고 목전의 소리(小利)만을 추구하고 있다.

 

- 서두에 -

이번 강의로 나 '도올'도 많이 알려졌습니다. 전에는 못 알아보는 사람이 많았는데 요즘은 거의 알아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로부터 봉변을 당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드려야겠습니다. 만나는 사람들이 사인을 해 달라고. 사진을 찍자, 악수를 하자고 요구합니다. 거절했더니 욕질을 하고 갔습니다. 담배 갑에다가, 길바닥의 종이를 주워서 사인해 달라고도 합니다. 이런 것들이 나에게 혼돈을 주고 있습니다.

 

나는 정치인이나 탤런트가 아닙니다. 그들은 한 표라도 더 얻기 위해서, 또 인기를 얻기 위해서 그렇게 해야 하지만 학자는 일반인들로부터 받아 낼 것이 없습니다. 우리 사회가 도올 김용옥을 한 사람의 학자로 인정한다면 학자 대접을 해주어야 합니다.

선비는 여러분들이 관심을 갖는 과제로 책을 보고, 논문을 쓸 때가 가장 행복합니다.

선비는 정치가나 연예인들과는 근본적으로 사회적 관계가 다르게 설정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이 사회가 가고자 하는 도덕적인 양심만 지키면 되는 것입니다.

 

나는 이 사회의 인기에 영합해서 사는 사람도 아니고, 인기를 얻기 위해서 여기에 나와 있는 것도 아닙다. 사방에서 강의를 해달라고 요청했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가장 효율적으로 내 사상을 전달하기 위한 방법을 택해서 여기에 나온 것뿐이지, 인기를 얻기 위해서 나온 것도 아니고, 권력을 탐해서 나온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이 오해하면 내일이라도 당장 그만 둘 수 있는 사람입니다.

 

존천리거인욕 (存天理去人慾)

'천리를 보존하고 인욕을 버린다'는 <주자학>의 제1명제를 좋아한다.

 

또 <중용>에 이런 말이 있다.

 

군자계신호기소부도 (君子戒愼乎其所不賭) 막견호은 (莫見乎隱) 고군자신기독야 (故君子愼其獨也)

군자는 그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경계하고 삼가고, 그 들리지 않는 곳에서도 매우 두려워하는 것이다. 숨어 있는 것이라도 보이지 않는 것이 없으며, 작은 것이라도 나타나지 않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군자는 그 홀로 있을 때에 삼가는 것이다.

 

군자는 홀로 있을 때 반성하고 행복할 줄 알아야 한다.

 

대통령을 탄핵하고, 이것이 뭔가 말이다. 노무현 개인은 흔들 수 있어도 국민을 대의한다는 사람들이 그 자리 자체를 흔들어서는 안 된다. 나라 꼴이 어떻게 될지 걱정이다. 우리 사회가 반성해야 한다. 학교 나올 것 다 나오고 지도자라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 국민들 앞에 나와서 "죄송하다. 무언가 잘못된 것을 다같이 빨리빨리 털고 화합해서, 새로운 나라를 만드는데 합심해서 나가겠다."고 해도 시원치 않을 판에!

 

우리 사회가 반성을 해야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이 땅에 태어난 지식인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송대(宋代)의 주자나 고려 말엽의 삼봉, 조선중엽의 퇴계(退溪 이황 李滉의 호) 등 우리나라의 오늘이 있게 한 모든 학자들이 했던 것과 같이 결국은, "인간 본연의 심성으로 돌아가자"라는 호소 밖에 할 것이 없다.

 

앞으로 동학을 강의하게 되는데, 동학 때 많은 사람이 고통 받고 피살되고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는 처절한 살육전이 벌어져 처참하게 죽어 갔던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20세기를 맞이했으며, 그 피의 대가도 없이 일제 식민지로 들어갔던 것이다.

 

※ 우금치 전투

1894년 11월 초, 일본군의 신식장비 앞에 10만 동학 대군 중 5000명만 살아남았다는 처절한 격전. 이 전투를 고비로 갑오동학 혁명은 실질적으로 종료되었다.

 

지난 (16대) 대선의 결과를 보자.

내가 생각하기에는, 구한말 때는 선거라는 민의가 표출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없었다. 지금도 (선거 같은) 민의 표출의 제도적 장치가 없었다면 동학의 몇 천 배가 되는 폭동이 일어날 지경이었다. 그 냉엄한 현실을, 역사의 수레바퀴를, 되돌릴 수는 없다.

 

어떠한 경우에도, 이것은 노무현의 문제가 아니고 어떤 거대한 당과 아무 관계도 없다. 우리 민중들은 역사의 수레바퀴가 뒤로 돌아가기를 원하지 않는다. 무언가 더 깨끗하고, 더 합리적이고 더 정직한 사회로, 모든 사람들이 다 같이 협력해서 살 수 있는 사회로 가기를 원하고 있다.

 

영상 : 도올 김용옥 - 우리는 누구인가 제11강 '王이냐臣이냐'

 

정도전은 일종의 신권(臣權)정치, 즉 유교이념으로 무장된 엘리트 신하집단이 통치의 주체세력이 되는 정치형태를 지향했다. 고려 말의 사회가 워낙 썩었기 때문에 뜻 있는 사람들, 신진 유림이 생겼다.

고려 말은 정도전, 정몽주, 권근 등 탁월한 대석학들이 많은 사회였다. 격동기에는 인물들이 많이 태어난다.

정도전은 당시의 지식인들을 대변하는 한 사람으로서, 모든 지식인들이 공통적으로 원하는 '신하들의 합리적인 상식'에 의해서 국가가 운영되기를 바랐다.

 

왕 한 사람이 모든 걸 지배하는 사회에는 항상 문제가 노출되었다.

 

정도전 같은 탁월한 신하가 리더십을 가지고 있을 때에는 신권정치가 가능했을 것이나, 그의 구상은 너무 과격했다. 왕권을 극도로 제한했다.

중앙집권적 절대왕정(Absolute Monarchy)의 화신인 이방원의 입장에서 보면 "혁명은 누가 했는데 왕권을 무시하고 신권을 달라고 하느냐?"였던 것이다.

이방원은 간단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왕권의 집중을 강조했다. 그 정도가 좀 지나쳤다. 그는 왕권을 제약할 수 있는 요소들은 모조리 죽였다. 이방원이 만큼 (사람을) 많이 죽인 사람은 없다. 자기 형제, 처남 4명도 죽였다. 자기의 사돈 심은은 세종 즉위 초 영의정이었으나 권세를 부리자 가차 없이 사사되었다. 그러나 이방원의 피의 숙청과 왕권의 강화 속에서만 성군 세종이 등장할 수 있었다. 이방원의 가차 없는 숙청 때문에 세종은 성군정치를 펼 수 있었고, 세종 등극 이후는 군말이 없었다. 성균관 학자들도 꼼짝 못하고 순종했다.

 

위대한 성군은 항상 뒤끝이 나쁘다. 세종, 세조 때의 명신들은 대부분 정도전을 신봉한 권근(權近) 밑에서 배출되었다. 따라서 이들 대의 정치는 기본적으로 정도전의 틀대로 갔던 것이다.

 

조선조의 2대성군은 세종과 정조다.

정조는 대학자였으며 세종을 능가할 정도였다. 또 정치가였다. 세종 이후에 정치가 문란 해졌고, 정조 후에도 정치가 문란 해졌다. 완벽한 왕은 자기만으로 끝난다. 고도의 학식을 소유한 성군이었지만 신권에 다시 눌려 당대의 영화스러운 모습을 계승시키는 데는 실패했다. 만개한 후 스러지는 꽃과 같았다.

 

조선왕조의 역사는 신권과 왕권의 시소(See-Saw)게임

 

문종(세종의 맏아들)은 세종 때 한글창제에 주도자가 되었다. 대학자였다. 세종의 아들 중에 가장 문장이 뛰어났었다. 문종은 등극 전에 공부만 했다. 결과로 문약해서 등극한 후 2년 3개월 만에 3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단종이 계승했으나 정치권력은 김종서, 황보인에게 집중되고 또 다시 신권이 강화되었다.

 

조선왕조를 단순한 왕권의 역사로 보는 오류를 범해서는 아니 된다. 정도전이 왕권을 제약한 이래로 왕은 함부로 권력을 휘두를 수 없는 제도 속에 묶여 있었다.

세조는 왕권의 강화를 위해서 단종을 빙자해서 공신, 신하들을 모조리 쫓아낸다. 세조(수양대군)의 아들은 병약했다.

예종은 등극한 후 1년 2개월 만에 죽는다. 사람들은 세조가 단종을 죽인 업보라고 생각했다.

 

성종은 세조의 손자였다. 성종은 대단한 인물이었다. 성종주변에는 그를 압박하는 권신(Clown)들이 비교적 적었다. 그래서 새로운 사림들이 많이 정치에 진출할 수 있었다.

조선왕조의 문물은 세종 때 시작이 되어 반석을 다졌고, 그 반석위에 집을 지은 임금은 성종이었다. 성종의 치세기간(1469-1494, 25년간 즉위)에 조선왕조의 문물제도가 완성되었다. <경국대전> <동국여지승람> <동국통감> <삼국사적요> <동문선> <오례의> <악학궤범> 등이 모두 성종 때 편찬되었다.

 

성종은 공부를 좋아하고 배우기를 좋아했기 때문에 선비들을 끌어 모았으며 이 때 영남의 골수 성리학자들이 대거 진출했다. 이때 사림(士林)이라는 것이 형성된다. 영남사림의 거두 김종직(金宗直:1431~1492) 등 문신을 가까이 하면서 권신들을 견제했다. 다시 성종대왕의 신권이 강화되었다. 임사홍, 유자광을 유배시키고 신진세력들의 진로를 열어주었다. 성종은 끼가 있는 왕이었다. 말년에 가면 밤에 미복으로 궁궐 바깥으로 나가 로맨스도 벌렸다. 여기에서 성종비, 윤씨의 질투가 생겨 왕의 얼굴에 흠집을 내고 해서 폐비가 되었다. 그녀의 아들이 연산군이다.

 

조선 초기에 사림(士林)이라는 말과 훈구파(勳舊派)라는 말이 나오는데, 훈구파란 세조의 찬위를 도와 정치적 실권을 장악한 공신 집단, 훈국공신(勳國功臣)을 말한다. 이들은 정도전 계열이다. 이들에 대항하는 세력이 성리학을 중심으로 한 사림(士林)이다. 혁명가 정도전의 개혁세력도 권력을 잡으면 기득권자가 되고 훈구세력이 되었다. 이들 기득권자는 보수 세력으로 전락했다. 개혁세력도 기득권자가 되면 보수 세력으로 전락한다.

 

※ 김종직 (金宗直 1431~1492)

경상도 밀양출신의 사림파 거두. 항우(項羽)가 초나라의 의제(義帝)를 폐한 것을 단종에 비유해서. 단종을 조위하는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지었다. 이것이 발단이 되어 연산군 때 무오사화(戊午史禍)가 일어났다.

 

폐비 윤씨의 아들인 연산군은 두 개의 사화를 일으켰다. 사화란 "사림이 화를 입는다." 는 의미이다. 무오사화만 사초(史草)가 발단이었기 대문에 사화(史禍)라 고 부른다. 사화(士禍)란 공신, 외척, 인척 세력이 사림을 견제한 사건이다.

 

연산군은 영민하고 예술적 기질이 있고 학식도 있었다. 초기에 정치를 잘했는데, 사림에서 간섭이 계속 심해지자 그들을 숙청하게 되었고, 연산군 때 일어난 양대 사화가 무오사화(戊午史禍)와 갑자사화(甲子士禍)이다. 갑자사화 때에는 연산군이 그의 어머니 폐비 윤씨의 사건을 알게 되면서 그와 관련된 사람을 모조리 죽인다. 이때 김종직의 제자이며 조광조의 선생인 김굉필도 사형 당한다.

 

사림을 쫓아내던 훈구파들이 연산군을 폭군으로 몰아 쫓아내고 중종이 등장한다. 바로 지금 드라마 '대장금'에 나오는 중종이다. 드라마 속의 중종과 장금의 관계는 물론 픽션이다. 그러나 중종이 57세로 세상을 떠나기 직전, 내의원들이 약제를 상의하고 있는데 "내 증세는 여의 장금이 안다"라고 전교하는 결정적인 한 줄의 글이 <중종실록>에 실려 있다.

 

중종은 훈구파들에 의해 괴롭힘을 당하자 갑자사화 때의 피해자들인 사림을 다시 끌어들이게 되는데, 그 중 대표적인 사람이 조광조(趙光祖)다.

 

※ 조광조 (趙光祖 1482~1519)

김굉필의 유배지에서 2년간 성리학을 공부하고 젊은 나이에 사림파 영수가 되어 발탁된다. 34세에 등용되어 대사헌에 올랐다가 기묘사화로 38세에 죽는다.

 

조광조는 김굉필로부터 엄격한 성리학을 배웠다. 그는 항시 의관을 정제하고 먹는 것도 단정하게 먹고, 성격이 칼 같은 사람이었다. 도덕적으로 완벽하게 산다는 사람이었다. 그는 당시의 조선조를 요순상태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도덕적인 열정에 불타고 있었다. 이것을 흥지치(興至治 지극히 이상적인 나라를 일으킨다)라 불렀다.

 

(조광조에 대한) 퇴계와 율곡의 평가가 재미있다.

퇴계는 조광조를 극히 존중하는 반면, 율곡은 공부가 덜된 상태여서 융통성은 없고 이상만 높고, 현실에 어두운 자로 평가했다. 조광조는 급진적이고 엄격했다. 위훈자(僞勳者) 72명을 적발해서 공신록에서 삭제하고 궁궐 내에 설치되어 있었던 소격서(昭格署)를 철폐하게 했다. 유교적인 합리주의 국가에서 미신을 믿어서 되겠는가? 밤낮으로 왕에게 읍소해서 철폐시켰다고 한다.

 

※ 소격서 (昭格署)

고려 때 부터 설치된 궁정 내 도교의 제식을 거행하는 관서. 우물에 비친 북두칠성을 보고 점을 치기도 한다. 1518년 조광조에 의해 철폐되었다.

 

위훈삭제(僞勳削除), 중종반정을 도모한 공신들의 과장된 공훈을 없애버려야 한다고 주청해서 76명이 공훈록에서 삭제되었다.

 

조광조를 역사적으로 비판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러나 조광조의 급진적이고 엄격한 국정은 문제가 생기고 반발이 심했다. 그는 조선왕조에 도덕군자의 새로운 기풍을 불어넣어준 사람이긴 했으나 중종은 그를 내치고 말았다. 조광조는 능주로 귀양을 갔다가 곧 이어 사사되었다.

 

조광조의 절명시 (絶命詩)

애군여애부(愛君如愛父) 우국약우가(憂國若憂家)

임금을 내 어버이처럼 사랑했고 나라를 내 집처럼 걱정했다

 

조광조는 조선왕조에 칼날 같은 도덕군자의 기풍을 세웠고, 죽어서도 신진사림의 상징이 되었다. 조광조가 투옥되었을 때 유생 일천여명이 광화문에 모여 무죄를 호소했다.

 

중종 이후 조선왕조의 역대 사림들, 지식인들은 스스로가 조광조의 후예라는 것을 자처하고 있다.

조광조의 순수한 도덕군자의 이상을 추구하면서 커 나온 대표적 인물이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이다. 그는 연산군 때부터 선조 때까지의 조선중기 대학자였으며, 조선왕조가 유교국가로서의 가닥이 잡히게 했다.

 

이퇴계는 대단한 사람이다. 그는 주자 이후 동아시아 최고의 성리학자로서 평가받고 있다. 이퇴계의 시대에 들어 와서 우리나라의 유교가 제자리를 잡아갔다. 즉, 정도전으로부터 시작된 조선의 유학은 이퇴계에 이르러 조선 사람들의 내면적인 삶의 철학이 되었다. 나(도올)의 학문적 성향이 기론(氣論) 쪽이었기 때문에 젊었을 때는 이퇴계를 싫어했었는데 공부를 해갈수록 그에게 매력을 느꼈다. 그의 학문적 태도에는 존경스러운 면이 많다.

 

1558년 10월, 58세 노인이었던 퇴계가 지금의 국립대 총장 격인 성균관 대사성으로 재직하고 있을 때, 새로 급제한 고봉(高峰) 기대승(奇大升)이 찾아왔다. 당년 32세의 청장년이었던 기대승을 만난 58세의 퇴계는 그의 학문에 충격을 받고 그에게서 배웠다. 이퇴계는 마음이 열린 학자였다. 평생 손아래 사람에게 배우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 기대승 (奇大升 1527~1572)

퇴계시대의 대학자. 본관은 행주. 1558년 문과에 급제한 후 성균관 대사성까지 오른다.

 

기씨(奇氏)는 희성이나 기대승과 같은 행주 기씨성을 가진 여자가, 궁녀로 원나라에 가서 마지막 황제 순제의 황후가 되어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이것을 계기로 고려에서도 기씨가 세력 기반을 얻었다.

 

이퇴계와 기대승의 대면

 

기대승

사단발어리 (四端發於理) 칠정발어기 (七情發於氣)

사단은 리(理)에서 나오고, 칠정은 기(氣)에서 나온다

 

이퇴계

사단리지발 (四端理之發) 칠정기지발(七情氣之發)

사단은 리의 발현이고 칠정은 기의 발현이다.

 

리기(理氣)는 인간의 마음에서 발현되는 두 개의 주체가 된다.

 

기(氣)→발(發)→칠정(七情), 리(理)→발(發)→사단(四端)

주자학에서는 리(理)는 순선(純善)한 것이기 때문에 이상적 이념일 뿐 구체적 작위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리발(理發)은 주자학에서도 이단적인 생각이다. <주자어류>에도 리발(理發)이라는 말은 있으나 퇴계의 주장과는 어감이 다르다.

 

기대승 (반문)

맹자왈(孟子曰) 惻隱之心(측은지심) 仁之端也(인지단야)

 

단(端)=측은지심(惻隱之心)=정(情)≠성(性)

단(端)은 측은지심(惻隱之心)이고 정(情)이기는 하나 성(性)은 아니다. 인의 단초로 보인다.

 

사단 (四端)

측은지심(惻隱之心)=인(仁), 수오지심(羞惡之心)=의(義)

사양지심(辭讓之心)=예(禮), 시비지심(是非之心)=지(智)

단(端 tip)이란 본체가 들어난 하나의 단서이다. 단(端)은 성(性)이 아니라 심(心)이다.

 

기대승

비칠정지외복유사단야 (非七情之外復有四端也)

칠정의 바깥에 다시 사단이 있는 것이 아니고

사단(四端) 내칠정중발이중발이중절자지묘맥야(乃七情中發而中發而中節者之苗脈也)

사단은 희노애락(喜怒哀樂)의 감정이 발현되어서 제대로 상황에 딱 들어맞아서 도덕적으로 보일 때 우리는 그것을 사단이라 한다. 사단과 칠정은 나누어질 수 없다.

 

사단(四端)은 사덕(四德=인의예지仁義禮智)이 아니다. 기대승의 학문이 정확하다고 본다.

 

이퇴계

부사단정야(夫四端情也) 칠정역정야(七情亦情也) 균시정야(均是情也)

무릇 사단은 정이고 칠정도 정이고, 둘 다 같은 정이다.

 

정에는 사단과 칠정이 있는데 그 소종래(所從來), 즉 감정의 근원을 캐 들어가 보면 사단(四端)은 본연지성, 리(理)이고 칠정(七情)은 기질지성, 기(氣)이다.

 

사단(四端)이건 칠정(七情)이건 똑같이 이기(理氣)가 될 수 없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사단과 칠정을 똑같다고 인정해버리면 사단이라는 인간의 도덕 원리가 칠정에 의해 제멋대로 움직이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인간의 도덕성에 대해서 자의적인 해석을 내리게 된다. (사단칠정론은) 인간 심성의 도덕적인 아름다움을 종교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퇴계는 정치에 뜻을 두지 않았음에도 조정의 부름을 많이 받았다. 사림과 왕정 간에는 갈등이 있기 마련인데 출사하지 않으려는 사림을 출사시킬 때 왕정의 정통성이 인정되기 때문이다.

 

※ 소수서원 (紹修書院)

퇴계가 제자들을 가르친 곳. 퇴계가 풍기 군수로 있을 때 명종으로부터 편액(扁額)을 받음. 이 서원은 하버드대학 보다 93년 앞서는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대학이다.

 

퇴계 다음에는 율곡이 등장한다. 이율곡의 철학은 퇴계와는 계통이 다르다. 율곡은 고봉(高峯 기대승의 호)의 논리를 계승했다.

율곡은 이발(理發)을 인정치 않았다. 율곡사상은 기발(氣發)만을 인정했다. 퇴계 사상은 순수한 인간의 도덕의지를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퇴계의 사상은 관념화되기 쉽다. 이발은 이상주의적 인간관이고, 기발은 현실주의적 인간관이다.

 

기발적인 인간은 잘못도 저지르게 되고 감정적으로 행동하게도 되는 현실적인 인간이다. 인간의 현실적인 모습을 강조한다. 율곡과 기대승 같이 기발을 숭상하는 사람들은 현실정치에 적극참여하고 사회 개혁에도 참여한다.

이율곡은 10만양병설을 주장했다. 사회적 관심도 많았다. 현실적인 인간의 모습을 중시했다. 철학도 이발보다 기발을 강조했다. 현실적인 인간을 중시한다.

 

조선왕조의 관료 중심의 정통유학은 율곡 중심으로 간다. 율곡 밑에서 나온 사람이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다.

기호학파가 형성되고 조선사상사의 주류를 형성한다. 이퇴계는 비주류이다. 그러나 우리는 퇴계에 무게를 많이 두고 있다. 퇴계학파가 비주류라 할지라도, 그의 도덕적인 철저함과 인간의 내면을 깊숙하게 보는 주리론으로 현실주의적인 주기론자들이 점점 기울어져 왔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경향은) 조선왕조가 잘 되어가는 것이 아니라 관념화되어 간 것이다.

조선 성리학은 말로를 맞이하게 된다.

 

※ 송시열 (宋時烈 1607~1689)

호는 우암(尤庵). 조선후기 기호학파, 노론의 영수. 장희빈이 왕비로 책봉되는 기사환국 때 죽임을 당함.

 

조선 후기에 오면 이러한 주기(主氣)계열의 현실파 학풍이 체계적으로 퇴화되어 관념화되는 현상이 생긴다. 그리면서 성리학은 생명력을 잃고 현실감각을 상실해 간다. 즉 관념화되고 종교적인 도그마(Dogma)로 간다. 구한말에 와서는 현실 대처능력을 잃어버린다. 그래서 조선왕조가 멸망하게 된다. 이것이 내가 간단하게 정리한 조선 사상사의 흐름이다.

 

(그러나) 이렇게 쉽게 말하기는 어려운 주제이다. 조선사상사를 이런 시각에서 보면 된다는 것이다. 세계사상의 흐름 속에서 우리 조선 성리학의 의미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이것을 다음 시간에 여러분에게 정확하게 다시 한번 짚어드리겠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강의이다. 이런 강의는 다른 데서 절대로 들을 수 없다.

 

우리 민족은 어떻게 살아온 사람들이고 이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 사상을 매개로 해서 어떻게 뼈저리게 노력해 왔는가를 깨달아야 할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 민족에 대한 아주 본질적인 프라이드를 가져야 한다. 허튼 수작들 그만하고 무언가 정도를 향해서, 바른 길을 향해서 우리 역사가 나아가야 한다.

 

 

 

 

Posted by 망중한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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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위(正寶位)는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의 '총론'에 해당한다.

말하자면 오늘날의 헌법 전문과 유사한 것으로써 건국의 정당성과 통치철학을 담고 있다.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은 유가와 법가의 철학을 창조적으로 결합한 조선통치질서의 모범(憲法)이다.

학생들이 강의를 듣지 않고도 성적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우리 사회의 '정의로움의 결여'로 나타난다.

교육은 '이용'이 아니라 '실천'이다.

중앙대학교 첫 강의에서 학생들에게 준 모티브는 '생각하라'는 것이었다. '생각하고 또 생각하라'는 과제를 주었다.

중앙대학교 강의가 진행되는 중에 동양고전의 정수를 뽑아 중앙대훈(中央大訓)을 정해서 학생들에게 주었다.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 하늘이 명하는 것이 나의 본래 모습이요,

솔성지위도(率性之謂道) 나의 본래 모습을 따르는 것이 나의 길이요,

수도지위교(修道之謂敎) 나의 길을 닦는 것이 나의 배움이다....

강의에 임하면 학생들이 이 중앙대훈을 읽게 하고 나서 '노자' 강의를 시작했다.

중앙대학교에서의 강의를 통해 한국의 젊은이들의 위대한 힘을 발견했다.

한국의 젊은이는 어린 것 같고 버릇없는 것 처럼 보이지만, 순수하고 편견에 사로잡혀 있지 않으며 다양한 문화를 개방적으로 흡수할 수 있다.

정치혁명에 이어 우리사회는 앞으로 교육혁명이 일어 나야만 한다.

이런 강의를 하고 있는 것도 우리 사회에 희망을 주고, 우리 자신의 숨어 있는 가능성을 발견하고, 이런 것을 통해서 우리의 젊은 싹들이 앞으로 우리의 미래를 어떻게 이어갈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 바로 우리가 삼봉 정도전을 공부하는 소이연(所以然)이 되는 것이다.(所以然 : 까닭이라는 의미로써 신유학에서 많이 사용되는 말)

삼봉은 정보위에서 주역을 인용하되 본래의 순서인 生→位→仁을 바꾸어서 位→生→仁으로 하였다.

易曰 聖人之大寶曰位, 天地之大德曰生, 何以守位曰仁

'주역'에 이르기를 성인의 큰 보배는 위(位)요, 천지의 큰 덕은 생(生)이다. 무엇으로써 그 위를 지킬 것인가? 인(仁)이라 하였다

天子享天下之奉, 諸侯享境內之奉, 皆富貴之至也

천자는 천하사람의 받듦을 향유하고, 제후는 (자신이 지배하는)국경 내의 사람들의 받듦을 향유하니, 이 모두가 부귀의 지극함이다.

賢能效其智, 豪傑效其力

현능한 자들이 그 지혜를 바치고, 호걸들은 그 힘을 바치며,

民庶奔走, 各服其役, 惟人君之命是從焉

일반 서민들은 분주히 살며, 그 맡은 바 직분에 충실하게 복무하며 오직 인군의 명령에만 따를 뿐이다.

以其得乎位也, 非大寶而何

이것은 위를 얻었기 때문이니, 큰 보배가 아니고 무엇이랴

<位(position) = 大寶(great treasure)>

민주주의도 位가 없는 질서가 아니라 位가 正名을 얻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민주란 모든 조직의 형태를 규정하는 말이 아니라 인권의 기본을 보장하는 추상적 장치인 것이다. 비민주적인 조직들이 각자 효율성 있게 운영될 데에 그 사회의 민주적 원리는 순조롭게 작동될 수 있다.

정보위란 그 位를 바르게 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天地之於萬物, 一於生育而已

천자가 만물을 대하는 것은 그 생육에 있어 한결같을 뿐이다.

蓋其一原之氣, 周流無間, 而萬物之生, 皆受是氣以生

만물의 근원인 기가 끊임없이 주류(순환)하며, 만물이 태어나는 것도 모두 이 기를 받아 생성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氣라는 것은 만물을 생성하는 방향으로 운행되어야 한다.

유교는 인간이 만물의 영장인 까닭을 도덕적 본성(moral nature)으로 본다.

洪纖高下, 各形其形, 各性其性

어느 것은 굵고, 어느 것은 가늘며, 어느 것은 높고, 어느 것은 낮으니, 모두 제각기 다른 형태를 지니고, 제각기 다른 저마다의 본성을 갖는다.

故曰天地以生物爲心, 所謂生物之心, 卽天地之大德也

그러므로 말하기를 천지는 만물을 생하는 것으로써 마음을 삼는다 하였으며, 이 만물을 생하는 마음이 곧 천지의 큰 덕이라는 것이다.

살아 있다는 것은 마음이 있다는 것이며, 天地는 生하므로 (천지에도) 마음이 있을 것이며 그 天地의 마음은 모든 것을 生하는 마음일 것이라는 생각)

 

人君之位, 尊則尊矣, 貴則貴矣

人君(지배자)의 지위라는 것은 높기로 말하자면 한없이 높은 것이요, 귀하기로 말하자면 한없이 귀한 것이다.

然天下至廣也, 萬民至衆也

그러나 아무리 인군의 지위가 존귀하다고 해도 天下 처럼 넓은 것은 없고, 백성은 너무도 많다.

一有不得其心, 則蓋有大可慮者存焉

단 한 순간만이라도 그 백성의 마음을 얻지 못한다면, 참으로 크게 걱정할 만한 일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정도전은 주려(周廬)라는 문헌에 입각하여 재상의 지위를 확보하고 왕권을 제약하려 했다. 오늘날의 입헌군주제(constitutional monarchy)에 상응하는 발상이었다)

下民至弱也, 不可以力劫之也; 至愚也, 不可以智欺之也

천하의 지극히 많은 백성은 지극히 약하게 보이지만 힘으로 겁줄 수 없는 것이요, 지극히 어리석게 보이지만 지혜로써도 그들을 속일 수 없는 것이다.

得其心則服之, 不得其心則去之

마음을 얻으면 그들은 복종하지만, 마음을 얻지 못하면 그들의 마음은 곧 떠나 버린다.

去就之間, 不容毫髮焉

(백성의 마음이) 떠나고 붙는 것이 터럭 만큼의 여유도 허락하지 않는 것이다.

 

중국 역사에서 맹자(孟子)는 지배자들에게 경원 시 된 책이었다. 그래서 외롭게 파묻혀 있었고 주석도 거의 없었다. 논어, 맹자, 대학, 중용이 四書로 된 것은 12세기 朱子의 사서집주(四書集注) 이후의 사건이다. 四書는 중국 고전의 형태가 아니다.

• 孔子 : 심미적 : 예술가 • 孟子 : 사회적 : 혁명가

맹자는 이른바 성선설(性善說)을 통해 민의 본성은 선한 것이라 하였고, 그렇기 때문에 군주는 민의를 따라야 하는 것이라는 논리를 확립했다.

정도전은 '맹자'를 통하여 (사회혁명의) 의식화가 되었다.

중국 제선왕(齊宣王 재위 B.C 319~B.C 301)이 맹자에게 탕과 주 시해 사건에 대해 질문하자 맹자가 답변한다.

 

적인자(賊仁者) 위지적(謂之賊)

적의자(賊義者) 위지잔(謂之 謂之殘)

잔적지인(殘賊之人) 위지일부(謂之一夫)

문주일부주시(聞誅一夫紂矣) 미문살군야(未聞弑君也)

 

仁을 해치는 자를 도둑놈이라고 하고

義를 해치는 자를 잔학한 놈이라 하며

이 도둑놈과 잔학한 놈을 일컬어 일개 필부라 한다.

일개 필부인 주를 죽였다는 소리는 들었어도 임금을 죽였다는 소리는 아직 듣지 못했다

仁과 義를 해치는 자는 왕이 아니라 일개 필부에 지나지 않으므로 시해가 아니라는 의미로써 맹자의 사상이 드러나 있다.

정도전은 25세 때 영주 봉화에서 시묘살이를 하면서 맹자를 탐독했는데, 그 과정에서 심중에 혁명사상이 자리 잡았던 것이다.

서양사상은 기본적으로 증오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진정한 혁명적 사상이 부족하다. 또한 진정하게 과격한 사상도 부족하다.

모든 래디칼리즘 (radicalism 급진주의)은 동양사상에 내재한다.

 

然所謂得其心者 非以私意苟且而爲之也 非以違道干譽而致之也 亦曰仁而已矣

人君以天地生物之心爲心 行不忍人之政

그러나 이른바 백성의 마음을 얻는다는 것이, 사사로운 의도로써 구차스럽게 해서는 안되는 것이요, 도에 어긋나게 사람들의 칭찬을 구하여 이르게 해서도 안되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을 얻는 방법은 오직 인仁일 뿐이다. 군주는 반드시 천지생물지심으로 그 마음을 삼아야 하고, 사람이기에 차마 해치지 못하는 인내의 정치를 행하여야 한다.

使天下四境之人 皆悅而仰之若父母 則長享安富尊榮之樂 而無危亡覆墜之患矣

守位以仁 不亦宜乎

천하의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기쁘게 하여 임금을 우러러 보기를 친부모처럼 한다면 그러한 임금은 편안한 부유함과 고귀한 번영의 즐거움을 오래 누리게 될 것이며 위태롭게 망하거나 전복되어 추락하는 우환이 없을 것이다. (그러니) 仁으로써 그 位를 지킴이 마땅치 아니한가.

 

恭惟 主上殿下 順天應人 驟正寶位

삼가 생각컨대 주상전하께서는 하늘을 따르고 사람에 응하여 신속히 보위를 바르게 하셨으니

知仁爲心德之全 愛乃仁之所發

仁하심이 심덕의 온전함이 되고 어여삐 여기심은 仁이 발한 것임을 알겠노라.

於是正其心以體乎仁 推其愛以及於人 仁之體立而仁之用行矣

이에 그 마음을 바르게 하여 仁을 체득하고, 어여삐 여기심을 미루어 온 백성들에게 미쳤으니, 인의 體가 섰고 인의 用이 행하여지는구나.

嗚呼 保有其位 以延千萬世之傳 不信歟

오호라 그 位를 보지하여 천만세로 뻗쳐 전하여지리라는 것을 어찌 믿지 않을 수 있으리오.

 

재상은 왕을 보좌하여 방국을 균하게 한다(均防國). 삼봉의 가슴을 사로잡은, 국가질서의 가장 중요한 테마는 바로 이 均이었으며, 그것은 바로 평등주의적 이상(egalitarian ideal)이었다.

 

 

정보위(正寶位)

易曰 聖人之大寶曰位 天地之大德曰生 何以守位曰仁

'주역'에 이르기를 성인의 큰 보배는 위(位)요, 천지의 큰 덕은 생(生)이다. 무엇으로써 그 위를 지킬 것인가? 인(仁)이라 하였다

天子享天下之奉 諸侯享境內之奉 皆富貴之至也

천자는 천하사람의 받듦을 향유하고, 제후는 (자신이 지배하는)국경 내의 사람들의 받듦을 향유하니, 이 모두가 부귀의 지극함이다.

賢能效其智 豪傑效其力

현능한 자들이 그 지혜를 바치고, 호걸들은 그 힘을 바치며,

民庶奔走 各服其役 惟人君之命是從焉

일반 서민들은 분주히 살며, 그 맡은 바 직분에 충실하게 복무하며 오직 인군의 명령에만 따를 뿐이다.

以其得乎位也 非大寶而何

이것은 위를 얻었기 때문이니 큰 보배가 아니고 무엇이랴.

 

天地之於萬物 一於生育而已

천자가 만물을 대하는 것은 그 생육에 있어 한결같을 뿐이다.

蓋其一原之氣 周流無間 而萬物之生 皆受是氣以生

만물의 근원인 기가 끊임없이 주류(순환)하며, 만물이 태어나는 것도 모두 이 기를 받아 생성되는 것이다.

洪纖高下 各形其形 各性其性

어느 것은 굵고, 어느 것은 가늘며, 어느 것은 높고, 어느 것은 낮으니, 모두 제각기 다른 형태를 지니고 제각각 다른 저마다의 본성을 갖는다.

故曰天地以生物爲心 所謂生物之心 卽天地之大德也

그러므로 말하기를 천지는 만물을 생하는 것으로써 마음을 삼는다 하였으며, 이 만물을 생하는 마음이 곧 천지의 큰 덕이라는 것이다.

 

人君之位 尊則尊矣 貴則貴矣

人君(지배자)의 지위라는 것은 높기로 말하자면 한없이 높은 것이요 귀하기로 말하자면 한없이 귀한 것이다.

然天下至廣也 萬民至衆也

그러나 아무리 인군의 지위가 존귀하다고 해도 天下 처럼 넓은 것은 없고, 백성은 지극히 많다.

一有不得其心 則蓋有大可慮者存焉

단 한 순간만이라도 그 백성의 마음을 얻지 못한다면, 참으로 크게 걱정할 만한 일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정도전은 주려(周廬)라는 문헌에 입각하여 재상의 지위를 확보하고 왕권을 제약하려 했다. 오늘날의 입헌군주제(constitutional monarchy)에 상응하는 발상이었다)

下民至弱也 不可以力劫之也 至愚也 不可以智欺之也

천하의 지극히 많은 백성은 지극히 약하게 보이지만 힘으로 겁줄 수 없는 것이요, 지극히 어리석게 보이지만 지혜로써도 그들을 속일 수 없는 것이다.

得其心則服之 不得其心則去之

마음을 얻으면 그들은 복종하지만, 마음을 얻지 못하면 그들의 마음은 곧 떠나 버린다.

去就之間 不容毫髮焉

(백성의 마음이) 떠나고 붙는 것이 터럭 만큼의 여유도 허락하지 않는 것이다.

 

然所謂得其心者 非以私意苟且而爲之也 非以違道干譽而致之也 亦曰仁而已矣

人君以天地生物之心爲心 行不忍人之政

그러나 이른바 백성의 마음을 얻는다는 것이, 사사로운 의도로써 구차스럽게 해서는 안되는 것이요, 도에 어긋나게 사람들의 칭찬을 구하여 이르게 해서도 안되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을 얻는 방법은 오직 인仁일 뿐이다. 군주는 반드시 천지생물지심으로 그 마음을 삼아야 하고, 사람이기에 차마 해치지 못하는 인내의 정치를 행하여야 한다.

使天下四境之人 皆悅而仰之若父母 則長享安富尊榮之樂 而無危亡覆墜之患矣

守位以仁 不亦宜乎

천하의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기쁘게 하여 임금을 우러러 보기를 친부모처럼 한다면 그러한 임금은 편안한 부유함과 고귀한 번영의 즐거움을 오래 누리게 될 것이며 위태롭게 망하거나 전복되어 추락하는 우환이 없을 것이다. (그러니) 인仁으로써 그 위位를 지킴이 또한 마땅치 아니한가

 

恭惟 主上殿下 順天應人 驟正寶位

삼가 생각컨대 주상전하께서는 하늘을 따르고 사람에 응하여 신속히 보위를 바르게 하셨으니

知仁爲心德之全 愛乃仁之所發

인仁하심이 심덕의 온전함이 되고 어여삐 여기심이 인仁이 발한 것임을 알겠노라.

於是正其心以體乎仁 推其愛以及於人 仁之體立而仁之用行矣

이에 그 마음을 바르게 하여 인仁을 체득하고, 어여삐 여기심을 미루어 온 백성들에게 미쳤으니, 인의 체體가 섰고 인의 용用이 행하여지는구나.

嗚呼 保有其位 以延千萬世之傳 不信歟

오호라 그 위位를 보지하여 천만세로 뻗쳐 전하여지리라는 것을 어찌 믿지 않을 수 있으리오.

 

삼봉 정도전

 

Posted by 망중한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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