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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하는 지성 - 시사

한국에서, 모두에게 공평한 ‘출발선’은 사라지고 있다.

불평등에 대하여

오늘 과연 얼마나 많은 이들이 희망과 설렘으로 새해를 맞을까.

이 사회를 이끄는 정계, 종교계, 재계, 문화계 각 부문 지도자들은 신년사를 통해 행복한 세상이 열리기를 기원한다. 보통 시민들도 오늘만은 힘들고 지친 삶에서 벗어나는 새해를 꿈꾸고는 한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우리들의 새해 소망은 배신당했다.

2015년 새해 첫날의 꿈이 바로 어제 12월31일 깨졌음을 확인했듯이 2016년 12월31일도 그런 날이 되리라는 불안한 예감을 감출 수 없다.

2016년은 고립된 시간도, 미지의 시간도 아니다. 올해 어떤 일이 있을 것인가는 지난해, 그리고 지난 3년에 의해서 좌우될 것이다. 또한 이명박 정부 이래 8년간 반복된 것을 다시 목격하는 해가 될 수도 있다. 더 이상 새해 첫날을 새로운 시작이라고 말해서는 안된다. 그러기에는 우리의 희망이 너무 닳아 버렸다. 사회의 균형을 무너뜨린 외환위기 이후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시대도 오늘의 한국을 만드는 데 일조했다. 더 멀리는, 민주화 이후 28년간 이 사회를 규율했던 질서도 2016년에 영향을 미친다.

새해에 계속될 고통들은 이렇게 켜켜이 쌓인 과거의 결과물이다.

그래서 새해란 저 깊은 지층 위에 얹혀진 작은 돌멩이와 같은 것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한국사회는 여러 번의 정권 교체에도 하나의 경로를 따라갔다. 돌멩이 하나 치운다고 달라지지 않는다. 그러니 무슨 일이 있더라도 놀랄 것 없다.

새해에 목격될 고통들은 1년 전, 3년 전, 8년 전, 38년 전부터 이중삼중으로 겹쳐지면서 단단히 굳어진 하나의 구조적 모순에서 비롯되는 다양한 현상에 지나지 않는 것들이다. 그 모순이란 이제 우리에게 너무 익숙해져버린 바로 그것, 불평등이다.

불평등은 어떤 지표로도 가릴 수 없는 한국의 실상이다. 최상위층 1%의 부는 전체 부의 18%로 미국에 이어 세계 2위를 기록하고 있다. 30대 그룹 상장사 임원 연봉은 직원 평균 연봉의 10.8배이다. 저임금 노동자 비율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미국 다음으로 높은 25.1%이다. 남녀 임금차, 노인 빈곤율은 OECD 34개국 중 1위이다.

대로에서 남이 버린 박스를 가득 실은 채 위태롭게 리어카를 끌고 가는 노인을 본 일이 있는가. 그런 이들이 왜 점점 더 자주 눈에 띌까 하고 궁금해한 적이 있는가. 왜 내 주변의 젊은이들은 제대로 된 일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는지 의문을 품어 본 적이 있는가. 그게 내 주변뿐 아니라 모든 이들의 주변 젊은이들이 대개 그럴 거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는가.

이렇게 보고 듣는 일상 경험들이 사실은 지표보다 더 생생하게 불평등한 세상을 증언해 준다.

왜 거리에 가련한 청춘들이 저렇게 넘쳐나는지 더 이상 묻지 말자. 우리는 이미 그 이유를 알고 있다. 청년실업 문제는 청년 문제가 아니다. 노인이 가난에 허덕인다고 노인 문제가 아닌 것과 같다. 사회로 처음 진입하는 좁은 문 앞에 저들끼리 부대끼는 청춘들의 아우성이 노인 때문이 아니듯, 노인의 절반이 가난한 것 역시 청년 때문이 아니다.

부자는 부자를 낳고, 가난은 가난을 낳는 세습 사회에서 빈부 격차는 세대를 가리지 않는다. 부모의 부를 대물림하지 못한 불운한 이들은 어느 세대에 속하든 사회 밑바닥에서 평생 힘겨운 삶을 살아갈 각오를 해야 한다. 흔히 세대갈등, 지역갈등, 이념갈등과 같은 여러 갈등이 혼재하는 것처럼 말하지만 사실 그 모두 빈부갈등, 즉 불평등의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 다른 갈등들이 과잉 부각된 것은 많은 경우 불평등 문제를 가리기 위해 정치적으로 동원한 결과이다. 하지만 지금 그런 식으로도 은폐되지 않을 만큼 불평등은 심각해졌다.

불평등은 교육을 통한 계층 상승의 기회를 앗아간다.

불평등은 중소기업 종사자, 여성, 지방 출신, 비정규직에게 더 많은 노력을 요구하지만 더 적은 기회를 준다.

희망은 바닥나고 있다. 자본의 효율적 배분을 저해하고, 계층 유동성을 막고, 사회 갈등을 조장, 경제성장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 건강, 인간의 자존감도 해친다. 균형을 잃은 채 늙고 병들어 가는 한국 사회와 경제에 필요한 활력을 빼앗아 간다. 보수적 관점에서도 한국이 비효율적인 사회가 되었다면 그것 역시 불평등 때문이다.

민주화는 우리에게 자유를 주었지만 그 자유의 뒤에 도사리던 불평등의 위험성을 가르쳐 주지는 않았다.

주기적인 선거, 정권 교체 가능성만으로 충분하다고 믿었다. 국가가 후원하는 시장의 자유가 이 사회에 소득 격차, 사회 양극화, 노동시장의 이중구조를 불러낼 때도 우리는 방심했다. 그 대가로 우리는 불평등해졌고 이제 그 불평등이 자유까지 제약하고 있다.

이런 나라가 아이 낳아 키우기 좋은 곳일 수 없다. 이제 한국은 호모 사피엔스가 서식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땅이 되었다.

이런 절망감은 불평등이란 지층의 무게에 짓눌린 한국 사회를 하루아침에 구출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더욱 깊어진다. 이게 한국 사회 앞에 가로 놓인 진짜 현실이다.

불평등의 정도가 너무 심하면 불평등에 대한 인내심도 커진다. 절망과 체념 때문이다. 불평등의 수준이 상대적으로 낮아야 불평등을 관용하는 정도 또한 낮아진다. 불평등의 역설이다.

 

한국은 어느 쪽인가. 요즘 시민들은 각자도생하고 있다. 불평등 세상에서 살아남으려고 서로 경쟁한다. 정부는 탈규제, 민영화, 감세, 재벌 중심 성장과 같은 불평등 확대 정책을 지속한다.

기우뚱한 이 사회를 바로잡을 분배 정책과 재분배 제도에 무관심하다. 정치는 거대 양당 체제, 승자독식의 선거제도에 안주한 채 소외된 서민의 목소리를 배제한다. 지속적인 투표율 하락이 말해주듯 시민들도 점차 정치로부터 떠나고 있다. 체념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2015년은 헬조선이니 금수저 흙수저니 하는 우울한 언어가 횡행한 해였다. 지속 가능성을 잃어가는 사회 현실을 걱정한다는 뜻이다. 청년 실업, 복지 문제에 대한 관심도 높다. 시민들이 다 포기한 채 무조건 참고 견디기로 마음먹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체념과 거부의 경계선에 가까이 있는 것 같다. 정치가 다시 중요해지는 순간이다. 불평등은 정치의 결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어떤 정치냐에 따라 불평등 완화의 길이 열리기도 하고, 닫히기도 한다. 지금 한국 정치가 바로 그런 갈림길에 있다. 낙관적이지는 않다. 그동안 정치는 불평등 해소에 전력투구하지 않았다. 어떤 측면에서는 불평등 체제를 재생산했다. 이런 체제는 민주주의라기보다 소수가 지배하는 과두 체제라 해야 옳다.

민주주의는 1인 1표라는 평등의 원리에 기반을 둔다. 반면 시장은 1원 1표의 논리를 따른다.

가진 만큼 권리가 부가되는 것이다. 이는 시장을 우상화할 경우 민주주의가 파괴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걸 막는 게 정치의 과업이다. 다수의 이익을 위해 시장이 초래하는 불균형을 바로잡는 능동적 역할을 해야 할 주체가 바로 정치이고, 정당이고 정부다.

4월 총선을 한다. 총선은 불평등을 바로잡고 모두 승리하는 길로 갈지 시험하는 무대다.

오랜 시간 축적된 불평등은 어느 한쪽의 역량만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난적이다. 만일 이 싸움에서 진다면 패자는 우리 모두가 될 것이다. 총선이 정치의 실패를 확인하는 마당이 아니라, 정치의 비전을 펼치는 장이 되려면 여와 야, 보수와 진보 모두의 노력과 힘이 필요하다. 특히 집권세력의 역할이 중요하다. 집권세력은 광복 70년을 자랑스러운 승리의 역사로 인식하고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통해 승리자의 관점을 반영하려고 한다. 집권세력이 70년의 역사를 이끈 주체로서 자부심을 갖고 있다면, 70년이 남긴 그늘인 불평등 체제에 대해서도 책임을 느껴야 한다. 래리 바텔스 미국 밴더빌트 대학교수는 1984년 로널드 레이건에게 투표한 보수주의자다. 그러나 그는 <불평등 민주주의>라는 저서를 통해 미국이 공화당 정권 때 더 불평등해진 사실을 규명, 보수의 각성을 촉구했다.

불평등에서 탈출하고자 한다면 그 첫걸음은 불평등하다는 사실을 냉정하게 인식하는 것이다.

그 다음 불평등을 용인하지 않겠다는 거부의 자세, 불평등이 초래한 문제와 맞서 싸우겠다는 열정, 의지가 필요하다.

한국이 불평등에 패배하는 위기의 순간은 불평등이 해소할 수 없는 문제라는 생각이 퍼질 때이다. 불평등에 익숙해지고 그걸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일 때이다.

불평등은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이 땅에 사는 이들의 삶을 억압하는 명백한 실체이다.

 

경향신문 사설

입력 : 2015.12.31 19:50:36

수정 : 2015.12.31 19:5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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