心과 性

불교는 마음의 종교다.

 

불교에서는 종교적 문제가 인간의 마음에 있다고 생각한다. 마음에 대한 이론이 굉장히 발달한 종교다. 세계 어느 종교보다 마음에 대한 이론이 정교하다. 오늘은 정도전에 의한 불교의 마음 이론을 비판하려 한다. 제목이 불씨심성지변(佛氏心性之辯)으로 되어있다.

(원시불교의 핵심은 무아론(無我論)이다. 무아(Anatman)는 모든 존재론적 실체를 거부한다. 하느님<God>도 나<Ego>도 모두 심적현상<心的現象 : Psychological Phenomenon>일 뿐이다.)

 

고려말엽의 사상가요, 혁명가요, 조선왕조 창건의 주역이었던 정도전은 불씨심성지변(佛氏心性之辨)을 통해서 불교의 심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비판하였다. (불씨심성지변 : 불교의 심(心)과 선성(善性)을 분별함)

 

심자(心者) 인소득어천이지생기(人所得於天以之生氣)

성자(性者) 인소득어천이지생리(人所得於天以之生理)

심(心)이라는 것은 인간이 하늘로부터 얻어서 생한 기요, 성이라는 것은 인간이 하늘로부터 얻어서 생한 리(理)라고 했다.

 

조선 사상의 이기론(理氣論)이 여기에서부터 태동한다. 조선사상의 이기론은 우주의 근원을 리(理)에 두느냐, 기(氣)에 두느냐에 관한 조선사상사의 논쟁을 의미한다.

 

심(心)=기(氣) 심은 우리가 하늘에서 얻어 가진 기,

성(性)=리(理) 성은 우리가 하늘에서 얻어 가진 리

 

동양적인 우주관에서의 세계, 즉 천지(天地)는 기로 구성되어 있다.

예를 들면 여기의 책상, 펜, 고로쇠 물 등은 모두 기(氣)다. 기가 움직이는 법칙을 리(理)라고 한다.

(고로쇠 물 : 고로쇠나무에서 뽑은 수액인데, 봄에 이것을 마시면 생명이 약동하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다는 좋은 물이다.)

 

자연의 질서를 탐구하는 것이 과학이다.

인간세계를 둘러싼 환경의 객관적 리(理)를 자연의 법칙(Law of Nature)이라고 한다. 우리는 상식적으로 리가 기 바깥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기를 떠난 리를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 자연과학적 태도(Scientific Attitude)이다.

 

리가 기 속에 있다고 한다면 리는 기에 지배당하고 종속될 뿐이다.

성리학자들은 기에 종속되지 않는 리의 독자성을 확보하고자 했다. 그것이 인간을 명령하는 도덕적 법칙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리는 인간의 도덕적 품성과 관련되어 있다. 인간이 도덕적으로 사는 것은 기(물질)만 있는 것이 아니고 리(법칙)가 있기 때문이다.

 

성리학에서는 자연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가 연속된 것으로 이해되었다.

존재(Sein)와 당위(Sollen)가 같은 차원에서 이해되었다. 인간의 심성에 내재하는 리가 곧 인의예지(仁義禮智)였다. 性에 理가 내재한다고 생각한 이론을 우리가 성리학(性理學)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맹자의 성선(性善)은 인간의 도덕적 성품의 선천성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기보다 리를 중시한 성리학은 맹자 성선설(性善說)의 적통을 잇고 있는 것이다.

 

심(心)은 인간의 의식현상 일반(Consciousness)을 말하고, 성(性)은 마음의 도덕적 핵심(Moral Core)을 의미한다.

우리는 성선설과 성악설을 이야기하고 있다. 성(性)은 원래적으로 선(善)하다. 이것은 맹자의 성선설이고 '성은 원래적으로 악하다'라고 하면 순자의 선악설(善惡說)을 연상한다.

 

순자왈 (荀子曰) 인지성악(人之性惡) 기선자위야(其善者僞也)

순자는 '인간의 성은 좋지 않아서 선하다는 것은 거짓'이라고 했다.

 

순자는 인간을 이기적 욕망의 주체로 파악하였다.

자연 상태에서 인간은 쟁탈(爭奪), 호색(好色), 호리(好利), 음란(淫亂)에 빠질 뿐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인간이 성을 따르게 된다면 세상은 어지러워진다고 한다.

 

기선자위야(其善者僞也)

선하다고 하는 것은 인위적인 노력일 뿐이다. 인간의 성이 악하기 때문에 예의라는 것이 필요하다. 예의라는 것은 성(性)이 만들어내는 인위적인 것이다.

 

범예의자(凡禮義者) 시생어성인지위(是生於聖人之僞) 비고생어인지성야(非故生於人之性也)

무릇 예의라고 하는 것은 성인의 위선에서 나온 것이며 모든 사람의 성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순자>

 

인간이 힘써야 할 것은 적위(積僞)다.

적위란 인위적 노력을 쌓아가는 것이다. 그것이 공부(工夫)이다. 위(僞)는 거짓, 위선이 아닌 인위적(人爲的)이라는 의미의 위(僞)로 해석해야 한다.

 

위기이생예의(僞起而生禮義)

(인위적인 노력이) 일어나서 예의가 생겼다. 예의가 인간 본성 속에 있는 것은 아니다. <순자>

 

성선(性善)과 성악(性惡)은 결코 인간의 본성을 선(God)과 악(Evil)으로 규정하는 논의가 아니다.

 

 

<영상 '심과 성' 1/4>

 

노자 2장에

천하개지미위미(天下皆知美之爲美) 사오의(斯惡矣)

천하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하는 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것은 추할 수도 있는 것이다.

아름다운 미(美)⇔추할 오(惡). 오(惡)는 어디까지나 미(美)의 반대말이다. 선(善)의 반대말은 아니다.

 

개지선지위선(皆知善之爲善) 사불선의(斯不善矣)

모든 사람들이 선한 것을 선하다고 알고 있는데 그것은 불선(不善)일 수도 있다.

선의 반대어는 악(惡)이 아니고 불선(不善 :선하지 않음)이다.

 

동양인의 관념 속에서는 실체로서의 악(惡)은 근원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악은 불선(不善)일 뿐이다.

동양인들의 관념 속에 천사와 악마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서양인들에게는 천사가 있고 악마가 따로 있다. 선과 악으로 2분되어 있다. 동양에서는 선의 반대는 불선이지 악은 아니다. 중국 고전에서의 악(惡)이라는 글자는 모두 추할 오(惡)로 읽어야 한다. 악(惡)으로 읽는 것은 서양언어와 서양종교의 영향일 뿐이다.

 

성선설(性善說)의 반대말은 성악설(性惡說)이 아니고 성불선설(性不善說)이라야 한다. <순자>의 성악(性惡)은 성악이 아니라 성오(性惡)다.

순자는 성악설을 말한 적이 없다. 순자의 성오설(性惡說)은 성선(性善)을 전제하지 않으면 성립할 수 없다. <순자>의 성불선설도 성선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래야만 인간의 교화가 가능 한 것이다.

 

'순자'의 글에서

인지성악(人之性惡) 필장대예의지화(必將待禮義之化) 연후개합어선야(然後皆合於善也)

사람의 성악은 예의 교화를 거쳐 성선이 된다.

 

동양사상에는 인간의 본성이 본래적으로 '선:善'하니 '악:惡'하니 하는 논의는 없다.

인간의 심(心)에는 두 측면이 있다. 하나가 정적(情的) 측면(욕망의 세계 : Sentiments)이고 다른 하나는 성적(性的) 측면(순수한 선 : Moral Nature)이다. 근세 유학의 문제(과제)는 심통성정(心統性情), 즉 심(心)이 성(性)과 정(情)을 통괄하는 것이다.

 

심(心), 성(性), 정(情)은 셋으로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의식현상이다.

인간의식의 작위적 주체는 어디까지나 心이다.

심은 일심(一心 : 하나)인데, 동전의 양면처럼 어떤 때는 심으로 나타나고, 어떤 때는 정으로 나타난다. 정도전이 (볼 때) 불교도 심, 마음의 종교이다. 그래서 마음에는 정적인 측면이 끼여 있기 때문에 문제가 많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성(性)은 능동적 촉발성(觸發性)을 갖지 않는 비작위적(非作爲的) 순수한 도덕적 이상(Moral Ideal)일 뿐이다.

심(心) : 정(情)↔성(性), 기(氣)↔리(理), 용(用)↔체(體), 인욕(人慾)↔천리(天理)

 

고려왕조는 불교사회면서 개인주의적(Individualistic)사회였다. 조선왕조는 유교사회로써 공동체적(Communalistic)사회였다.

불교에서는 나 혼자 천국이 가능하고 해탈도 가능하고 성불도 가능하다. 불교는 철저하게 개인주의적인 종교이다. 마음을 다스려서 번뇌로부터 벗어나면 그것이 곧 해탈이요, 성불이다. 스스로 마음을 다스리고 개별적으로 행한다.

 

불교이론으로는 정치이론을 만들기 어렵다. 불교에서는 모두가 개별적으로 놀기(행하기) 때문이다. 불교사회도 잘만 돌아가면 제대로 의미가 있는 것이지만 고려 말에는 문제가 나타났다.

새로운 과거시험제도를 도입했다. 굉장히 이상적인 제도다. 과거제도란 시험을 통해서 권력을 주는 제도인데, 중국에서 나왔다. 중국문명의 유니크(Unique)한 시도였다. 법조문만 외워서 합격하면 권력을 갖게 되는 오늘날의 고시와 같이 당시의 중국에서는 '서경(書經)' 등을 외워서 합격하면 권력을 갖게 되었다.

 

인재를 등용하는 방법에는 시험(Examination)과 추천(Recommendation)이 있다. 과거제도에서는 객관적인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영상 '심과 성' 2/4>

 

사회가 잘 돌아갈 때는 추천제도도 좋겠지만 추천제도는 주관적이며 문란해지는 문제가 있었다. 반면에 시험제도는 객관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고려 때부터 중국에서 과거제도를 도입했다. 신라시대에는 화랑제도가 있었으나, 과거제도는 없었다. 과거제도에서 종이쪽지 하나로 권력을 준다는 것은 불안했다.

 

이러한 과거제도에 대해서 주자는 관료 제도를 시행함에 있어 관리들에게 권리를 주는 동시에 철저한 윤리의식을 의무지우지 않으면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주자학의 목표는 사대부 관료 계층에 철저한 도덕적 가치를 심어주기 위한 것이다. 주자철학은 기본적으로 공무원 교육철학이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정보다는 성을 더 강조했다. 인의예지(仁義禮智)가 갖추어진 인간이다. 그러기 때문에 性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감정적으로 움직이는 것은 기(氣)요, 이성적으로 움직이는 것은 리(理)다. 주기론자(主氣論者)는 감정에 대해 관용적(Liberal)인 반면 주리론자는 감정에 대해서 엄격하다. 조선왕조에서는 주리(主理)의식을 강조했다. 사대부들의 엄정한 윤리의식을 강조했다. 주자학에서는 '네가 원래 가지고 있는 리(理)가 너의 기(氣)를 지배하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불교에도 심(心)과 성(性)에 대한 논의가 많이 있었다.

불교에서도 심(心)은 본성을 말한다. 그 본성을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 즉 인간 본래의 성은 청정한 것이라고 불렀다. 인간의 마음에는 정심(淨心), 즉 깨끗한 마음과 염심(染心), 즉 더러운 마음이 있다. 그러나 결국 이 정심(淨心)과 염심(染心)은 한마음(一心)이다.

 

불교는 번뇌즉보살(煩惱卽菩薩), 즉 번뇌가 곧 보살이라고 한다. 불교는 심과 성을 이원화(二元化)시키지 않는다. 불교의 원래 이론은 좋은 것인데 잘못 해석하면 항상 도덕적 해이를 가져올 수 있다. 불교는 리적(理的)인 세계의 진여문(眞如門)과 기적(氣的)인 세계의 생멸문(生滅門)으로 이원화(二元化)시키지 않았다. 근본적으로 초윤리적(Transethical)이기 때문에 도덕적 해이를 가져올 수 있다.

 

정도전의 철학은 주자학에 기초했다.

불교에서는 심과 성을 구별하지 않았다. 심과 성이 일체화되는 것은 곤란하다. 인간의 마음에는 항상 환원될 수 없는 도덕적 핵심인 성이 있다고 했다. 그의 이론이 전적으로 옳은 것은 아니지만 조선왕조는 주리론적 전통을 고수했고, 따라서 매우 규범 윤리적 사회가 된 것만은 틀림없다.

 

'주자학'은 한 마디로 요약된다.

존천리(存天理) 거인욕(去人慾)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은 항상 몸에) 하늘의 이치를 보존하고 사람의 욕심을 버리는 것이다. 천리(天理)=도심(道心), 인욕(人慾)=인심(人心).

 

'주자'는 또 이렇게 말했다.

음식천리(飮食天理) 요구미미(要求美味) 인욕야(人慾也)

(인간이 배고플 때) 먹고 마시는 것은 천리다. 그러나 맛있는 것을 많이 먹으려는 것은 욕심이다.

 

'주자'는 인욕중자유천리(人慾中自有天理). 즉 사람의 욕심 속에도 천리가 있다고 했다. 천리와 인욕의 구분은 무욕(無慾), 유욕(有慾)의 구분이 아니라 공(公)과 사(私), 시(是)와 비(非), 정(正)과 사(邪)의 구분이다.

주자는 과거제도를 통해 등용되는 공직자들에게 사(私)를 버리고 공(公)을, 비(非)를 버리고 시(是)를, 사(邪)를 버리고 정(正)을 추구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주자학'의 가장 큰 명제는

천리인욕수동시병유지물(天理人慾雖同時竝有之物) 연자기선후공사사정지반이언지(然自其先後公私邪正之反而言之) 역부득불위대야(亦不得不爲對也)

천리와 인욕을 비록 동시에 가질 수 있으나 인욕을 버리고 천리를 따르는 '보편적 가치'를 실천할 수 없는 사람은 공직자가 될 수 없다.

공직자는 시험에 의해서만 권력을 부여 받는 자가 아니다.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은 세종이 지은 악장체(樂章體) 찬불가(讚佛歌)다. 부처님의 중생교화를 예찬하고 있다. 월인천강(月印千江)은 달이 천 개의 강에 비친다는 뜻이다. 즉 부처님의 공덕이 달과 같이 모든 삼라만상에 고루 베풀어진다는 뜻이다.

'석보상절(釋譜詳節)'은 1447년 세조가 지은 석가모니 일대기인데 석가의 영웅적 일생을 찬탄하는 서사시다.

 

정도전은 불교를 비판하고 개혁하는 패러다임을 정했는데, 조선왕조에서 가장 위대하다는 세종임금은 공자를 찬양하는 글을 지어도 시원찮을 판에 불교를 찬양하는 서사시를 지었다. 왜 그랬을까? 조선 왕조는 1392년 창건되었지만 왕조초기는 아직도 고려문화 즉 불교문화가 잔존하고 있었다.

<영상 '심과 성' 3/4>

 

예나 지금이나 개혁은 어려운 것이다. 아직 민중들은 혁명의 실감을 느끼지 못하였다. 향교보다 절로 가고 싶었다. 세종 때 집현전을 만들고 학사들을 중용하며, 유교를 진흥시켜도 민중들은 불교가 지배하고 있으므로 타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세종은 '월인천강지곡'을 지었던 것이다. 이것은 역사로 볼 때 개혁의 후퇴라고도 할 수 있다. 역사의 패러다임을 바꾼다는 것은 다이나믹(Dynamic)하며 어려운 것이다.

 

정도전의 불교비판

시기심여천상지월(是其心如天上之月) 기응야여천강지영(其應也如千江之影) 월진이영망(月眞而影妄) 기간미상연속(其間未嘗連續)

마음은 하늘 위의 달과 같은 것이다. 달은 실물이지만 천강에 있는 그림자는 모두 헛것이 아닌가? 그 달과 그림자 사이에는 연속성이 없는 것이다.

 

정도전의 문제의식은 세종 보다 훨씬 앞서 있었다.

불교는 감각적 세계를 허환(虛幻)으로 본다. 정도전은 현상과 실제의 이원성을 본질적으로 거부한다. 그래서 월인천강(月印千江)의 노래는 fiction(허구)일 뿐이라고 비판한다. 정도전의 유학적 의식은 세종 때보다 훨씬 앞서 나가있었다. 허망된 것, 그림자적 세계하고 실제 세계를 나누어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림자를 받아들일 수 없다. 모든 것은 실(實)해야만 한다.

 

여지무량지형(如持無量之衡) 칭량천하지물(稱量天下之物) 기경중저앙(其輕重低昻) 유물시순(惟物是順) 이아무이진퇴칭량지야(而我無以進退稱量之也)

이것은 마치 눈금이 없는 저울대를 가지고 천하의 사물을 저울질 하겠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저울 쟁반에 올려진 물건이 무거운가, 가벼운가, 저울대가 내려가는가, 올라가는가, 이것을 오직 물건에만 맡겨둔다면, 내가 추를 움직여서 무게를 잰다는 행위가 없게 될 것이다.

 

고왈(故曰) 석씨허(釋氏虛) 오유실(吾儒實) 석씨이(釋氏二) 오유일(吾儒一) 석씨단절(釋氏斷絶) 오유연속(吾儒連續) 학자소당명변야(學者所當明辯也)

그리고 말하기를 석씨는 허하고 우리 유가는 실하다. 석씨는 둘이고, 우리 유가는 하나다. 불가는 단절적이지만 유가는 연속적이다. 배우는 자들이 어찌 이것을 명확하게 분별하지 않겠는가

 

정도전의 불교비판은 단순한 불교비판이라기 보다 인간이 살아가는데 있어서의 이원(二元)적 사유에 대한 본질적인 도전장을 내고 있는 것이다.

유교는 현실주의적이며 인간세계의 윤리를 주장하고 있다. 반면, 불교와 기독교는 초월주의, 윤회, 열반·지옥, 천당을 믿고 있다.

 

삼봉의 언어는 어디까지나 삼봉 고유의 문제의식 속에서 생겨난 그 자신의 언어이다. 이 조선 땅의 역사현실이 잉태시킨 언어다.

여태까지 우리는 살아있는 우리 조상의 언어를 너무도 읽지 못했다. 그들의 살아 움직이는 삶, 그 자체를 살아있는 모습대로 구성할 능력이 우리에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여기에 우리가 인류의 가장 위대한 사상가이며, 혁명가의 한 사람으로서 삼봉을 재조명해야 하는 당위성이 있는 것이다.

삼봉의 유혼(幽魂)은 아직도 조선의 푸른 창공을 배회하고 있는 것이다.

 

<영상 '심과 성' 2/4>

 

 

 

Posted by 망중한담

음양의 세계

목욕탕이야기

목욕탕에 갔는데 어떤 사람이 다가와서 "왼손바닥에 있는 작은 돌멩이를 오른 손바닥으로 옮기는 사람이 없더라. 이 돌멩이만 옮기면 세상이 다 끝날 텐데 이것을 옮기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더라." 라고 했다. 나는 그 손바닥의 돌을 집어서 다른 손바닥으로 옮겨버렸다.

돌멩이 하나를 옮기는 것이 종교적 진리인가?

종교가 존재하는 의미가 인간의 어떠한 기적을 과시하고 어떠한 신적인 세계를 과시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그것을 추구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의 대표적인 모습이고 논리이다.

종교적 진리는 이적을 행함에 있지 않다. 종교가 건강한 상식으로 가치있는 삶을 추구하도록 인간을 독려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종교가 아니다.

 

불씨잡변

 

정도전의 불교비판이라는 것은 이러한 것에서 출발한 것이다.

그의 저서 불씨잡변(佛氏雜辯)은 불교의 잡스러운 것을 변별해서 비판한다는 책이다.

불씨잡변 정도전이 지은 불교비판서. 1398년 정도전이 이방원에게 살해되기 3개월 전에 요동정벌 준비로 바쁜 와중에 완성한 최후의 유작.

불씨윤회지변(佛氏輪廻之辯)

'불씨잡변'의 제1장 '불씨윤회지변'에서 윤회설을 비판했다.

윤회는 인도어로 Samsara, 영어로 Transmigration이다.(중국어 輪廻)

윤회설에서는 영혼과 육체가 따로 있다.

輪廻는 심신이원론(心身二元論 body-mind dualism), 영혼불멸론(靈魂不滅論 the immortality of the soul)을 전제로 한다. 즉, 육체는 썩어도 영혼은 썩지 않는다는 전제가 있어야 할 것이다.

기독교는 천당에 한 번 가면 그곳에 계속 사는데 비해 불교의 윤회는 그곳에서 다시 살아온다는 것이다.

기독교와 불교는 동일하게 사후세계(死後世界 afterlife)와 영혼불멸(靈魂不滅 immortality of soul)을 인정한다.

기독교는 희랍어를, 불교는 산스크리트어를 사용하는데, 둘 다 동일한 인도유러피언(Indo-European) 어군(語群)의 언어 문화권이다. 그러나 유교문명은 전혀 이질적인 것이다.

하늘에서 비가 내려 땅에서 생명이 돋아난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물(水)이 생명(Life) 그 자체라고 생각했다. 근대인들의 세계관에 있어서 윤회의 주체는 영혼이 아닌 물이다.

천(天) 복야(覆也) 지(地) 재야(載也) 즉 하늘은 덮는 것이고 땅은 만물을 싣는다. (중용 中庸)

이것은 마치 하늘인 남자가 비를, 즉 정액을 내려, 땅인 여자의 자궁에 생명을 잉태케 한다. 우주를 천지의 교감으로 보았던 것이다.

고대인의 유기체적 우주관은 항상 인간의 생식과정과 비유된다.

주역(周易)에서 천(天) 건(乾) 양(陽) 혼(魂)→기의 무형적 상태, 지(地) 곤(坤) 음(陰) 백(魄)→기의 유형적 상태로 말한다.

하늘(天)

건괘(乾)

양(陽)

혼(魂)

땅(地)

곤괘(坤)

음(陰)

백(魄)

동양 사람이 말하는 하늘은 기(氣)의 무형적 상태, 즉 무형(無形)이고 땅은 기(氣)의 유형적 상태, 즉 유형(有形)으로 생각했다.

하늘(天)

기의 무형적 상태

無形

땅(地)

기의 유형적 상태

有形

無形은 비존재(非存在)가 아니다. 단지 우리 감관에 포착되지 않을 뿐이다. 그것은 기의 충만함이다.

無形은 기의 입자가 미세하고(細), 有形은 기의 입자가 굵다(粗).

 

주역(周易) 계사(繫辭)

형이상자위지도(形而上者謂之道)

형이상자를 도라 하고 무형인 것, 초월적 세계를 말하며

형이하자위지기(形而下者謂之器)

형이하자를 기라 하여 구체적 사물의 형태. 유형인 것, 감성적 세계를 말한다.

 

형이상자와 형이하자는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고 모두 형(形)이 있고 나서 위에 있는 것을 상(上)이라하고 아래 있는 것을 하(下)일 할 뿐이다.

형이상자=도(道)=하늘=무형

형이하자=기(器)= 땅 =유형 이 양자는 모두 形이고 氣이다.

 

형이상자와 형이하자가 잘 섞여있는 것이 인간이다.

인간이란 존재는 형이상자와 형이하자, 말하자면 하늘과 땅이 잘 배합되어 있는 존재이다.

인간생명

하늘

형이상자

+

+

+

형이하자

 

혼백(魂魄)

인간의 존재는 하늘 쪽인 혼과 땅 쪽인 백이 만날 때 비롯되는 것이다. 나의 존재를 움직이는 유형적인 부분은 백이고 나의 존재를 움직이는 무형적인 존재는 혼이다. 옛날 사람들이 생각한 인간 관념은 음양(陰陽)으로 되어 있다.

 

도올영상 '음양의 세계' <1/4>

 

우리가 정신(精神)이라는 말을 쓰는데, 인간의 마음이라는 뜻이다. 현대 한국어는 한자를 빌리고 있어도 서양어의 번역일 뿐이다. 현대 한국어의 정신은 Soul, Mind, Spirit일 뿐이다. 한자의 원뜻과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정(精)=쌀. 즉 우주의 생명력이 우리 몸의 하초(下焦)에 저장된 것.

땅이 쌀이 되었다. 쌀은 만물을 생성하는 근원이다.

쌀을 먹으면 생명의 근원, 정자(精子)가 된다는 것이다. 쌀을 먹으면 생명력을 내는 것처럼 내 몸의 정자도 생명력을 낸다고 믿은 것이다. 쌀은 우리 몸에서 유형적인 존재인즉, 백(魄)에 해당된다.

신은 아주 미세하고, 우리가 신적이라는 것은 혼(魂)적이고 하늘적이라는 것이다. 신(神)=하늘=혼

정(精)= 땅 =백

한문의 언어는 음양론적으로 간결하게 해석되는 것이다. 이 요점을 깨닫지 못하고 신비함을 찾아 헤매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야 한다.

귀신(鬼神) 또한 서양의 고스트(Ghost)가 아니다. 그것은 음양론적으로 해석되는 우리 고유의 세계관의 소산이다.

귀신(鬼神)

귀(鬼)=귀(歸 돌아간다)=땅으로 돌아간다. 신(神)=신(伸 펼친다)=하늘로 펼친다.

귀신이라는 말 또한 음양론적으로 따져 만들어진 것이다. 인간은 죽으면 육신은 땅으로 돌아간다고 하여 귀()라 했고, 혼은 하늘로 펼쳐간다고 봐서 신(神)이라 하여 귀신이라 했다.

인간의 영혼(형이상자)은 신체(형이하자)와 분리될 수 없다.

영혼은 초월적 실체(Supernatural Entity)일 수가 없다. 그것은 몸의 일부일 뿐이다. 존재한다는 것은 반드시 물리적 근거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천지 전체가 하나의 형의 세계이고, 하나의 기의 세계로써 존재하는 것이다.

 

동양인에게는 이 천지 바깥에 천당이 있을 수 없다. 천지(天地)의 밖에는 어떠한 초월적 실체도 상정(想定)할 수 없다. 천당도 신(神 God)도 천지내적 존재일 뿐이다.

 

죽음이란 혼과 백이 분리되는 것을 말한다.

죽은 뒤에 육신은 백(魄)이므로 무덤으로 들어가는 것도 백이다. 혼(魂)은 육신을 떠난다. 늙는다는 것은 백이 노쇠해짐에 따라서 혼도 약해지는 것을 말한다. 사람이 급사하는 경우 혼은 절별(絶別)했다가 액귀(厄鬼)가 되는 것이다. 액귀란 불의의 죽음으로 인간에게 해를 끼칠 수 있는 영혼을 말한다.

"혼이 났다."라는 말은 혼이 잠깐 나갔다 돌아 온 것이다. 급사(急死)의 경우는 백이 급작스럽게 완전히 망가져서 혼이 돌아오지 못하고 떠돌게 된다. 백을 찾지 못하는 혼이 남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굿은 진혼(鎭魂), 위혼(慰魂)의 의미가 있다. 즉 혼이 서서히 백을 떠나게 하는 것이 진혼이다.

동양사상, 즉 중국적인 세계관에서는 혼과 백은 하늘과 땅으로 각기 돌아갈 뿐, 초자연적 세계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즉, 천당이나 지옥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천지 대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백(魄), 즉 육체는 썩어서 땅으로 돌아가는데, 혼(魂)은 하늘로 흩어지는 것이다. 육체는 땅에 묻혀서 썩어 가고 혼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약해지다가 소멸된다.

단지, 혼은 영활(靈猾)하므로 스스로 존재하려고 하는 속성이 있어서 소멸되는데 시간이 걸린다고 보았다. 그래서 신주를 모셔두고 사대봉사(四代奉祀) 하는 제례가 생긴 것이다. 한 세대를 30년으로 하면 4대는 120년이 된다. 동양의 합리적인 사상에서는 4대의 봉사를 받으면 혼도 없어진다고 생각한다. 사대봉사를 받고 있는 동안은 가족의 일원으로 간주되고 봉사를 받는 것이다.

그런데 윤회설과 같이 생명이 태어날 때 원래 혼의 모습이 딴 개체(魄)로 갈 수가 있겠는가? 우리 동양 사상의 천지 대자연의 생생지덕(生生之德)에서는 있을 수가 없다. 천지는 끊임없이 기가 모였다가 흩어지는 장이다. 여기서 동일한 영혼의 지속이란 불가능한 것이다.

윤회설 비판에서 정도전은 "어떻게 인간의 아이덴티티(Identity 동질성)가 계속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인가? 이렇게 황당한 거짓말을 하는가?"라고 했다. <주자어류:朱子語類>에 의하면 공중에 혼이 흩어지지 않고 형태를 유지하며 계속 떠다니면 수천수만 명의 혼이 일정하게 유지가 되어야 하는데, 억겁(億劫)년을 윤회하게 되면 공중에서 충돌이 생길 것이니 교통순경이라도 세워두어야만 할 것인데, 그런 이치가 어디 있는가?

釋氏却謂人死爲鬼(석씨각위인사위귀) 鬼復爲人(귀복위인) 如此(여차), 則天地之間常只是許多人來來去去(칙천지지간상지시허다인내내거거)

'석씨각'에서 말하기를 사람은 죽어서 귀신이 되고 귀신은 다시 사람이 된다. 이렇게 되면 천지간에는 항상 혼이 넘쳐나고 억겁년을 계속 유지하게 된다.

 

 

도올영상 '음양의 세계' <2/4>

 

내 영혼의 아이덴티티(Identity)가 지속되어야 한다는 것이 곧 아집이요, 잘못된 고집이요, 잘못된 기대이다.

그러나 동양인에게는 천지, 우주 밖에는 어떤 존재도 허락되지 않는다. 동양의 천지론적 우주관에서는 천지 밖의 어떠한 존재도 허락하지 않는다. 천지(Heaven and Earth)가 곧 신(God)이다. 즉 천당을 설정해도 이 천지 안에 설정해야 한다. 하느님을 말해도 이 산천초목 안에서 말해야 한다. 여러분은 과연 불교의 윤회론을 믿겠는가? 아니면 정도전의 천지간의 생생지도(生生之道)를 믿겠는가? 오늘날 불교비판에 나오는 이 이야기는 그런 의미에서 매우 강력한 메시지를 던진다.

 

天地間如烘爐(천지간여홍로) 雖生物(수생물) 皆鎖已盡(개쇄삭이진) 安有已散者復合(안유이산자복합) 而已往者復來乎(이이왕자복래호)

천지간은 거대한 용광로와 같아 만물을 생하기도 하지만 모든 만물을 녹여 없애기도 한다. 어떻게 하여 흩어진 것이 다시 똑 같이 합쳐지고 이미 떠난 것이 다시 돌아 올 수 있겠는가?

今且驗之吾身(금차험지오신) 一呼一吸之間(일호일흡지간) 氣一出焉(기일출언) 謂之一息(위지일식) 其呼而出者(기호이출자) 非吸而入之也(비흡이입지야)

지금 내 몸으로 실험을 해보겠는데, 한번 숨을 들이 키고 한번 내품으면, 기가 한번 나간다. 이것을 일식(一息)이라 한다. 내 뱉었던 그것이 다시 흡입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영혼의 윤회라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 아니냐! 그의 실험은 과학적이다. 인간의 윤회론은 이런 수준의 것이며 불가능하지 않느냐?

然則人之氣息(연칙인지기식) 亦生生不窮(역생생불궁) 往者過來者續之理可見也(왕자과래자속지리가견야)

그러한 즉 인간의 氣息은 역시 생기고 또 궁함이 없이 생기고, 가는 것은 가고 오는 것은 또 이어진다는 이치를 볼 수 있다.

동일자(同一者)의 지속은 천지생성(Becoming)의 법칙에 어긋난다. 천지라는 공적인 장에 대한 믿음이 조선왕조혁명의 성립근거였다.

이것은 정도전의 불교비판인 동시에 정치철학이었다. 정도전은 요동정벌 준비 중인 그 와중에도 이 글을 썼다. 그는 당대의 위대한 정치가요 철학자였으며 동시에 무인이기도 했다. 당대의 우리나라 지식인들의 위대성을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한다.

外面驗之外物(외면험지외물) 凡草木自根而幹而枝而葉而華實(범초목자근이간이지이엽이화실) 一氣通過( 일기통과)

산천초목에서 이것을 시험해보자! 모든 초목은 뿌리로부터 시작하여 둥치로, 가지로 잎으로 꽃으로 열매로 해서 일기(一氣)가 통과한다.

當春夏時(당추하시) 其氣滋至而華葉暢茂(기기자지이화엽창무) 至秋冬(지추동) 其氣收斂而華葉衰落(기기수렴이화엽쇠락) 至明年春夏(지명년춘하) 又復暢茂(우복창무) 非已落之葉(비이락지엽) 返本歸源而復生也(반본귀원이복생야)

봄이 되고 여름에 이르면 그 기는 자양분이 극에 이르러 꽃과 잎들이 무성해 진다. 가을과 겨울에 이르면, 그 기를 수렴하여 꽃과 잎은 쇠락했다가, 명년 봄과 여름이 되면 또 다시 잎은 무성해진다. 어떻게 지난 가을에 떨어졌던 잎이 원래로 돌아가서 다시 생겨난다는 것이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이런 것은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지난해에 떨어졌던 잎들이 다시 살아났다는 말은 엉터리 거짓말이다.

 

又井中之水(우정중지수) 朝朝而汲之(조조이급지) 飮食者(표음식자) 火煮而盡之(화자이진지) 濯衣服者(탁의복자), 日曝而乾之(일폭이건지) 泯然無跡(민연무적)

또 우물속의 물도 매일 아침 길러내고, 음식을 만들고, 불에 삶아 끄려 물을 없애고, 의복을 세탁하는 사람이 그것을 햇볕에 쪼여 말려, 물의 흔적도 살아지고 마는데

而井中泉(이정중천) 源源而出(원원이출) 無有窮盡(무유궁진) 非已汲水之水(비이급수지수) 返其故處而復生也(반기고처이복생야)

우물속의 샘물은 끊임없이 솟아나서 다함이 없다. 그런데, 어찌 이미 길러낸 물이 옛 곳에 돌아가서 다시 생겨난다는 말인가?

 

윤회라는 거짓말에서 깨여나야 한다. 생생지도의 산천초목에 우리가 참여해서 우리의 문명을 끊임없이 만들어내야 한다.

정도전이 '주역'의 생생지위역(生生之謂易)을 계속 강조하는 것은 고려왕조의 정체성(停滯性:Stagnation)에 대한 비판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모든 개체가 나라고 하는 개체의 지속만 생각해서는 안된다. 공적 천지라는 사회전체가 끊임없이 생생, 샘에서 물이 쏟는 것처럼 끊임없이 재화가 생산되고, 물류가 유통되고, 끊임없이 국가경제가 잘 돌아가는 시회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지 않은가?

삼봉은 이러한 경제철학을 '주역'의 생생지덕(生生之德)를 가지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정도전의 철학은 단순히 불교비판만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불교는 정도전의 비판만으로 해결 안 되는 것이 있다. 불교적 세계관의 윤회라고 하는 것은 인도문명의 독특한 상황에서 성립한 세계관이며 윤리적 요청에 의한 형이상학적, 신화적인 구성(Mythical Construction)이다.

신화적 구성을 사실의 체계로 오인해서는 안 된다. 신화를 신화로서 해석할 때 오히려 신화의 의미가 들어난다.

종교에 빠져있는 사람들은 신화적 체계를 사실로 만들려고 하고 있지만 종교가 인간을 기만하고 인간을 우매하게 만드는 문제가 있다.

불교의 윤회설은 인도의 갈마(鞨磨 karma 카르마) 즉, 업(業)과 같은 것으로써 행위와 관계가 있다. 말하자면 윤회라는 것은 윤리적인 요청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선업(善業)을 쌓으면 선과(善果 즐거운 결과)가 오고 악업(惡業)을 지으면 고과(苦果 괴로운 결과)가 온다는 말이다.

그런데 현실적인 세상에서 보면 좋은 일 하는 사람은 손해를 보고 나쁜 짓 하는 놈들이 더 잘 사는 경우가 있다. 이런 (카르마의) 원칙이 우리 현실에서 괴리되어 있다.

이 괴리 현상을 풀기 위해서는 현재 손해를 보고 있는 것은 전생의 업보이며 지금 좋은 일을 하면 언젠가는 반드시 선과가 온다고 한 것이다.

인도 사람들에게는 현실에서 윤리적 인과(業 karma)가 맞아 떨어지지 않는 상황에 대해서 인간을 독려하고 끊임없이 선행을 하라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는 윤회 이상으로 좋은 장치가 없었던 것이다.

 

도올영상 '음양의 세계' <3/4>

 

인도문명에서 윤회설은 인륜적 요청에 의해서 생겨났다고 본다.

즉, 불교의 윤회는 현실을 도피하려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윤리적으로 개혁하기 위해 있는 것이다.

기독교에 왜 천당이 필요한가? 네가 비록 이 세상에서 핍박을 받고 괴로움을 당한다 할지라도 반드시 훗날 하늘나라에서 보상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을 주기 위해서는 인간에게 하나님이 필요한 것이다. 천당도 현실적 인간의 선업(善業)에 대한 보장 때문에 있는 것이다.

칸트(Immanuel Kant:1724~1804)'신(God)은 존재의 대상이 아니라 윤리적 요청(Postulation)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했다. 칸트의 사상은 위대한 사상이나 서양 종교에서는 그렇게 받아주지 않고 있다.

그러나 우리 유교적 입장에서 보면, 동양인의 세계관에는 윤회나 천당이 필요 없다.

동양의 윤리적 보상은 어디서 받느냐?

우리의 보상은 현실에서 받아야 하고, 그렇지 못할 경우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인간의 역사 속에서 받아야 한다.

나의 존재는 나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식도 있고, 내 제자도 있을 것이고, 내가 여기에서 강의를 하고 있지만 억울하게 누명을 당했다 하더라도 여기 있는 사람이 내 진실을 알았다면 누가 이 역사를 왜곡을 할 수 있겠는가?

 

구태여 형이상학적인 천당이니 윤회니 하는 이런 요사스런 것을 만들지 않더라도 영원히 역사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살면서도 우리는 얼마든지 윤리적으로 살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얼마든지 새로운 우리의 문명을 건설할 수 있다.

삼봉 정도전에게는 이러한 확신이 있었지만 위화도회군 이전에는 불교를 비판하지 않았다. 그 당시에는 고려조의 지식인은 모두 불교신자였으며, 종교와 정치가 서로 엉켜 있었던 시대였다.

정도전은 위화도 회군 이후부터 불교비판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불교를 비판하지 않으면 새로운 왕조는 탄생할 수 없고, 여태까지 고려왕조를 유지해왔던 불교사상은 이미 썩었는데, 썩은 체제를 옹호하는 이론에 불과하다. 때문에 오늘날 우리 민족에 있어서도 우리 삶을 뒤돌아보면서 20세기를 잘 못 살았다면, 너무도 생각 없이 살아왔다면 이제는 가차 없이 비판하여야 한다. 우리들의 정신문화의 뿌리들을 가차 없이 비판하고,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21세기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모든 문명의 비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종교비판이며, 종교는 우리의 건강한 상식에서 비판 받지 않으면 그 종교는 금방 썩어 버린다. 우리나라 종교인들은 비판을 두려워하는데, 이것은 매우 불행한 일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종교에 대해서 비판하고 감시하여야만 한다. 시민단체들이 정치인들만 감시할 것이 아니라, 더 썩고, 이 사회의 정신적 뿌리를 좀먹고 있는 종교의 무서운 해악에 대해서 날카로운 비판의 눈을 항상 유지해야 한다.

 

요즘, 젊은 학생들이 내 강의를 더 많이 듣는 것으로 안다. 다음 시간 계속해서 정도전이 불교를 어떻게 비판하고 있는가를 공부하기로 하자. 이러한 비판은 단순한 비판이 아니어서 유교적 세계관을 더 선명하게 인식할 수 있게 할 것이다.

 

도올영상 '음양의 세계' <2/4>

Posted by 망중한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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