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유학은 인간을 이성의 주체로 파악하기보다 감정의 주체로 파악한다.

 

 

 

지난 시간에 탄핵정국에 대한 의미심장한 말들을 많이 했기 때문에 이번 시간에도 뭔 이야기를 하나 쳐다 볼 사람이 많을 것 같은데. 제가 사실은 몸이 상당히 아프지만 강의를 안 할 수가 없어서 나왔습니다.

 

제가 의사입니다. 병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할까 합니다. 현대인의 병은 전부 스트레스와 관련이 있습니다. 몸 안에서 오는 발병은 전부 다 칠정(七情)과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조선 유학은 인간을 칠정의 주체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조선 의학도 인간을 감정(七情)의 주체로 파악했다.

 

조선 사상사의 한 정점인 이제마(李濟馬 1837~1900)도 인간의 질병을 감정의 문제로 파악했다. ( 이제마(李濟馬:1837~1900): 조선조 말엽 사상의학(四象醫學)을 창시한 대 사상가)

 

이제마는 인간의 성정에 있어서 애노희락(哀怒喜樂)의 치우친 상태를 분석하는 것으로 사상의학의 틀을 세우고 인체를 상중하(上中下) 3()로 나누었습니다.

사상의학에서 모든 체질(Constitution)은 선천적으로 오행관계가 치우쳐 있는 구조를 말합니다.

 

이제마 4체질 분류

 

1. 태양인(太陽人)

폐가 크고 간이 작으며 가슴 윗부분이 발달한 체형.

목덜미가 굵고 실하며 머리가 큰 대신에 허리 아랫부분이 약하며, 엉덩이가 작고 다리가 위축되어 서있는 자세가 불안정해 보인다.

다른 사람과 사교하는 데 소통을 잘하는 장점이 있고, 과단성이 있어 사회적 관계에 유능하다.

태양인은 소변량이 많고 잘 나오면 건강하다. 입에서 침이나 거품이 자주 나오면 병이 된다. 담백한 음식이나 간을 보하고 음을 만들어 주는 식품이 맞다. 지방질이 적은 해물류나 채소류가 좋으며 병에는 오가피장척탕이나 미후등식장탕이 좋다.

 

2. 소양인(少陽人)

비대(脾大) 신소(腎小)하며 가슴이 성장하고 충실한 반면 엉덩이 아래로는 약하다.

상체가 실하고 하체가 빈약하며 앉은 모습이 외롭게 보인다. 말하는 것이나 몸가짐이 민첩해서 경솔하게 보일 수도 있고 눈에 정기가 있고 입술은 엷으며 턱은 뾰족하고 성격은 급하면서 쾌활하다.

굳세고 날랜 장점이 있고, 일을 꾸리고 추진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양인답게 굳세고 강인함도 있고 적극성도 있어서 어떤 일에 착수하는데 어려워하지 않는다.

소양인은 대변이 잘 통하면 건강상태이다.

비뇨기 ·생식기 기능이 약하며 일반적으로 배추 ·오이 ·보리 ·밀 ·녹두 ·해삼 ·돼지고기와 찬 음식을 좋아하고, 더운 음식과 기름기 많은 음식을 싫어한다. 병에는 양격산화탕 ·육미지황탕 ·양독백화탕 ·형방폐독산 등을 많이 사용한다.

 

3. 태음인(太陰人)

간이 크고 폐가 작으며 허리 부위의 형세가 성장하여 서있는 자세가 굳건한 반면에 목덜미 기세가 약하다. 보통 키가 크고, 작은 사람은 드물다. 대개는 살이 쪘고 체격이 건실하며 간혹 수척한 사람도 있어도 골격만은 건실하다.

성격은 꾸준하고 침착하며 무슨 일이든 시작한 일, 맡은 일을 이루어 성취하는 데 장점이 있으며 어느 곳에서나 잘 적응하는 재간이 있다.

태음인은 땀구멍이 잘 통하여 땀이 잘 나오면 건강하다.

호흡기와 순환기 기능이 약해서 심장병 ·고혈압 ·중풍 ·천식 등에 걸리기 쉽고 지방질이 많은 식품은 좋지 않다. 고단백질의 식품이 좋고, 채소류 ·해물류가 좋고, 자극성 있는 조미료나 닭고기 ·개고기는 해롭다. 병에는 청폐사간탕이나 태음조위탕을 복용하는 것이 좋다.

 

4. 소음인(少陰人)

신대(腎大) 비소(脾小)하며 엉덩이가 크고 앉은 자세는 크지만 가슴둘레를 싸고 있는 자세가 외롭게 보이고 약하다. 보통은 키가 작으나 드물게 장신이 있고 상체보다 앞으로 수그린 모습을 하는 사람이 많다.

유순하고 침착하며, 사람을 조직하는 데 능하다. 마음 씀씀이가 세심하고 부드러워 작은 구석까지 살펴서 계획한다.

소음인은 음식소화만 잘 되면 건강하다.

먹는 양도 적고 빙과류 같이 찬 것이나 생맥주 같은 것을 먹으면 설사하기 쉽다. 고추 ·파 ·마늘 ·감자 ·미나리 ·닭고기 ·명태 ·개고기 ·대추 등과 더운 음식, 매운 음식을 좋아하며 찬음식을 싫어한다. 병에는 십전대보탕 ·향사양위탕 ·보중익기탕 ·곽향정기탕 ·소합향원 등이 있다. (출처 NAVER 백과사전)

 

 

() : 호흡기관인 Lung(폐장기) 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두뇌를 포함한 인간 상초 전체의 기능→금기(金氣)에 해당

 

동양에서는 肺()과 肝(), ()와 腎()는 상극(相剋)관계로 봅니다.

(, 하나가 성하면 다른 하나는 쇠한다는 것.)

 

 

人稟臟理(인품장리), 有四不同(유사부동)

 

1. 肺大而肝小者(폐대이간소자) 名曰太陽人(명왈태양인)

인간에 있어 상초가 강한 사람은 하초가 약하다. 화를 잘 내지만 금방 잊는다. 결벽증이 많고 괴팍하다. 예술가가 많다. 간이 작기 때문에 육식을 피해야 한다.

살이 쉽게 빠지는 스타일. 머리가 크고 엉덩이가 작고 가슴 윗부분이 발달. 가을을 만나면 안 좋다. : 봄을 만나야 좋다. 방향으로 말하면 동쪽. 봄만 되면 펄펄 난다. 금붙이는 안 좋다. 금니도 안 좋다.

태양인 인구 분포는 논할 가치가 없을 만큼 거의 없다.

 

2. 脾大而腎小者(비대이신소자) 名曰小陽人(명왈소양인)

비위가 좋은 사람. 속이 덥다. 소화를 잘한다. 성격이 좋아 욕을 먹어도 소화를 잘 시킨다. 살결이 보드랍고 얼굴이 흰 사람이 많다. 성격이 급해서 기차 시간 한 시간 전에 나가는 사람이다. 화를 잘 낸다. 뒤끝이 없다.

소심하여 일찍 약속장소에 나간다. 성격이 좁고, 화를 잘 낸다. 애노(哀怒)의 감정 표시를 잘한다. 그러나 뒤 끝이 없다. 가슴부위가 성장하여 충실하다. 솔직 담백하고 의협심이나 봉사정신이 강하다. 성격이 급하고, 마무리가 부족하다. 소양인 인구 분포는 30% 정도.

 

3. 肝大而肺小者(간대이폐소자) 名曰太陰人(명왈태음인)

소위 간뎅이가 부은사람. 과감하게 일한다. 술을 잘 먹는다. 이런 사람은 하초가 강하고 상초가 약하다. 사업가, 국회의원 등. 자본주의시대는 태음인의 시대. 키가 크고 체격이 좋으며, 목덜미의 기세가 약하다.

꾸준하고 침착하여 맡은 일은 꼭 성취하려고 한다. 보수적이어서 변화를 싫어한다. 봄을 만나면 아프다. 봄에 조심해야 한다. 봄을 탄다는 것은 체질적으로 봄에 간화가 성해지기 때문이다. 봄에 조심해야 한다.

태음인 인구분포는 50% 정도.

 

4. 腎大脾小者(신대비소자) 名曰小陰人(명왈소음인)

신장이 크고 비장이 작으며 비위가 좋은 사람. 정치가. 이재(理財)에 밝은 사람. 예술가 등. 육식은 좋지 않다. 흡연도 피해야 된다. 돈에 대한 관심이 많다.

()를 버리고 안일한 것을 좋아하는 형으로, 게으르기 싶다. 하체 비만 스타일 - 엉덩이가 크고 어깨가 좁은 형. 유순하고 침착하다. 내성적이며 적극성이 적고 추진력이 약하다.

소음인 인구 분포는 20% 정도.

 

영상 : 도올 김용옥 - 우리는 누구인가 제13 '사상의학과 봄' 1 of 4

 

 

 

 

오늘은 복잡하고 어려운 이야기를 피하고, 꼭 알아야 하는 최근의 국제정세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동북아 국제정세에는 두 개의 문제가 있는데, 대만문제와 남북문제가 있습니다. 대만문제는 이념문제, 통일문제 등이 상당히 복잡해서 역사적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대만의 역사를 알아야 합니다.

대만()은 중국문화권 밖에 있었는데 명나라 때부터 중국역사와 관계를 맺기 시작하게 됩니다.

 

대만은 원주민이 사는 섬이었습니다. 이들은 남방어계(南方語系)의 폴리네시안이며, 필리핀 최북단의 Bantam군도와 생활습관 및 언어가 비슷하고 동일한 문화권에 속하는 고산족입니다.

대만을 영어로 Formosa, 즉 ‘아름다운 섬’이라 하는데 대만을 처음 발견한 사람이 포르투갈과 스페인 사람들이고, 그들이 이 섬을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Ilha Formosa라고 했습니다.

 

포르투갈과 스페인 사람들이 대만을 처음 발견했지만 이 섬을 최초로 식민 지배한 나라는 네델란드(Netherlands)입니다 Netherlands의 총독이 1624~1662 38년간 식민지 지배를 한 것입니다.

1653년 효종 당시 제주도에 표류한 하멜이 탔던 상선(商船) Netherlands의 대만 총독부에서 일본 나가사키로 가던 배였습니다.

 

대륙에서 명()이 망하고 청()이 들어서자 반청(反淸)운동을 일으켰던 정성공(鄭成功)은 대만으로 망명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청나라가 정성공을 격파하고 대만을 청나라 복건성 관할의 대만부로 만들었고, 이렇게 해서 청나라가 대만을 212년간 지배한 것입니다.

 

한국에서의 동학(혁명) 이후에 일본이 중국을 침략하는 청일전쟁이 발발하고 일본이 승리합니다. 이토히로부미(안중근의사에 의해 하얼빈 역두에서 저격 피살됨)가 시모노세키(下關)조약에서 청국으로부터 전쟁배상금조로 대만을 넘겨 받아 1895~1945까지 50년간 식민지 지배를 합니다. 즉 조선 동학혁명의 대가로 일본은 대만을 얻은 것입니다.

 

대만은 일본에 의해 50년간 지배되었지만 식민지 피해의식은 없었습니다. 대만사람들은 자기들이 한번도 나라를 가져 봤다는 생각을 가지지 않았는데, 그런 이유 때문인지 식민지 피해의식이 없습니다.

대만의 지배자는 스페인→네덜란드→명나라→청나라→일본→중국국민당으로 바뀌어 왔습니다.

 

대만사람들에게는 식민지 통치자가 바뀐 것이 더 좋았습니다. 특히 일본의 대만통치가 대만인들에게 가장 좋은 정치였습니다. 학교도 세워 주고, 도로도 만들어 주었습니다.

대만인들의 저항이 없었기 때문에 일본통치자들과 50년간 좋은 사이로 지냅니다.

 

대만은 일본이 패망할 때까지, 1945 8월까지 50년간 일본의 통치를 받았는데, 일본의 패전으로 전승국인 중국에 반환되었습니다.

당시 중국은 (국민당과 공산당) 내란 중이었기 때문에 중국에는 주체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일본은 대만을 (중국 국가가 아닌) 국민당에게 넘겨줍니다.

대만을 접수한 국민당 패잔병들은 중국말은 못하고 일본말을 하는 대만인들을 모든 사회분야에서 쫓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이로 인하여 대만사람들의 불평이 이만저만 아니게 됩니다.

 

1947 2 27, 저 유명한 대만인 대학살사건이 발생합니다.

양담배를 팔던 한 대만 노파가 국민당 병사에게 무참하게 타살되자 불만에 쌓여있던 대만사람들의 민중봉기가 타이베이시 연평북로에서 일어나는데, 이 민중봉기를 저 유명한 2.28사건이라 합니다. 이 사건에서 약 2만 여명의 대만인이 학살됩니다.

 

오늘 날의 대만 사람 가운데 2.28사건과 연루되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행정 보도 자료에 28,000명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민간 소문에는 10만 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대만 전체의 산하가 피로 물들여졌습니다. 이때부터 38년간 대만은 국민당 정부의 계엄령 하에 놓여있었습니다.

우리는 (국민당이 대만에 세운 정부를) 자유중국이라고 불렀습니다.

 

영상 : 도올 김용옥 - 우리는 누구인가 제13 '사상의학과 봄' 2 of 4

 

 

대만 국민의 85% 가량은 본성인(本省人)과 대만인이고 나머지 13% 정도가 외성인(外省人)입니다.

본성인은 청나라 때부터 대만에 와서 사는 사람이고, 외성인은 1945 8월 이후 대륙에서 온 국민당원들과 가족들을 말합니다. 본성인과 외성인 사이에는 피맺힌 한이 있습니다.

본성인 출신인 이등휘가 1984년 중화민국역사상 최초로 직접선거에 의해서 부총통(부통령)으로 당선되고 (총통인 장징궈의 죽음으로) 1988~2000년까지 국정을 주도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대만 독립정신이 고취됩니다.

 

1986. 여전히 계엄령 치하인 대만에서 본성인 130여명이 중심이 되어 야당인 민주진보당(민진당)을 창당하는데, 2004년 천슈이벤(陳水扁)이 외성인 후보와의 직접선거에서 승리함으로서 대만 역사상 최초로 국민당이 아닌 야당 출신의 총통이 선출됩니다.

 

본토민(本土民) 중심의 본성인과 대만 원주민은 기나긴 400년 동안 국가의식을 가져 보지 못했습니다. 민진당의 집권으로 인하여 대만 민중들은 400년 동안의 외세지배로부터 주체적인 나라를 가져야겠다는 갈망을 한 층 높게 가지고 있지만 外省人들은 이것에 반대하고 있습니다.

 

과거의 철저한 반공산주의자였던 국민당 출신의 외성인들이 하루아침에 친공(親共)의 대륙주의자로 변해버립니다. 이 상황은 이데올로기가 얼마나 코믹한 것인가를 실감케 하는 것입니다. 본성인들이 볼 때는 웃기는 일입니다.

과거에는 자기들에게 반공(反共)을 부르짖다가 이제는 친공산주의자가 되어 “대만은 대륙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반공의 보루였던 대표적 신문, 연합보(聯合報), 중국시보(中國時報) 등 의 신문들도 대륙의 인민일보(人民日報)와 논조를 같이 하며 “대만은 대륙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대만사람들은 이제 그들의 정체성을 확보하려 합니다.

일변일국(一邊一國)을 표방하며 그들은 해양국가로써의 독자적인 국가를 세우려고 노력하는 한편, “대만은 이미 더 이상 중국의 일부가 아니다”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대만(자유중국)은 미국의 힘(영향력)으로 UN상임 5개국의 하나였지만 미국은 대만과 단교하고 본토의 중국과 수교를 했습니다. 그러나 현재(2004) 대만의 GNP 22,000, 우리보다 훨씬 선진국입니다. 외화 보유고 세계 2, 해외투자 2,000억불의 부국입니다.

 

미국의 최대 목적은 어떻게 하면 중국을 견제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미국은 북핵 문제를 빙자해서 중국을 견제하려는 속셈이 있다. 한편 북한이 말썽을 부리니 한국과 일본이 MD(미국이 주도하는 대북한 미사일 방어체제)에 참여하라고 (압박하며)... 이런 문제가 걸려있는 한, 미국은 쉽사리 한국에서 철군하지 않습니다.

 

미국의 입장에서 볼 때, 대만은 중국 본토에서 떨어지는 것이 더 낫습니다.

대만은 미국에게 “영원히 가라앉지 않는 항공모함이다.” 미국은 대만을 결코 포기할 수 없습니다. 미국은 대만 독립을 주장하는 陳水扁(민진당 출신, 본성인)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陳水扁은 국민당의 옌친(蓮戰)과 본성인 출신의 친민당(親民黨)의 송초유(宋楚瑜)와 대전하다가 결국에는 친민당과 합쳐서 승리했습니다.

 

박빙의 신승(辛勝)이긴 하지만 최초로 본성인에 의한 정권이 수립되었습니다.

민진당 후보(천수이벤)의 승리는 그것이 비록 압도적이지는 않다고 할지라도, 대만 인민의 자주적 열망 확산의 표상이며, 동아시아 역사의 민주세력의 진보를 나타냅니다.

 

중국은 대만을 흡수하는 문제에 급급하지 말고, 대만 문제를 해결하기에 앞서 자신의 도덕성을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대만 사회의 내재적 모순에 상응하는 자신의 모순을 해결하는 데 주력해야 합니다. 무리하게 해결하려고 하면 문제가 더 커집니다.

티베트문제와 고구려 (동북공정) 문제도 그럴 것입니다.

 

고구려 문제가 왜 생겼는지 아십니까?

과거의 고구려 역사를 중국 사람들이 자기네 역사로 무리하게 흡수하려 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말이 안 되는 것인데 중국은 왜 그렇게 하고 있는가?

남북통일의 대비책인 것입니다.

남한과 북한이 통일국가를 이루게 되면 당장 고구려의 고토인 만주 땅의 역사적 정체성이 문제가 됩니다. 그러므로 중국은 이 문제를 미리 못박아 두자는 것입니다.

 

중국은 한 때 세계를 지배하려 했던, 거대한 제국주의를 운영했던 나라입니다.

그런 나라가 세계를 그렇게 보고 있는데 우리는 이게 뭐냐?

문제는, 우리가 이렇게 복잡한 국제정세 속에 살고 있으니 정신을 차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힘이 없으면 그대로 멸시당하고 처참하게 당하는 것입니다.

 

강남에 가면 필리핀(출신) 식모들이 많다는데, 필리핀도 막사이사이가 집권하고 있을 때만 해도 일본 정도의 수준이었지만, 마르코스의 잘못된 정치로 인해 필리핀 사람들은 세계의 식모국 처럼 되었습니다. 이런 이미지 추락은 회복하기 어렵습니다.

우리나라도 조금만 있으면 대학을 나와도 그렇게 (식모로) 나가지 않으면 안 될지도 모릅니다.

 

힘이 없으면 금방 처참한 나라가 됩니다.

우선 우리는 국방력강화를 해야 합니다. 우선 자주국방을 해야 합니다. (자주국방을) 무엇으로 하느냐, 돈으로 합니다.

자주 국가는 자주국방, 경제 활성으로 가능합니다.

대기업 같은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경제활동이 제 자리를 찾아 빨리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먼저 정치가 바로 서야 합니다. 빨리 정치를 개혁해야 합니다.

한반도는 일본과 중국 사이에 끼어 있습니다. 그들에게 깔보이면 안됩니다.

 

내 자식을 서울 대학에 보낼 것만 걱정하고 있지요?

세계정세 속에서 하루 속히 제 궤도에 올라가느냐, 인접국이 우리를 깔보지 못하게, (우리의 국력이 그들과 같아질 수는 없지만) 그들 나라들이 우리나라를 필요로 하게 되는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나라가 건재함으로써 동아시아의 평화질서가 보장되고 우리나라로 인해서 모든 것이 소통되며 (국제)평화 협력에 실효성 있는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 중에 가장 높은 도덕성을 가져야 하고, 돈을 벌어야 하고, 국방력을 키워야 됩니다.

 

영상 : 도올 김용옥 - 우리는 누구인가 제13 '사상의학과 봄' 3 of 4

 

 

그러기 위해서는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정치적 혼란이 빨리 종결되어서 빨리 부패가 청산되고, 썩은 시대가 지나가고, 우리나라가 빨리 경제 및 국방문제에 매진할 수 있는 나라가 될 수 있기를 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최근 총선에 관한 여러 가지 논의가 있습니다만, 나 도올은 선거관리위원회에서 표창 받을 수 있는 이야기만 하겠습니다. 어김없이 츠르게 될 오는 4.15 총선은 세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1. 보스(Boss)없는 선거

우리나라 최초로 보스(Boss) 없는 정당이 보스 없이 선거하여 보스 없는 정치를 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 모든 선거는 보스체제하에 이루어졌는데 이번에는 철저하게 보스가 없습니다. 과거엔 전두환, YS, DJ 등의 보스가 있었지만, 이번에는 누구도 정치판을 지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최초의 보스 없는 선거를 하게 됩니다.

 

2. 금권 없는 선거

이번 선거는 금권과 결탁되지 않는 최초의 선거가 될 것입니다.

그 동안 우리나라의 선거가 얼마나 금권에 썩은 선거였던가를 알 것입니다. 공정선거는 한번도 없었습니다. (이번 선거는) 금권이 최소화 되는 최초의 선거입니다.

 

3. 국민적 관심이 높은 선거

이번 선거는 국민적 관심이 높은 선거가 될 것입니다.

가장 (국민 의식이) 깨어난 선거가 될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가 투표를 하는, ‘투표율이 가장 높은 선거가 될 것이다.

 

 

이번 선거는 우리 역사에 획기적인 진보를 이룩할 선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역사가 하루 빨리 제자리를 찾아서 진정한 민생 안정을 이룩하고 부국강병으로 달려갈 수 있는 새날이 올 것으로 확신합니다.

 

영상 : 도올 김용옥 - 우리는 누구인가 제13 '사상의학과 봄' 4 of 4

Posted by 망중한담

진정한 의미의 해방은 없었다

 

조선 유교 600년의 폐습을 허무는 혁명이 절실한 때

 

 

 

사실 저는 오늘 몸이 좀 불편합니다. 입안이 헐고 혓바닥이 부어 있고 신열까지 있어서 걱정입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더 걱정스러운 것은 우리나라가 현재 병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아프면 '아야 아야' 하듯이 오늘은 이 병든 사태에 대해서 여러분과 ('아야 아야' 하듯이) 이야기를 해야겠습니다.

 

지난번에 제가 탄핵에 대해서 언급을 했는데 이것이 언론에 보도되었습니다. (요즘) 대통령 탄핵을 두고 국민 여러분들이 '부끄럽다'느니, 해외 동포들도 '부끄러운 나라가 되었다. 왜 이 나라가 이렇게 되었나? 부끄럽다'는 등의 말을 많이 합니다.

국민 여러분, 제발 탄핵 정국에 대해서 부끄럽다는 말은 하지 마세요. 이것은 매우 자랑스러운 우리 역사의 발전입니다.

 

우리 집안은 독실한 기독교 집안이고 어린애들이 많았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의 어느 날, 목사와 전도사가 가정심방을 왔는데 어머니께서 급하니까 어질러진 것을 안방에 몰아 넣은 다음 그 위를 담요로 덮어 놓고 심방을 맞이 했습니다.

(이렇게) 덮어 두고 깨끗한 채 하지 말고 치워서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터질 것은 터져야 합니다. 덮어 놓고 안 보이게 하는 것보다 벗겨 놓고 보이게 하는 것이 더 훌륭한 역사입니다.

 

지금 우리 역사는 부끄러울 게 아무 것도 없습니다. 자랑스러운 역사가 진행 중에 있습니다. 국민들은, 분노는 할지언정 절대로 동요는 하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 한민족의 역사는 정직한 도덕성을 축적해 나가고 있습니다. 이 지구상의 어느 선진국가보다 선진의 정치형태를 과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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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위선적인 정치안정이 곧 진보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대통령의 유고시기이긴 할지라도 우리는 경제 및 모든 것이 안정되어 있고, 모든 질서는 정상적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가 그만큼 제도적으로 합리화 되어 있다는 증거이고, 이런 모든 것들은 우리에게 부끄럽다기 보다는 자랑스러움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지난번 강의 때 총선에 대한 언급을 했던 것을 두고 '도올이 또 정치적 발언을 한다'고 비난하고, 방송사들에 대해서도 지금 '탄핵정국에 대해서 방송은 하지 마라, 대법원에서 법적인 진행이 되고 있는데 왜 말을 하느냐?'고 하고 있는데, 우리나라 헌법 제1장 총강 제1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2.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국회의원은 권력의 주체인 국민을 대의하는 사람인데, 탄핵발의 전에 탄핵반대 국민 여론이 60%를 넘는 데도 탄핵을 했습니다.

이것은 원론적인 문제인데, 대통령이 지금 잘 못하고 있으니까 탄핵을 해야 한다는 여론이 다수일 경우에 그것을 대의해서 탄핵하는 것은 정당합니다. 그러나 국민이 탄핵을 원치 않는데 그것을 대의하는 사람들이 탄핵을 감행하는 것은 대의정치와 민주질서의 기본을 망각한 것입니다.

 

(나는 지금) 정치적 발언이 아니라, 헌법적 원론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은 대통령 중심제 국가입니다. 대통령중심제 국가에서 대통령이 유고사태로 되었다는 것은 어떠한 천재지변보다 더욱 엄중한 사태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헌재가 재판을 하고 있건 말건 간에, 국민이 관심을 가져야 하고 논의가 있어야 하는 것은 너무나 정당한 것입니다.

 

만일 집안에 아버지가 갑자기 없어졌다면 경찰에 신고만 하고 가만히 있으란 말은 말이 되느냐? 바로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총선에 파장을 미칠 것이기 때문에 말을 함부로 하면 안 된다'고 말하지만, '총선에 파장을 미칠 것'이라고 말하는 그 사람들이야 말로 총선을 겨냥하여 탄핵 자체를 주도한 장본인들인 것입니다.

 

우리 같은 사상가들은 항상 생각을 많이 하는 사람들인데, 예로부터 우리 역사에서는 그 사상가를 '선비'라 불렀습니다. 선비 사(士)자는 열(十)중의 한(一)명이다, 열의 민중을 떠받들고 있는 하나가 선비라는 뜻입니다. 이 선비는 때론 우산을 펴서 열의 민중을 군주로부터 보호하기도 하고 의견을 반영하기도 합니다.

 

(내가 말하는) 사상가의 발언이라는 것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고 '나'라는 거울로 여러분을 비춰 보는 단순한 거울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우리 사상가들은 현재의 관심에서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사태를 전체적-역사적 맥락에서 어떻게 봐야 되는가, 이것을 어떻게 조명해야 하는가를 역사적으로 보고, 그 전체적-역사적 시각에서 볼 때에 '우리나라의 문제는 무엇이다' 하는 것일 뿐이지, 그것이 정치적 발언은 아닌 것입니다.

오늘 일어나고 있는 모든 현실도 또한 어디까지나 엄연한 역사의 일부며, 우리 사상사의 일부라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우리는 정도전이라는 사람을 통해서 조선왕조 건국의 과정을 살펴봤습니다. '조선왕조 건국'이라는 것이 사상사적으로는 불교에서 유교로 변하는 과정이었습니다.

정치적 변화라는 것은 사상적 변화가 없이는 무의미합니다. 아무리 혁명이 일어난다고 해도 자기들의 권력만 바꾸는 정치권력의 대치(代置)는 무의미한 변화일 뿐입니다. 그것은 정변일 뿐, 혁명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혁명이라는 것은 '사상적 패러다임의 변화'가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가는 과정은 혁명입니다. 왜냐하면, 불교적 패러다임에서 조선의 유교적 패러다임으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조선왕조는 많은 사상가들의 유교적 패러다임에 의해서 500년을 지탱했는데, 유교라는 패러다임은 그 나름대로 장점과 단점을 두루 갖추고 있었습니다.

 

유교문화의 제1성취

종교(Religion)로부터 도덕(Morality)으로 탈출

 

 

유교라는 패러다임의 변화는, (한반도에 거주하는 인간을) 고려의 불교라는 종교(Religion)로부터 조선 유교의 핵심인 도덕(Morality)으로 탈출시켰습니다. 종교적인 권위에 집착하거나 또는 종교 지도자에 의한 해탈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도덕적 질서를 통해서, 상식적인 인간으로서, 상식적 판단으로써 우리끼리 질서를 지키고 살자. 그것이 교육으로 가능하다'라고 하는 것이 유교의 제1명제입니다.

 

인류의 역사를 논하기 전에 근대에서 실학논의를 규정하는 것도 썩어빠진 짓입니다. 벌써 이러한 (위의 언급과 같은) 유교의 명제(命題)가 서구적 근대(Modernity)를 초월한다는 것은 조선왕조에서 이미 실험을 했습니다.

따라서 실학이 곧 현대라는 도식은 전혀 무의미합니다. 조선왕조 초기에 이미 실험을 했고, (그 실험에 의해서) 우리 사회의 도덕적 질서가 확립되었습니다.

 

유교문화의 제2성취

중앙집권적 관료체제(Centralized Bureaucracy)의 확립

 

 

(조선) 혁명의 주체세력이 (어떠한 방식으로든 간에) 지배계급을 형성했습니다.

그리고 지배계급을 유지하기 위한 합리적 수단으로 과거라는 객관적 시험제도를 도입하고 중앙집권적인 관료체제를 만들었습니다.

세계사적으로 볼 때에 서양에서는 19세기에서야 도입했던 관료체제를 조선왕조 초기인 15세기에 과거제도를 통한 관료체제를 실행한 것입니다.

 

영상 : <2/4>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관료체제가 정립되어 가면서 조선왕조는 명문가, 다시 말하면 양반계층이 지배하는 귀족주의적인 특이한 정치구조를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조선왕조 500년 동안 그대로 이어지면서 그로 인하여 뿌리 깊게 박힌 문벌 족벌 체제가 성립했습니다. 조선왕조의 가장 악질적인 유산은 명망가 지배체제의 엘리티즘(Elitism) 전통입니다.

 

유교적 혁명의 한계

① 왕정지속 ② 카스트 제도 ③ 일반관료의 권위주의 ④ 인간 평등관의 미흡

 

 

나는 초등학교와 대학(고려대) 동문회, 고향인 천안향우회, 광산(光山)김씨 종친회 등에 한번도 가본 일이 없습니다. 족보에 이름도 빠져있습니다. 하바드 대학 동문회나 보성고등학교 동문회에도 가본 일이 없습니다. 지금까지도 내 고향 천안에서 강의를 해 달라 해도 못 갑니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내가 얼마나 욕을 먹고 있는지 아십니까? 도올이 이렇게 살아온 것은 우리 사회에 대한 피눈물 나는 반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조선왕조는 현명했습니다.

양반이라 했을 때, 양반신분은 그냥 보전된 것이 아닙니다. 양반이라도 3대에 걸쳐 과거급제를 못하면 별 볼일 없는 향반(鄕班)으로 전락해서 권력의 핵심으로부터 유리됩니다.

조선왕조에 제대로 된 관직은 200여개 정도였는데, 이 자리를 얻기 위해 전국에서 과거에 응시했습니다.

과거는 사람을 뽑기 위한 시험이 아니라 떨어뜨리기 위한 시험 일 뿐이었으며, (이런) 과거의 악폐는 조선조 500년을 끊임없이 괴롭혔습니다.

 

 

조선왕조 500년은 과거(科擧)의 역사라 할 수 있다.

 

조선조 초기에는 여자에게도 상속권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장자상속의 종법제도는 17세기 중기 임란 후부터 급속히 발전한 것입니다. 종법제도는 임란 이후에 강화되었고, 우리 사회는 종법사회로 변해갔습니다. (장자상속은) 한 집안에서 장자에게 재산을 몰아주어 과거에 합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 사회는 치열한 종법사회로 변해 갔습니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과거(科擧)에서와 같이 과외(課外)까지 하여 서울대학을 못 들어가면 과거급제자를 내지 못한 집안과 같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오늘 날, (우리 사회의) 많은 사람들이 "내 자식만큼은 번듯한 대학에 가야 할 텐데 과외를 안 하고도 되는가?"라고 걱정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과외 받지 않고 비실비실 놀기만 하는 별 볼일 없는 놈이 출세하는 시대가 분명히 올 것입니다. 나도 서울대학 못 가서 한이 되었던 놈 중의 하나입니다. 서울대학 수원 농대에 떨어진 놈이니까, 아마 그때 합격했었더라면 지금쯤은 농장을 경영하고 있을 것입니다.

 

나는 왜 대만대학을 가고, 동경대학을 가고, 하바드대학을 가고, 그렇게 10여년에 걸쳐 온갖 고생을 하며 좋은 대학을 찾아 다녀야 했던가?

고려대학 나온 학벌만 가지고는 알아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평생을 살았지만, 처절한 반성을 했습니다.

내가 왜 거기 가서 공부를 해야 했던가..! 명문대학을 나온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 제대로 된 일, 한 것이 무엇인가!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명망가 지배전통'에 대해서 우리는 근원적으로 반성해야 합니다. 집안이 좋고 좋은 학교 나왔다고 좋은 지도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역사의 문벌중심, 학벌중심, 이런 문벌과 학벌 따위가 탁월한 사람들이 지배하는 사회로부터 근원적인 붕괴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국민들이 이 붕괴를 눈치 채지 못하고 아직도 조선왕조의 과거(科擧)중심 체제로 모든 것이 발탁되었던 관료체제가 굴러가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피눈물 나는 과외를 시켜서 내 자식을 서울대학에 보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노무현 대통령 개인에 대한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사회에는 노무현을 싫어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세요.

한 문벌 있는 집안에, 제대로 된 집에, 원하지도 않던 며느리가 덜컥 들어왔습니다. 원하지도 않았는데 우리 아들하고 결혼을 해버렸다고요. 그 며느리가 집안도 학벌도 별 볼일 없고 인물도 별 것 없고 돈도 없는데다가 똘똘하고 말도 잘한다면 시어머니가 그 며느리를 얼마나 보기 싫어할까요?

 

여러분들도 그런 시집살이를 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마누라도 시집살이 많이 했어요. 저 어마어마한 시어머니의 권리는 무엇입니까? 아무것도 없어요. 오직 아들 하나 갖고 있다는 것뿐입니다. 우리는 이것에 대해 철저하게 반성해 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선거라는 제도는 묘합니다.

50대 50에서 한 표라도 많으면 이기는 것인데, 진 사람들이 '졌다'고 생각할까요?

'한 표만 더 있었으면 이긴 것'

51이 못된 49가 얼마나 분노와 저주의 세월을 보내겠습니까? 이것은 아주 적나라한 인간의 현실을 내가 여러분께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문제의 본질은 어디에 있는가?

이 문제의 본질은 전혀 터무니없는 것입니다. 논리의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나는 사단(四端), 칠정(七情)을 강의했습니다.

퇴계는 4단, 7정은 모두 정(情)이라 했습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이 4단이라는 것은 7정에 오락가락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도덕의지는 근원적인 절대적인 자아로써 인간의 내면에 자리 잡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퇴계의 리발론(理發論)입니다.

 

퇴계(退溪)의 리발론(理發論)

 

夫四端情也(부사단정야), 七情亦情也(칠정역정야), 均是情也(균시정야)

<퇴계> : 사단은 정이다. 칠정 또한 정이다. 사단과 칠정이 똑같은 정이다.

 

선험적 도덕 본성이 자발적 주체로서 인간에 내재한다는 것. 퇴계의 리발은 서양 근세철학이 선험적 자아(Transcendental Ego)를 추구한 것에 상응하는 노력이다.

 

 

이율곡→기대승→송시열→권상하로 이어지는 주기론은 리(理)를 기(氣)의 조리(條理)로 환원시켰습니다.

 

發而皆中節 (발이개중절)

사단은 칠정 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칠정이 발하여 상황에 잘 들어맞는 상태일 뿐이다.

 

조선유학의 근원적인 문제는 "우리 인간을 감정의 주체"로 파악했다는 것입니다.

감정이 이성보다 더 본질적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영상 : <3/4>

 

 

조선유학이 추구하려 했던 것은 '감정적으로 과불급(過不及)이 없고 치우침이 없는 인간으로서 공공의 도덕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선비가 해야 하고, 사대부가 해야 하고. 민중의 지도자가 해야 하는 일입니다. 이래야만 우리민족이 사회적 질서를 지키고 양심 있고 질서 있는 나라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서양에서 근대문명의 출발이라는 것은 이성이 주체가 되는 인간이었습니다.

 

합리주의(Rationalism)

 

인간의 본질은 이성(理性:Reason)에 합(合)하는 삶에 있다. 이성은 수학적 이성: 1+1=2. 즉, 인간의 계산능력을 말한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없다.

 

 

서구의 근대 이성은 수학적 이성을 말합니다.

희랍인들은 수학이라는 것을 만들었습니다. 고등수학은 희랍인들의 논리학과 연역적 사고에서 출발했습니다. 그리고 수학을 하는 인간의 능력을 이성이라고 불렀습니다.

1+1=2입니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없는 인간의 이성의 법칙이며 절대 불변입니다. 이러한 모든 보편적이고 합리적인 질서가 머리에 들어있는 인간을 이성적 인간이라 하고 이런 사람이 살고 있는 사회를 이성적, 합리적 사회라 합니다.

 

그러나 (지금의) 우리사회는 1+1=2가 되는 것이 아니고 1+1=1000이 되었다가 '차떼기'도 되는 사회입니다. 분명히 합리적 사회가 아닙니다.

지난 세기, 즉 20세기를 통해서 서구 과학문명이 들어왔습니다. 우리가 읽고자 했던 '기학(氣學)이 있었는데 이 기학이라는 사상에 서양과학이 들어옵니다. <기학:氣學 : 19세기 조선의 과학자 최한기(崔漢綺)가 1857년 지은 책>

 

(지난) 1세기 동안 세계가 말했던 인간의 정감에 대한 리(理)는 원래 도덕적 리(理)였습니다. 그 도덕적 리를 합리적 리로 바꾸려고 노력한 것이 20세기였습니다.

'여러분, 열심히 수학을 해요! 수학 못하면 서울대 못가요!' 이런 유인책을 써서라도 과학을 배우려 했던 것이 20세기였습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도 위대한 수학자가 나오고 있습니다. 서양의 합리주의를 배운 것입니다. 19세기 말에는 우리나라에 수학자도 과학자도 없었습니다. 동양문명에 수학이 없었다는 것, 고등수학이 없었다는 것이 서양문명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입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도덕적 리와 합리적 리가 합쳐졌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민족은 아직도 감정적 이성(理性: Emotional Rationality)에 치우쳐 있습니다.

우리는 서양의 과학정신을 보다 더 철저하게 배워야 합니다. (감정적 이성에 치우쳐 있으면) '노무현이'가 보기 싫으면 무조건 보기 싫은 것입니다. 거기에는 합리적 질서가 들어갈 수 있는 여지가 없습니다. 무조건 싫은 것 (뿐)입니다.

 

고려 말엽에 그랬듯이 오늘의 우리사회에도 끊임없이 민주에 대한 갈망이 있어왔습니다. 조선왕조 당시 문벌 귀족의 지배체제 하에서는 도저히 민중을 구출할 수 있는 어떤 제도적 장치도 없었습니다. 이것이 유교적 민본사상의 최대 허점이었습니다. 다산 정약용(1762~1836)까지의 모든 사상적 물줄기는 기본적으로 조선사회의 신분적 구조를 뒤흔드는 발상은 되지 못했습니다. 목민의 수정(修正), 개선(改善)만으로도 조선왕조가 지속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런 과정에서) 이것을 근원적으로 뒤엎지 않는 이상에는 우리 민족에게 희망이 없다고 생각한 것은 중국의 아편전쟁 이후부터입니다.

 

아편전쟁(1840~18420)

 

아편 금수(禁輸) 문제를 계기로 일어난 영청(英淸:영국과 청나라) 간의 전쟁에서 중국(청나라)의 패배는 조선인들에게는 세계의 종식을 의미하는 대사건이었다.

 

 

최 수운은 아편전쟁 통해서 중국이라는 거대한 대륙의 질서가 붕괴되는 것을 보고 우리나라도 곧 붕괴되겠다는 위기감을 느꼈습니다.

한반도에서는 아무도 모르고 있을 때 이런 위기를 느낀 사람이 바로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 1824~1864 동학의 창시자)입니다. 그는 대단한 학식을 소유한 유학자였습니다.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는 20대에서 30대까지 10년간에 걸쳐 행상(行商)으로 천하를 주유하면서 조선의 실정을 꿰뚫고 서학의 정체를 깨닫는 한편, 1860년에 득도하게 됩니다

 

수운은 서학에 대해 공부했습니다.

수운이 발견한 것은, "그들이 말하는 천주라는 것이 우리 민중에게 구원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천주야 말로 주자학에서 리(理)가 인간에 대해 군림하게 됨으로써 너무 과격하게 수직적 존재의 구조로써 인간을 억압했듯이, (서학의 '천주' 또한)인간 위에 군림하는 상제(上帝)일 뿐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수운의 관심은 이 수직적 구조를 수평적 평등관계로 개벽하는 것이었습니다.

 

수운의 제자인 '해월'의 법설에 의하면

 

자차이후(自此以後) 오도지내(吾道之內) 일체물별반상(一切勿別班常) 아국지내 (我國之內) 양유대폐풍(兩有大弊風) 일칙적서지별(一則嫡庶之別) 적서지별 (嫡庶之別) 망가지본(亡家之本) 반상지별(班常之別) 망국지본(亡國之本) 차시오국지내고질야(此是吾國之內痼疾也)

지금부터 우리의 도(道 = 동학)에는 일체의 양반과 상놈의 구별이 없다.

우리나라에 두 가지 폐풍(弊風 = 폐단의 풍조)이 있는데, 하나는 적서(嫡庶)의 차별이며 적서의 차별은 망가(亡家)의 근원이요, 그 다음은 반상(班常)의 차별이며 반상의 차별은 망국의 근원이다. 이것이야 말로 우리나라의 가장 고질적인 병폐이다.

 

득도 후 최 수운은 자기가 거느리던 두 노비 가운데 하나는 양딸로, 하나는 맏며느리로 삼았습니다. 이런 것은 그 당시에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동학은 인간평등에 깊은 관심이 있었습니다.

 

인간을 시천주(侍天主)의 존재라고 생각했으며 인간 개개인은 모두 하느님이었습니다. '인내천(人乃天), 사람이 곧 하느님이다', 여기에 무슨 반상(班常)의 구별이 있고 적서(嫡庶)의 차별이 있겠습니까?

 

나 도올은 제대로 된 사대부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내가 살아온 과정은 철저한 엘리트 코스였습니다. 공부도 많이 했고 이 땅의 선비로서의 모든 자격을 갖추려고 노력을 했습니다. (나 도올은) 이 땅에서 엘리트라는 자부심을 버리지 않습니다.

중앙대학교에서 강의를 하면서 나는 학생들에게 "너희들을 자격 있는 엘리트로 만들려고 교육한다. 여러분은 훌륭한 대학교육을 받아서 훌륭한 지식인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인생에 있어서 달성해야 할 목표는 바로 엘리트로서 엘리티즘을 과감하게 통제하는 데 있다."고 역설합니다.

오늘의 탄핵 정국은 엘리티즘을 고수하는 엘리트 집단의 시대착오적 역사인식과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영상 : <4/4)

 

 

문명의 축을 변화시키는 것은 시간입니다.

 

(우리 문명의 축이 변화되는데) 300년이 걸릴 것 같았는데, 이제 꼭 절반 왔습니다.

1860년에 수운이 득도하고, 그 전에 혜강 최한기라는 분이 1857년에 <기학>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로부터 150년 동안에 우리는 무척이나 근원적으로 우리 사유를 짓밟고 있는 구조에 대한 변화를 열망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변화를 좌절시켜온 역사였습니다. 일제를 생각해봅시다.

 

고려의 '불교 축'에서 조선의 '유교 축'으로, 조선의 '왕정 축'에서 대한민국의 '민주 축'으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의 20세기는 동학에서 말하는 시천주(侍天主)적인 민주의 열망이 끊임없이 확충되기도 하고 이따금씩 좌절되기도 한 역사인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 후 돌아갈 집이 없다고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비참하겠습니까?

일제식민지는 내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일본 놈의 나라였습니다. 그때의 비극은 말로 다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일제 식민지의 역사는 자기 배반과 자기모순의 역사였습니다. 일제는 우리에게서 공공의 의식(Public Consciousness)을 앗아갔습니다. 우리는 울타리 안에서만 살았습니다. 울타리 바깥은 남의 나라요, (거기에는) 일본 순사가 다녔습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에는 "순사 온다." 하면 울던 아이가 울음을 그쳤습니다. 일제는 모든 공공적 가치에 대한 인식을 빼앗아 간 것입니다.

 

조선 시대의 문벌주의, 귀족주의, 양반지배구조는 일제시대에 와서 옹졸한 가족주의로 응결되고 말았습니다.

 

우리에겐 해방이 없었습니다. 우리 힘으로 쟁취했을 때만이 해방인 것입니다. 8.15해방은 (우리가 쟁취한 것이 아니라) 우연히 주어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8.15해방 후까지도 일제에서 생겨난 모든 악습과 악폐가 존속했습니다. 1945년 해방 이후 미소 냉전체제 하에서만 생존을 모색할 수 있었다.

 

단군이래 우리 역사에서 이승만 만큼 막강한 권력을 가진 왕은 없었습니다. 자기에게 항거하는 모든 사람을 다 죽였습니다. 내가 어릴 적, 조봉암 선생이 사형을 당했을 때, 정치와 무관한 의사이셨던 아버지께서 "아까운 사람 또 한사람 죽였구나.."라고 하시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그러한 비극적인 역사 속에서 그것(일제로부터의 모든 악습과 악폐의 위에 군림하는 살인정권)이 군사독재로 이어졌고, 그것이 오늘날까지 우리 역사의 내재적인 요소로 만연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우리 사회의 현실입니다. 여기에 금권이 결탁하고, 정치가 결탁해서 온갖 부패가 만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부패는 우리 모두에게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이제는 600년의 유교혁명이 일으켜 놓은 이러한 패러다임을 근원적으로 변화시키지 않는 한, 우리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는 인식에 대해 지금 모든 국민이 합의하고 있는 것입니다.

국회가 진정하게 국민의 의사를 대변하는 대의기관이라고 한다면, 이러한 국민적 합의에 대해서 응당한 대의절차를 밟아야만 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을 반대하는 다수의 의사를 대변하지 않은 국회의 탄핵소추 의결은 악폐와 결탁한 정치의 모습이다)

 

저는 그것만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느 정파나 정당이 의석 수를 얼마나 확보하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근원적으로 우리 역사의 변화에 대한 갈망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당면한 부패는 하루아침의 문제가 아니라 거의 600년 동안 고질화되어 왔습니다. 이런 현상이 유교적 혁명의 단절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것을 또다시 근원적으로 뒤엎어야 할 (혁명의) 시대에 와있으며, (이 혁명의) 단초는 동학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 동학의 혁명이 오늘까지 계속되고 있다고 하는 이러한 의식 속에서 오늘의 탄핵정국을 이해해야 할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 오늘 강의의 전부입니다.

Posted by 망중한담

'王이냐 臣이냐'

오늘날 우리사회는 대의(大義)를 생각하지 않고 목전의 소리(小利)만을 추구하고 있다.

 

- 서두에 -

이번 강의로 나 '도올'도 많이 알려졌습니다. 전에는 못 알아보는 사람이 많았는데 요즘은 거의 알아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로부터 봉변을 당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드려야겠습니다. 만나는 사람들이 사인을 해 달라고. 사진을 찍자, 악수를 하자고 요구합니다. 거절했더니 욕질을 하고 갔습니다. 담배 갑에다가, 길바닥의 종이를 주워서 사인해 달라고도 합니다. 이런 것들이 나에게 혼돈을 주고 있습니다.

 

나는 정치인이나 탤런트가 아닙니다. 그들은 한 표라도 더 얻기 위해서, 또 인기를 얻기 위해서 그렇게 해야 하지만 학자는 일반인들로부터 받아 낼 것이 없습니다. 우리 사회가 도올 김용옥을 한 사람의 학자로 인정한다면 학자 대접을 해주어야 합니다.

선비는 여러분들이 관심을 갖는 과제로 책을 보고, 논문을 쓸 때가 가장 행복합니다.

선비는 정치가나 연예인들과는 근본적으로 사회적 관계가 다르게 설정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이 사회가 가고자 하는 도덕적인 양심만 지키면 되는 것입니다.

 

나는 이 사회의 인기에 영합해서 사는 사람도 아니고, 인기를 얻기 위해서 여기에 나와 있는 것도 아닙다. 사방에서 강의를 해달라고 요청했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가장 효율적으로 내 사상을 전달하기 위한 방법을 택해서 여기에 나온 것뿐이지, 인기를 얻기 위해서 나온 것도 아니고, 권력을 탐해서 나온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이 오해하면 내일이라도 당장 그만 둘 수 있는 사람입니다.

 

존천리거인욕 (存天理去人慾)

'천리를 보존하고 인욕을 버린다'는 <주자학>의 제1명제를 좋아한다.

 

또 <중용>에 이런 말이 있다.

 

군자계신호기소부도 (君子戒愼乎其所不賭) 막견호은 (莫見乎隱) 고군자신기독야 (故君子愼其獨也)

군자는 그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경계하고 삼가고, 그 들리지 않는 곳에서도 매우 두려워하는 것이다. 숨어 있는 것이라도 보이지 않는 것이 없으며, 작은 것이라도 나타나지 않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군자는 그 홀로 있을 때에 삼가는 것이다.

 

군자는 홀로 있을 때 반성하고 행복할 줄 알아야 한다.

 

대통령을 탄핵하고, 이것이 뭔가 말이다. 노무현 개인은 흔들 수 있어도 국민을 대의한다는 사람들이 그 자리 자체를 흔들어서는 안 된다. 나라 꼴이 어떻게 될지 걱정이다. 우리 사회가 반성해야 한다. 학교 나올 것 다 나오고 지도자라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 국민들 앞에 나와서 "죄송하다. 무언가 잘못된 것을 다같이 빨리빨리 털고 화합해서, 새로운 나라를 만드는데 합심해서 나가겠다."고 해도 시원치 않을 판에!

 

우리 사회가 반성을 해야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이 땅에 태어난 지식인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송대(宋代)의 주자나 고려 말엽의 삼봉, 조선중엽의 퇴계(退溪 이황 李滉의 호) 등 우리나라의 오늘이 있게 한 모든 학자들이 했던 것과 같이 결국은, "인간 본연의 심성으로 돌아가자"라는 호소 밖에 할 것이 없다.

 

앞으로 동학을 강의하게 되는데, 동학 때 많은 사람이 고통 받고 피살되고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는 처절한 살육전이 벌어져 처참하게 죽어 갔던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20세기를 맞이했으며, 그 피의 대가도 없이 일제 식민지로 들어갔던 것이다.

 

※ 우금치 전투

1894년 11월 초, 일본군의 신식장비 앞에 10만 동학 대군 중 5000명만 살아남았다는 처절한 격전. 이 전투를 고비로 갑오동학 혁명은 실질적으로 종료되었다.

 

지난 (16대) 대선의 결과를 보자.

내가 생각하기에는, 구한말 때는 선거라는 민의가 표출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없었다. 지금도 (선거 같은) 민의 표출의 제도적 장치가 없었다면 동학의 몇 천 배가 되는 폭동이 일어날 지경이었다. 그 냉엄한 현실을, 역사의 수레바퀴를, 되돌릴 수는 없다.

 

어떠한 경우에도, 이것은 노무현의 문제가 아니고 어떤 거대한 당과 아무 관계도 없다. 우리 민중들은 역사의 수레바퀴가 뒤로 돌아가기를 원하지 않는다. 무언가 더 깨끗하고, 더 합리적이고 더 정직한 사회로, 모든 사람들이 다 같이 협력해서 살 수 있는 사회로 가기를 원하고 있다.

 

영상 : 도올 김용옥 - 우리는 누구인가 제11강 '王이냐臣이냐'

 

정도전은 일종의 신권(臣權)정치, 즉 유교이념으로 무장된 엘리트 신하집단이 통치의 주체세력이 되는 정치형태를 지향했다. 고려 말의 사회가 워낙 썩었기 때문에 뜻 있는 사람들, 신진 유림이 생겼다.

고려 말은 정도전, 정몽주, 권근 등 탁월한 대석학들이 많은 사회였다. 격동기에는 인물들이 많이 태어난다.

정도전은 당시의 지식인들을 대변하는 한 사람으로서, 모든 지식인들이 공통적으로 원하는 '신하들의 합리적인 상식'에 의해서 국가가 운영되기를 바랐다.

 

왕 한 사람이 모든 걸 지배하는 사회에는 항상 문제가 노출되었다.

 

정도전 같은 탁월한 신하가 리더십을 가지고 있을 때에는 신권정치가 가능했을 것이나, 그의 구상은 너무 과격했다. 왕권을 극도로 제한했다.

중앙집권적 절대왕정(Absolute Monarchy)의 화신인 이방원의 입장에서 보면 "혁명은 누가 했는데 왕권을 무시하고 신권을 달라고 하느냐?"였던 것이다.

이방원은 간단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왕권의 집중을 강조했다. 그 정도가 좀 지나쳤다. 그는 왕권을 제약할 수 있는 요소들은 모조리 죽였다. 이방원이 만큼 (사람을) 많이 죽인 사람은 없다. 자기 형제, 처남 4명도 죽였다. 자기의 사돈 심은은 세종 즉위 초 영의정이었으나 권세를 부리자 가차 없이 사사되었다. 그러나 이방원의 피의 숙청과 왕권의 강화 속에서만 성군 세종이 등장할 수 있었다. 이방원의 가차 없는 숙청 때문에 세종은 성군정치를 펼 수 있었고, 세종 등극 이후는 군말이 없었다. 성균관 학자들도 꼼짝 못하고 순종했다.

 

위대한 성군은 항상 뒤끝이 나쁘다. 세종, 세조 때의 명신들은 대부분 정도전을 신봉한 권근(權近) 밑에서 배출되었다. 따라서 이들 대의 정치는 기본적으로 정도전의 틀대로 갔던 것이다.

 

조선조의 2대성군은 세종과 정조다.

정조는 대학자였으며 세종을 능가할 정도였다. 또 정치가였다. 세종 이후에 정치가 문란 해졌고, 정조 후에도 정치가 문란 해졌다. 완벽한 왕은 자기만으로 끝난다. 고도의 학식을 소유한 성군이었지만 신권에 다시 눌려 당대의 영화스러운 모습을 계승시키는 데는 실패했다. 만개한 후 스러지는 꽃과 같았다.

 

조선왕조의 역사는 신권과 왕권의 시소(See-Saw)게임

 

문종(세종의 맏아들)은 세종 때 한글창제에 주도자가 되었다. 대학자였다. 세종의 아들 중에 가장 문장이 뛰어났었다. 문종은 등극 전에 공부만 했다. 결과로 문약해서 등극한 후 2년 3개월 만에 3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단종이 계승했으나 정치권력은 김종서, 황보인에게 집중되고 또 다시 신권이 강화되었다.

 

조선왕조를 단순한 왕권의 역사로 보는 오류를 범해서는 아니 된다. 정도전이 왕권을 제약한 이래로 왕은 함부로 권력을 휘두를 수 없는 제도 속에 묶여 있었다.

세조는 왕권의 강화를 위해서 단종을 빙자해서 공신, 신하들을 모조리 쫓아낸다. 세조(수양대군)의 아들은 병약했다.

예종은 등극한 후 1년 2개월 만에 죽는다. 사람들은 세조가 단종을 죽인 업보라고 생각했다.

 

성종은 세조의 손자였다. 성종은 대단한 인물이었다. 성종주변에는 그를 압박하는 권신(Clown)들이 비교적 적었다. 그래서 새로운 사림들이 많이 정치에 진출할 수 있었다.

조선왕조의 문물은 세종 때 시작이 되어 반석을 다졌고, 그 반석위에 집을 지은 임금은 성종이었다. 성종의 치세기간(1469-1494, 25년간 즉위)에 조선왕조의 문물제도가 완성되었다. <경국대전> <동국여지승람> <동국통감> <삼국사적요> <동문선> <오례의> <악학궤범> 등이 모두 성종 때 편찬되었다.

 

성종은 공부를 좋아하고 배우기를 좋아했기 때문에 선비들을 끌어 모았으며 이 때 영남의 골수 성리학자들이 대거 진출했다. 이때 사림(士林)이라는 것이 형성된다. 영남사림의 거두 김종직(金宗直:1431~1492) 등 문신을 가까이 하면서 권신들을 견제했다. 다시 성종대왕의 신권이 강화되었다. 임사홍, 유자광을 유배시키고 신진세력들의 진로를 열어주었다. 성종은 끼가 있는 왕이었다. 말년에 가면 밤에 미복으로 궁궐 바깥으로 나가 로맨스도 벌렸다. 여기에서 성종비, 윤씨의 질투가 생겨 왕의 얼굴에 흠집을 내고 해서 폐비가 되었다. 그녀의 아들이 연산군이다.

 

조선 초기에 사림(士林)이라는 말과 훈구파(勳舊派)라는 말이 나오는데, 훈구파란 세조의 찬위를 도와 정치적 실권을 장악한 공신 집단, 훈국공신(勳國功臣)을 말한다. 이들은 정도전 계열이다. 이들에 대항하는 세력이 성리학을 중심으로 한 사림(士林)이다. 혁명가 정도전의 개혁세력도 권력을 잡으면 기득권자가 되고 훈구세력이 되었다. 이들 기득권자는 보수 세력으로 전락했다. 개혁세력도 기득권자가 되면 보수 세력으로 전락한다.

 

※ 김종직 (金宗直 1431~1492)

경상도 밀양출신의 사림파 거두. 항우(項羽)가 초나라의 의제(義帝)를 폐한 것을 단종에 비유해서. 단종을 조위하는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지었다. 이것이 발단이 되어 연산군 때 무오사화(戊午史禍)가 일어났다.

 

폐비 윤씨의 아들인 연산군은 두 개의 사화를 일으켰다. 사화란 "사림이 화를 입는다." 는 의미이다. 무오사화만 사초(史草)가 발단이었기 대문에 사화(史禍)라 고 부른다. 사화(士禍)란 공신, 외척, 인척 세력이 사림을 견제한 사건이다.

 

연산군은 영민하고 예술적 기질이 있고 학식도 있었다. 초기에 정치를 잘했는데, 사림에서 간섭이 계속 심해지자 그들을 숙청하게 되었고, 연산군 때 일어난 양대 사화가 무오사화(戊午史禍)와 갑자사화(甲子士禍)이다. 갑자사화 때에는 연산군이 그의 어머니 폐비 윤씨의 사건을 알게 되면서 그와 관련된 사람을 모조리 죽인다. 이때 김종직의 제자이며 조광조의 선생인 김굉필도 사형 당한다.

 

사림을 쫓아내던 훈구파들이 연산군을 폭군으로 몰아 쫓아내고 중종이 등장한다. 바로 지금 드라마 '대장금'에 나오는 중종이다. 드라마 속의 중종과 장금의 관계는 물론 픽션이다. 그러나 중종이 57세로 세상을 떠나기 직전, 내의원들이 약제를 상의하고 있는데 "내 증세는 여의 장금이 안다"라고 전교하는 결정적인 한 줄의 글이 <중종실록>에 실려 있다.

 

중종은 훈구파들에 의해 괴롭힘을 당하자 갑자사화 때의 피해자들인 사림을 다시 끌어들이게 되는데, 그 중 대표적인 사람이 조광조(趙光祖)다.

 

※ 조광조 (趙光祖 1482~1519)

김굉필의 유배지에서 2년간 성리학을 공부하고 젊은 나이에 사림파 영수가 되어 발탁된다. 34세에 등용되어 대사헌에 올랐다가 기묘사화로 38세에 죽는다.

 

조광조는 김굉필로부터 엄격한 성리학을 배웠다. 그는 항시 의관을 정제하고 먹는 것도 단정하게 먹고, 성격이 칼 같은 사람이었다. 도덕적으로 완벽하게 산다는 사람이었다. 그는 당시의 조선조를 요순상태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도덕적인 열정에 불타고 있었다. 이것을 흥지치(興至治 지극히 이상적인 나라를 일으킨다)라 불렀다.

 

(조광조에 대한) 퇴계와 율곡의 평가가 재미있다.

퇴계는 조광조를 극히 존중하는 반면, 율곡은 공부가 덜된 상태여서 융통성은 없고 이상만 높고, 현실에 어두운 자로 평가했다. 조광조는 급진적이고 엄격했다. 위훈자(僞勳者) 72명을 적발해서 공신록에서 삭제하고 궁궐 내에 설치되어 있었던 소격서(昭格署)를 철폐하게 했다. 유교적인 합리주의 국가에서 미신을 믿어서 되겠는가? 밤낮으로 왕에게 읍소해서 철폐시켰다고 한다.

 

※ 소격서 (昭格署)

고려 때 부터 설치된 궁정 내 도교의 제식을 거행하는 관서. 우물에 비친 북두칠성을 보고 점을 치기도 한다. 1518년 조광조에 의해 철폐되었다.

 

위훈삭제(僞勳削除), 중종반정을 도모한 공신들의 과장된 공훈을 없애버려야 한다고 주청해서 76명이 공훈록에서 삭제되었다.

 

조광조를 역사적으로 비판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러나 조광조의 급진적이고 엄격한 국정은 문제가 생기고 반발이 심했다. 그는 조선왕조에 도덕군자의 새로운 기풍을 불어넣어준 사람이긴 했으나 중종은 그를 내치고 말았다. 조광조는 능주로 귀양을 갔다가 곧 이어 사사되었다.

 

조광조의 절명시 (絶命詩)

애군여애부(愛君如愛父) 우국약우가(憂國若憂家)

임금을 내 어버이처럼 사랑했고 나라를 내 집처럼 걱정했다

 

조광조는 조선왕조에 칼날 같은 도덕군자의 기풍을 세웠고, 죽어서도 신진사림의 상징이 되었다. 조광조가 투옥되었을 때 유생 일천여명이 광화문에 모여 무죄를 호소했다.

 

중종 이후 조선왕조의 역대 사림들, 지식인들은 스스로가 조광조의 후예라는 것을 자처하고 있다.

조광조의 순수한 도덕군자의 이상을 추구하면서 커 나온 대표적 인물이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이다. 그는 연산군 때부터 선조 때까지의 조선중기 대학자였으며, 조선왕조가 유교국가로서의 가닥이 잡히게 했다.

 

이퇴계는 대단한 사람이다. 그는 주자 이후 동아시아 최고의 성리학자로서 평가받고 있다. 이퇴계의 시대에 들어 와서 우리나라의 유교가 제자리를 잡아갔다. 즉, 정도전으로부터 시작된 조선의 유학은 이퇴계에 이르러 조선 사람들의 내면적인 삶의 철학이 되었다. 나(도올)의 학문적 성향이 기론(氣論) 쪽이었기 때문에 젊었을 때는 이퇴계를 싫어했었는데 공부를 해갈수록 그에게 매력을 느꼈다. 그의 학문적 태도에는 존경스러운 면이 많다.

 

1558년 10월, 58세 노인이었던 퇴계가 지금의 국립대 총장 격인 성균관 대사성으로 재직하고 있을 때, 새로 급제한 고봉(高峰) 기대승(奇大升)이 찾아왔다. 당년 32세의 청장년이었던 기대승을 만난 58세의 퇴계는 그의 학문에 충격을 받고 그에게서 배웠다. 이퇴계는 마음이 열린 학자였다. 평생 손아래 사람에게 배우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 기대승 (奇大升 1527~1572)

퇴계시대의 대학자. 본관은 행주. 1558년 문과에 급제한 후 성균관 대사성까지 오른다.

 

기씨(奇氏)는 희성이나 기대승과 같은 행주 기씨성을 가진 여자가, 궁녀로 원나라에 가서 마지막 황제 순제의 황후가 되어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이것을 계기로 고려에서도 기씨가 세력 기반을 얻었다.

 

이퇴계와 기대승의 대면

 

기대승

사단발어리 (四端發於理) 칠정발어기 (七情發於氣)

사단은 리(理)에서 나오고, 칠정은 기(氣)에서 나온다

 

이퇴계

사단리지발 (四端理之發) 칠정기지발(七情氣之發)

사단은 리의 발현이고 칠정은 기의 발현이다.

 

리기(理氣)는 인간의 마음에서 발현되는 두 개의 주체가 된다.

 

기(氣)→발(發)→칠정(七情), 리(理)→발(發)→사단(四端)

주자학에서는 리(理)는 순선(純善)한 것이기 때문에 이상적 이념일 뿐 구체적 작위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리발(理發)은 주자학에서도 이단적인 생각이다. <주자어류>에도 리발(理發)이라는 말은 있으나 퇴계의 주장과는 어감이 다르다.

 

기대승 (반문)

맹자왈(孟子曰) 惻隱之心(측은지심) 仁之端也(인지단야)

 

단(端)=측은지심(惻隱之心)=정(情)≠성(性)

단(端)은 측은지심(惻隱之心)이고 정(情)이기는 하나 성(性)은 아니다. 인의 단초로 보인다.

 

사단 (四端)

측은지심(惻隱之心)=인(仁), 수오지심(羞惡之心)=의(義)

사양지심(辭讓之心)=예(禮), 시비지심(是非之心)=지(智)

단(端 tip)이란 본체가 들어난 하나의 단서이다. 단(端)은 성(性)이 아니라 심(心)이다.

 

기대승

비칠정지외복유사단야 (非七情之外復有四端也)

칠정의 바깥에 다시 사단이 있는 것이 아니고

사단(四端) 내칠정중발이중발이중절자지묘맥야(乃七情中發而中發而中節者之苗脈也)

사단은 희노애락(喜怒哀樂)의 감정이 발현되어서 제대로 상황에 딱 들어맞아서 도덕적으로 보일 때 우리는 그것을 사단이라 한다. 사단과 칠정은 나누어질 수 없다.

 

사단(四端)은 사덕(四德=인의예지仁義禮智)이 아니다. 기대승의 학문이 정확하다고 본다.

 

이퇴계

부사단정야(夫四端情也) 칠정역정야(七情亦情也) 균시정야(均是情也)

무릇 사단은 정이고 칠정도 정이고, 둘 다 같은 정이다.

 

정에는 사단과 칠정이 있는데 그 소종래(所從來), 즉 감정의 근원을 캐 들어가 보면 사단(四端)은 본연지성, 리(理)이고 칠정(七情)은 기질지성, 기(氣)이다.

 

사단(四端)이건 칠정(七情)이건 똑같이 이기(理氣)가 될 수 없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사단과 칠정을 똑같다고 인정해버리면 사단이라는 인간의 도덕 원리가 칠정에 의해 제멋대로 움직이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인간의 도덕성에 대해서 자의적인 해석을 내리게 된다. (사단칠정론은) 인간 심성의 도덕적인 아름다움을 종교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퇴계는 정치에 뜻을 두지 않았음에도 조정의 부름을 많이 받았다. 사림과 왕정 간에는 갈등이 있기 마련인데 출사하지 않으려는 사림을 출사시킬 때 왕정의 정통성이 인정되기 때문이다.

 

※ 소수서원 (紹修書院)

퇴계가 제자들을 가르친 곳. 퇴계가 풍기 군수로 있을 때 명종으로부터 편액(扁額)을 받음. 이 서원은 하버드대학 보다 93년 앞서는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대학이다.

 

퇴계 다음에는 율곡이 등장한다. 이율곡의 철학은 퇴계와는 계통이 다르다. 율곡은 고봉(高峯 기대승의 호)의 논리를 계승했다.

율곡은 이발(理發)을 인정치 않았다. 율곡사상은 기발(氣發)만을 인정했다. 퇴계 사상은 순수한 인간의 도덕의지를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퇴계의 사상은 관념화되기 쉽다. 이발은 이상주의적 인간관이고, 기발은 현실주의적 인간관이다.

 

기발적인 인간은 잘못도 저지르게 되고 감정적으로 행동하게도 되는 현실적인 인간이다. 인간의 현실적인 모습을 강조한다. 율곡과 기대승 같이 기발을 숭상하는 사람들은 현실정치에 적극참여하고 사회 개혁에도 참여한다.

이율곡은 10만양병설을 주장했다. 사회적 관심도 많았다. 현실적인 인간의 모습을 중시했다. 철학도 이발보다 기발을 강조했다. 현실적인 인간을 중시한다.

 

조선왕조의 관료 중심의 정통유학은 율곡 중심으로 간다. 율곡 밑에서 나온 사람이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다.

기호학파가 형성되고 조선사상사의 주류를 형성한다. 이퇴계는 비주류이다. 그러나 우리는 퇴계에 무게를 많이 두고 있다. 퇴계학파가 비주류라 할지라도, 그의 도덕적인 철저함과 인간의 내면을 깊숙하게 보는 주리론으로 현실주의적인 주기론자들이 점점 기울어져 왔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경향은) 조선왕조가 잘 되어가는 것이 아니라 관념화되어 간 것이다.

조선 성리학은 말로를 맞이하게 된다.

 

※ 송시열 (宋時烈 1607~1689)

호는 우암(尤庵). 조선후기 기호학파, 노론의 영수. 장희빈이 왕비로 책봉되는 기사환국 때 죽임을 당함.

 

조선 후기에 오면 이러한 주기(主氣)계열의 현실파 학풍이 체계적으로 퇴화되어 관념화되는 현상이 생긴다. 그리면서 성리학은 생명력을 잃고 현실감각을 상실해 간다. 즉 관념화되고 종교적인 도그마(Dogma)로 간다. 구한말에 와서는 현실 대처능력을 잃어버린다. 그래서 조선왕조가 멸망하게 된다. 이것이 내가 간단하게 정리한 조선 사상사의 흐름이다.

 

(그러나) 이렇게 쉽게 말하기는 어려운 주제이다. 조선사상사를 이런 시각에서 보면 된다는 것이다. 세계사상의 흐름 속에서 우리 조선 성리학의 의미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이것을 다음 시간에 여러분에게 정확하게 다시 한번 짚어드리겠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강의이다. 이런 강의는 다른 데서 절대로 들을 수 없다.

 

우리 민족은 어떻게 살아온 사람들이고 이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 사상을 매개로 해서 어떻게 뼈저리게 노력해 왔는가를 깨달아야 할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 민족에 대한 아주 본질적인 프라이드를 가져야 한다. 허튼 수작들 그만하고 무언가 정도를 향해서, 바른 길을 향해서 우리 역사가 나아가야 한다.

 

 

 

 

Posted by 망중한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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