心과 性

불교는 마음의 종교다.

 

불교에서는 종교적 문제가 인간의 마음에 있다고 생각한다. 마음에 대한 이론이 굉장히 발달한 종교다. 세계 어느 종교보다 마음에 대한 이론이 정교하다. 오늘은 정도전에 의한 불교의 마음 이론을 비판하려 한다. 제목이 불씨심성지변(佛氏心性之辯)으로 되어있다.

(원시불교의 핵심은 무아론(無我論)이다. 무아(Anatman)는 모든 존재론적 실체를 거부한다. 하느님<God>도 나<Ego>도 모두 심적현상<心的現象 : Psychological Phenomenon>일 뿐이다.)

 

고려말엽의 사상가요, 혁명가요, 조선왕조 창건의 주역이었던 정도전은 불씨심성지변(佛氏心性之辨)을 통해서 불교의 심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비판하였다. (불씨심성지변 : 불교의 심(心)과 선성(善性)을 분별함)

 

심자(心者) 인소득어천이지생기(人所得於天以之生氣)

성자(性者) 인소득어천이지생리(人所得於天以之生理)

심(心)이라는 것은 인간이 하늘로부터 얻어서 생한 기요, 성이라는 것은 인간이 하늘로부터 얻어서 생한 리(理)라고 했다.

 

조선 사상의 이기론(理氣論)이 여기에서부터 태동한다. 조선사상의 이기론은 우주의 근원을 리(理)에 두느냐, 기(氣)에 두느냐에 관한 조선사상사의 논쟁을 의미한다.

 

심(心)=기(氣) 심은 우리가 하늘에서 얻어 가진 기,

성(性)=리(理) 성은 우리가 하늘에서 얻어 가진 리

 

동양적인 우주관에서의 세계, 즉 천지(天地)는 기로 구성되어 있다.

예를 들면 여기의 책상, 펜, 고로쇠 물 등은 모두 기(氣)다. 기가 움직이는 법칙을 리(理)라고 한다.

(고로쇠 물 : 고로쇠나무에서 뽑은 수액인데, 봄에 이것을 마시면 생명이 약동하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다는 좋은 물이다.)

 

자연의 질서를 탐구하는 것이 과학이다.

인간세계를 둘러싼 환경의 객관적 리(理)를 자연의 법칙(Law of Nature)이라고 한다. 우리는 상식적으로 리가 기 바깥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기를 떠난 리를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 자연과학적 태도(Scientific Attitude)이다.

 

리가 기 속에 있다고 한다면 리는 기에 지배당하고 종속될 뿐이다.

성리학자들은 기에 종속되지 않는 리의 독자성을 확보하고자 했다. 그것이 인간을 명령하는 도덕적 법칙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리는 인간의 도덕적 품성과 관련되어 있다. 인간이 도덕적으로 사는 것은 기(물질)만 있는 것이 아니고 리(법칙)가 있기 때문이다.

 

성리학에서는 자연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가 연속된 것으로 이해되었다.

존재(Sein)와 당위(Sollen)가 같은 차원에서 이해되었다. 인간의 심성에 내재하는 리가 곧 인의예지(仁義禮智)였다. 性에 理가 내재한다고 생각한 이론을 우리가 성리학(性理學)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맹자의 성선(性善)은 인간의 도덕적 성품의 선천성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기보다 리를 중시한 성리학은 맹자 성선설(性善說)의 적통을 잇고 있는 것이다.

 

심(心)은 인간의 의식현상 일반(Consciousness)을 말하고, 성(性)은 마음의 도덕적 핵심(Moral Core)을 의미한다.

우리는 성선설과 성악설을 이야기하고 있다. 성(性)은 원래적으로 선(善)하다. 이것은 맹자의 성선설이고 '성은 원래적으로 악하다'라고 하면 순자의 선악설(善惡說)을 연상한다.

 

순자왈 (荀子曰) 인지성악(人之性惡) 기선자위야(其善者僞也)

순자는 '인간의 성은 좋지 않아서 선하다는 것은 거짓'이라고 했다.

 

순자는 인간을 이기적 욕망의 주체로 파악하였다.

자연 상태에서 인간은 쟁탈(爭奪), 호색(好色), 호리(好利), 음란(淫亂)에 빠질 뿐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인간이 성을 따르게 된다면 세상은 어지러워진다고 한다.

 

기선자위야(其善者僞也)

선하다고 하는 것은 인위적인 노력일 뿐이다. 인간의 성이 악하기 때문에 예의라는 것이 필요하다. 예의라는 것은 성(性)이 만들어내는 인위적인 것이다.

 

범예의자(凡禮義者) 시생어성인지위(是生於聖人之僞) 비고생어인지성야(非故生於人之性也)

무릇 예의라고 하는 것은 성인의 위선에서 나온 것이며 모든 사람의 성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순자>

 

인간이 힘써야 할 것은 적위(積僞)다.

적위란 인위적 노력을 쌓아가는 것이다. 그것이 공부(工夫)이다. 위(僞)는 거짓, 위선이 아닌 인위적(人爲的)이라는 의미의 위(僞)로 해석해야 한다.

 

위기이생예의(僞起而生禮義)

(인위적인 노력이) 일어나서 예의가 생겼다. 예의가 인간 본성 속에 있는 것은 아니다. <순자>

 

성선(性善)과 성악(性惡)은 결코 인간의 본성을 선(God)과 악(Evil)으로 규정하는 논의가 아니다.

 

 

<영상 '심과 성' 1/4>

 

노자 2장에

천하개지미위미(天下皆知美之爲美) 사오의(斯惡矣)

천하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하는 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것은 추할 수도 있는 것이다.

아름다운 미(美)⇔추할 오(惡). 오(惡)는 어디까지나 미(美)의 반대말이다. 선(善)의 반대말은 아니다.

 

개지선지위선(皆知善之爲善) 사불선의(斯不善矣)

모든 사람들이 선한 것을 선하다고 알고 있는데 그것은 불선(不善)일 수도 있다.

선의 반대어는 악(惡)이 아니고 불선(不善 :선하지 않음)이다.

 

동양인의 관념 속에서는 실체로서의 악(惡)은 근원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악은 불선(不善)일 뿐이다.

동양인들의 관념 속에 천사와 악마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서양인들에게는 천사가 있고 악마가 따로 있다. 선과 악으로 2분되어 있다. 동양에서는 선의 반대는 불선이지 악은 아니다. 중국 고전에서의 악(惡)이라는 글자는 모두 추할 오(惡)로 읽어야 한다. 악(惡)으로 읽는 것은 서양언어와 서양종교의 영향일 뿐이다.

 

성선설(性善說)의 반대말은 성악설(性惡說)이 아니고 성불선설(性不善說)이라야 한다. <순자>의 성악(性惡)은 성악이 아니라 성오(性惡)다.

순자는 성악설을 말한 적이 없다. 순자의 성오설(性惡說)은 성선(性善)을 전제하지 않으면 성립할 수 없다. <순자>의 성불선설도 성선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래야만 인간의 교화가 가능 한 것이다.

 

'순자'의 글에서

인지성악(人之性惡) 필장대예의지화(必將待禮義之化) 연후개합어선야(然後皆合於善也)

사람의 성악은 예의 교화를 거쳐 성선이 된다.

 

동양사상에는 인간의 본성이 본래적으로 '선:善'하니 '악:惡'하니 하는 논의는 없다.

인간의 심(心)에는 두 측면이 있다. 하나가 정적(情的) 측면(욕망의 세계 : Sentiments)이고 다른 하나는 성적(性的) 측면(순수한 선 : Moral Nature)이다. 근세 유학의 문제(과제)는 심통성정(心統性情), 즉 심(心)이 성(性)과 정(情)을 통괄하는 것이다.

 

심(心), 성(性), 정(情)은 셋으로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의식현상이다.

인간의식의 작위적 주체는 어디까지나 心이다.

심은 일심(一心 : 하나)인데, 동전의 양면처럼 어떤 때는 심으로 나타나고, 어떤 때는 정으로 나타난다. 정도전이 (볼 때) 불교도 심, 마음의 종교이다. 그래서 마음에는 정적인 측면이 끼여 있기 때문에 문제가 많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성(性)은 능동적 촉발성(觸發性)을 갖지 않는 비작위적(非作爲的) 순수한 도덕적 이상(Moral Ideal)일 뿐이다.

심(心) : 정(情)↔성(性), 기(氣)↔리(理), 용(用)↔체(體), 인욕(人慾)↔천리(天理)

 

고려왕조는 불교사회면서 개인주의적(Individualistic)사회였다. 조선왕조는 유교사회로써 공동체적(Communalistic)사회였다.

불교에서는 나 혼자 천국이 가능하고 해탈도 가능하고 성불도 가능하다. 불교는 철저하게 개인주의적인 종교이다. 마음을 다스려서 번뇌로부터 벗어나면 그것이 곧 해탈이요, 성불이다. 스스로 마음을 다스리고 개별적으로 행한다.

 

불교이론으로는 정치이론을 만들기 어렵다. 불교에서는 모두가 개별적으로 놀기(행하기) 때문이다. 불교사회도 잘만 돌아가면 제대로 의미가 있는 것이지만 고려 말에는 문제가 나타났다.

새로운 과거시험제도를 도입했다. 굉장히 이상적인 제도다. 과거제도란 시험을 통해서 권력을 주는 제도인데, 중국에서 나왔다. 중국문명의 유니크(Unique)한 시도였다. 법조문만 외워서 합격하면 권력을 갖게 되는 오늘날의 고시와 같이 당시의 중국에서는 '서경(書經)' 등을 외워서 합격하면 권력을 갖게 되었다.

 

인재를 등용하는 방법에는 시험(Examination)과 추천(Recommendation)이 있다. 과거제도에서는 객관적인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영상 '심과 성' 2/4>

 

사회가 잘 돌아갈 때는 추천제도도 좋겠지만 추천제도는 주관적이며 문란해지는 문제가 있었다. 반면에 시험제도는 객관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고려 때부터 중국에서 과거제도를 도입했다. 신라시대에는 화랑제도가 있었으나, 과거제도는 없었다. 과거제도에서 종이쪽지 하나로 권력을 준다는 것은 불안했다.

 

이러한 과거제도에 대해서 주자는 관료 제도를 시행함에 있어 관리들에게 권리를 주는 동시에 철저한 윤리의식을 의무지우지 않으면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주자학의 목표는 사대부 관료 계층에 철저한 도덕적 가치를 심어주기 위한 것이다. 주자철학은 기본적으로 공무원 교육철학이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정보다는 성을 더 강조했다. 인의예지(仁義禮智)가 갖추어진 인간이다. 그러기 때문에 性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감정적으로 움직이는 것은 기(氣)요, 이성적으로 움직이는 것은 리(理)다. 주기론자(主氣論者)는 감정에 대해 관용적(Liberal)인 반면 주리론자는 감정에 대해서 엄격하다. 조선왕조에서는 주리(主理)의식을 강조했다. 사대부들의 엄정한 윤리의식을 강조했다. 주자학에서는 '네가 원래 가지고 있는 리(理)가 너의 기(氣)를 지배하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불교에도 심(心)과 성(性)에 대한 논의가 많이 있었다.

불교에서도 심(心)은 본성을 말한다. 그 본성을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 즉 인간 본래의 성은 청정한 것이라고 불렀다. 인간의 마음에는 정심(淨心), 즉 깨끗한 마음과 염심(染心), 즉 더러운 마음이 있다. 그러나 결국 이 정심(淨心)과 염심(染心)은 한마음(一心)이다.

 

불교는 번뇌즉보살(煩惱卽菩薩), 즉 번뇌가 곧 보살이라고 한다. 불교는 심과 성을 이원화(二元化)시키지 않는다. 불교의 원래 이론은 좋은 것인데 잘못 해석하면 항상 도덕적 해이를 가져올 수 있다. 불교는 리적(理的)인 세계의 진여문(眞如門)과 기적(氣的)인 세계의 생멸문(生滅門)으로 이원화(二元化)시키지 않았다. 근본적으로 초윤리적(Transethical)이기 때문에 도덕적 해이를 가져올 수 있다.

 

정도전의 철학은 주자학에 기초했다.

불교에서는 심과 성을 구별하지 않았다. 심과 성이 일체화되는 것은 곤란하다. 인간의 마음에는 항상 환원될 수 없는 도덕적 핵심인 성이 있다고 했다. 그의 이론이 전적으로 옳은 것은 아니지만 조선왕조는 주리론적 전통을 고수했고, 따라서 매우 규범 윤리적 사회가 된 것만은 틀림없다.

 

'주자학'은 한 마디로 요약된다.

존천리(存天理) 거인욕(去人慾)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은 항상 몸에) 하늘의 이치를 보존하고 사람의 욕심을 버리는 것이다. 천리(天理)=도심(道心), 인욕(人慾)=인심(人心).

 

'주자'는 또 이렇게 말했다.

음식천리(飮食天理) 요구미미(要求美味) 인욕야(人慾也)

(인간이 배고플 때) 먹고 마시는 것은 천리다. 그러나 맛있는 것을 많이 먹으려는 것은 욕심이다.

 

'주자'는 인욕중자유천리(人慾中自有天理). 즉 사람의 욕심 속에도 천리가 있다고 했다. 천리와 인욕의 구분은 무욕(無慾), 유욕(有慾)의 구분이 아니라 공(公)과 사(私), 시(是)와 비(非), 정(正)과 사(邪)의 구분이다.

주자는 과거제도를 통해 등용되는 공직자들에게 사(私)를 버리고 공(公)을, 비(非)를 버리고 시(是)를, 사(邪)를 버리고 정(正)을 추구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주자학'의 가장 큰 명제는

천리인욕수동시병유지물(天理人慾雖同時竝有之物) 연자기선후공사사정지반이언지(然自其先後公私邪正之反而言之) 역부득불위대야(亦不得不爲對也)

천리와 인욕을 비록 동시에 가질 수 있으나 인욕을 버리고 천리를 따르는 '보편적 가치'를 실천할 수 없는 사람은 공직자가 될 수 없다.

공직자는 시험에 의해서만 권력을 부여 받는 자가 아니다.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은 세종이 지은 악장체(樂章體) 찬불가(讚佛歌)다. 부처님의 중생교화를 예찬하고 있다. 월인천강(月印千江)은 달이 천 개의 강에 비친다는 뜻이다. 즉 부처님의 공덕이 달과 같이 모든 삼라만상에 고루 베풀어진다는 뜻이다.

'석보상절(釋譜詳節)'은 1447년 세조가 지은 석가모니 일대기인데 석가의 영웅적 일생을 찬탄하는 서사시다.

 

정도전은 불교를 비판하고 개혁하는 패러다임을 정했는데, 조선왕조에서 가장 위대하다는 세종임금은 공자를 찬양하는 글을 지어도 시원찮을 판에 불교를 찬양하는 서사시를 지었다. 왜 그랬을까? 조선 왕조는 1392년 창건되었지만 왕조초기는 아직도 고려문화 즉 불교문화가 잔존하고 있었다.

<영상 '심과 성' 3/4>

 

예나 지금이나 개혁은 어려운 것이다. 아직 민중들은 혁명의 실감을 느끼지 못하였다. 향교보다 절로 가고 싶었다. 세종 때 집현전을 만들고 학사들을 중용하며, 유교를 진흥시켜도 민중들은 불교가 지배하고 있으므로 타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세종은 '월인천강지곡'을 지었던 것이다. 이것은 역사로 볼 때 개혁의 후퇴라고도 할 수 있다. 역사의 패러다임을 바꾼다는 것은 다이나믹(Dynamic)하며 어려운 것이다.

 

정도전의 불교비판

시기심여천상지월(是其心如天上之月) 기응야여천강지영(其應也如千江之影) 월진이영망(月眞而影妄) 기간미상연속(其間未嘗連續)

마음은 하늘 위의 달과 같은 것이다. 달은 실물이지만 천강에 있는 그림자는 모두 헛것이 아닌가? 그 달과 그림자 사이에는 연속성이 없는 것이다.

 

정도전의 문제의식은 세종 보다 훨씬 앞서 있었다.

불교는 감각적 세계를 허환(虛幻)으로 본다. 정도전은 현상과 실제의 이원성을 본질적으로 거부한다. 그래서 월인천강(月印千江)의 노래는 fiction(허구)일 뿐이라고 비판한다. 정도전의 유학적 의식은 세종 때보다 훨씬 앞서 나가있었다. 허망된 것, 그림자적 세계하고 실제 세계를 나누어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림자를 받아들일 수 없다. 모든 것은 실(實)해야만 한다.

 

여지무량지형(如持無量之衡) 칭량천하지물(稱量天下之物) 기경중저앙(其輕重低昻) 유물시순(惟物是順) 이아무이진퇴칭량지야(而我無以進退稱量之也)

이것은 마치 눈금이 없는 저울대를 가지고 천하의 사물을 저울질 하겠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저울 쟁반에 올려진 물건이 무거운가, 가벼운가, 저울대가 내려가는가, 올라가는가, 이것을 오직 물건에만 맡겨둔다면, 내가 추를 움직여서 무게를 잰다는 행위가 없게 될 것이다.

 

고왈(故曰) 석씨허(釋氏虛) 오유실(吾儒實) 석씨이(釋氏二) 오유일(吾儒一) 석씨단절(釋氏斷絶) 오유연속(吾儒連續) 학자소당명변야(學者所當明辯也)

그리고 말하기를 석씨는 허하고 우리 유가는 실하다. 석씨는 둘이고, 우리 유가는 하나다. 불가는 단절적이지만 유가는 연속적이다. 배우는 자들이 어찌 이것을 명확하게 분별하지 않겠는가

 

정도전의 불교비판은 단순한 불교비판이라기 보다 인간이 살아가는데 있어서의 이원(二元)적 사유에 대한 본질적인 도전장을 내고 있는 것이다.

유교는 현실주의적이며 인간세계의 윤리를 주장하고 있다. 반면, 불교와 기독교는 초월주의, 윤회, 열반·지옥, 천당을 믿고 있다.

 

삼봉의 언어는 어디까지나 삼봉 고유의 문제의식 속에서 생겨난 그 자신의 언어이다. 이 조선 땅의 역사현실이 잉태시킨 언어다.

여태까지 우리는 살아있는 우리 조상의 언어를 너무도 읽지 못했다. 그들의 살아 움직이는 삶, 그 자체를 살아있는 모습대로 구성할 능력이 우리에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여기에 우리가 인류의 가장 위대한 사상가이며, 혁명가의 한 사람으로서 삼봉을 재조명해야 하는 당위성이 있는 것이다.

삼봉의 유혼(幽魂)은 아직도 조선의 푸른 창공을 배회하고 있는 것이다.

 

<영상 '심과 성' 2/4>

 

 

 

Posted by 망중한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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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주가 정도전에게 맹자와 이성계 소개

맹자(孟子)의 사상은 공자(孔子)의 사상하고는 매우 다르다.

공자는 체제의 변혁 보다 인간의 심미적 완성에 관심이 컸던 반면에

맹자는 철두철미한 사회적 관심 속에서 혁명(革命)을 논한다.

정몽주로부터 맹자를 받은 정도전은 하루에 반쪽 이상을 읽지 않는 정독을 하며 맹자를 공부했다. 정도전의 혁명에 대한 의지는 이 때에 시작된 것이다.

정몽주(鄭夢周 1337 ~ 1392)

고려 말기 문신 겸 학자. 의창을 세워 빈민을 구제하고 유학을 보급하였으며, 성리학에 밝았다.《주자가례》를 따라 개성에 5부 학당과 지방에 향교를 세워 교육진흥을 꾀했다. 시문에도 뛰어나 시조〈단심가〉외에 많은 한시가 전해지며 서화에도 뛰어났다.

경제적 토대가 빈약하면 그 나라는 흔들린다. 정치라는 것은 경제를 떠나서 생각할 수 없다.

고려 말의 경제상황은 매우 불합리한 상태가 되어 있었다. 토지에 대한 소유권이 없는 관리도 퇴임 후에 수조권(收租權)이 계속 유지되는 불법적 관행이 뿌리 깊고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심지어 한 토지에 9명이 불법 수조권을 주장하며 수탈하는 경우도 허다했으므로 소작농들의 생활은 말할 수 없이 피폐해져 있었다.

고려말의 불합리한 정치 및 경제구조에 대한 변혁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던 개혁파의 중심에는 정몽주가 있었다. 정몽주는 남달리 비상한 정도전을 이성계에게 소개하고, 정도전은 함경도 함주의 막사로 이성계를 찾아 가서 구체적인 혁명안을 제안한다. 위화도 회군 5년 전인 1383년 가을이었다.

조준(趙浚 1346 ~ 1405)

고려 말·조선 초의 문신. 고려 말 전제개혁을 단행하여 조선 개국의 경제적인 기반을 닦고, 이성계를 추대하여 개국공신이 되었다. 제1차 왕자의 난 전 후로 이방원의 세자책봉을 주장했으며, 태종을 옹립하였다. 토지제도에 밝은 학자로 《경제육전(經濟六典)》을 편찬하였다.

정도전은 사전을 폐지하고 모든 토지를 공전으로 하는 균전제를 주창했는데, 모든 자영농자가 땅을 골고루 분배 받는 개인수전(個人授田)의 원칙을 고수했다.

이것은 최초의 완벽한 토지공개념이었다.

이에 대하여 조준은 토지에 대한 수조권만을 문제시하여 수조권을 현직관리에만 한정시켜서 권문세가의 모든 불법적 수탈을 박탈했다. 과전법(科田法)의 시행이었다.

과전법(科田法)

고려 말기에 정도전(鄭道傳)·조준(趙浚) 등 개혁파 사대부들이 사전(私田)의 폐단을 없애고 새로운 경제 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1391년(공양왕 3)에 제정한 토지제도이다. 조선이 건국된 이후에도 계승되어 1556년(명종 11) 직전법(職田法)을 폐지하고 녹봉제(祿俸制)를 실시할 때까지 조선의 양반관료사회를 유지하는 제도적 기초가 되었다.

정몽주는 고려왕조를 유지하는 개혁사상을 구상했다. 혁명노선에 반대했던 정몽주에 의해 정도전은 영주 봉화에서 체포되어 보주(甫州 예천)의 감옥에 갇힌다.

그러던 중 이성계가 해주에서 사냥 중에 낙마하여 부상을 입자 혁명파는 크게 타위축되고 정몽주가 득세한다. 바로 이 때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의 활약이 시작된다. 이방원이 26세 때였다.

방원이 이성계를 개성 집으로 모셔 들이자 정몽주가 문병을 한다.

이 때에 방원은 하여가(何如歌)를 불러 정몽주의 속 마음을 떠보려 했고, 정몽주는 역성혁명의 뜻이 없음을 단심가(丹心歌)로 화답한다.

하여가(何如歌)

此亦何如 彼亦何如 城隍堂後垣 頹落亦何如 我輩若此爲 不死亦何如

이런들 엇더며 져런들 엇더료, 만수산(萬壽山) 드렁○이 얼거진들 엇더리, 우리도 이치 얼거져 백년(百年)지 누리리라

 

단심가(丹心歌)

此身死了死了 一百番更死了 白骨爲塵土 魂魄有也無 向主一片丹心 寧有改理也歟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여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역사의 아이러니, 비정함이란 여기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난다.

조선 건국에 성공한 이씨왕조는 충절의 표상으로써 정몽주를 우대하고 혁명의 1등 공신이며 조선 건국의 주역이었던 정도전을 '역적' 내지는 '권력투쟁의 패자'로 각인시키고 만다.

조선 초기부터 진행된 정도전에 대한 이런 작업들로 인해서 조선은 진취적이지 못하고 낙후되어 갔으며 보수적인 사회가 될 수 밖에 없었다.

이런 것이 바로 지배자의 역사왜곡이며 민중의 불행이었던 것이다.

정몽주가 자기 신념에 따라 충절을 지킨 비장한 인물로 평가되듯이 정도전 또한 자기 이념에 따라 비장한 최후를 맞은 성공적 혁명가로 평가되어야 마땅하다.

삼봉 정도전의 조선경국전에는 철학이 있다. 그것은 철저하게 민본주의적이며 철저하게 개혁적인 것이었다. 성종 때에 편찬된 경국대전은 지배력 유지와 강화를 위한 통치수단일 뿐, 이러한 철학이 빠져버린 것이다. 위대한 혁명가를 배척한 결과는 그렇게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광범위한 노예제도를 배제한 그리스의 민주주의 사상과 달리 동양의 공자와 맹자의 민본주의는 신분의 차별이 없는 진정한 민주주의였다. 다만 '민의'를 반영하는 제도적 장치가 미비했을 뿐이다.

마그나카르타(Magna Carta)

1215년의 대헌장. 이것은 왕권으로부터 귀족들의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귀족헌장에서 발전한 것이 17세기에 이르러 왕권과 의회의 대립에서 왕의 전제(專制)에 대항하여 국민의 권리를 옹호하기 위한 최대의 전거(典據)로서 이용되었다.

한국은 서구의 선거제도가 가장 빨리 정착된 나라다. 이것은 동아시아는 물론 전세계적으로도 유래를 찾기 어려운 일인데, 그 이유는 한국민에게는 이미 유구한 민본, 민주의 사상이 내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민주라는 개념에 있어서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앞서있는 민족이고 전통을 가진 민족이다.

하지만 민주라는 용어는 추상적이기 때문에 애매하고 국민을 기만하기 쉬운 용어다. 여기에 속으면 안된다.

민주는 치세(治世)의 방법에 관한 것이며 역사의 목표가 될 수는 없다. 말하자면 민주는 그것 자체로 목표가 될 수 없고 항상 무엇인가를 위해서 존속하는 정치방법론일 뿐이다.

포은이나 삼봉이 가장 고뇌하고 가장 이루고자 했던 역사의 목표는 '반부패'였다. 역사의 목표는 '반부패'인 것이다.

동학의 이념은 보국안민이었다. 외세로부터 나라를 보호하자는 보국(保國)이 아니라 그릇된 것을 바르게 하고 썩은 것을 도려내야 한다는 보국(輔國) 안민(安民)이었던 것이다.

조선경국전 정보위 (正寶位)에서 인용한 주역(周易) 계사(繫辭) 하전(下典)의 인용문에 정도전의 혁명사상이 드러나 있다.

天地之大德曰生이요 聖人之大寶曰位니 何以守位오 曰仁(人)이요 何以聚人고 曰財니 理財하며 正辭하며 禁民爲非曰義라

천지(天地)의 큰 덕(德)을 생(生)이라 하고 성인(聖人)의 큰 보배를 위(位)라 하니, 무엇으로써 지위를 지키는가? 사람이며, 무엇으로써 사람을 모으는가? 재물이다. 재물을 다스리고 말을 바르게 하며 백성들의 비행(非行)을 금함을 의(義)라 한다.

정도전은 주역 계사 하전 본문의 순서를 바꾸고 편집하여 인용했다.

즉 조선의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서 국가 보다도 군주를 앞에 두고(聖人之大寶曰位), 뒤에 군주의 자리를 지키는 덕목으로서 백성의 마음을 생생하게 하는 인(何以守位曰仁)을 두었으며 그 사이에 천지 대덕인 생(天地之大德曰生)을 배치함으로써 위(位)→생(生)→인(仁)의 '국가통치철학'을 정리한다.

통치자는 언제 새롭고 새로와져야 하며, 민중의 마음도 언제나 새롭고 새로와지도록 하는 것이 바로 정도전이 세운 조선의 통치이념이자 국가철학이었다.

우리가 정도전을 공부하고 논하는 것은 역사의 생명력을 새로 느끼자는 것이고, 우리가 앞으로 해야만 할 일은 역사의 혁명, 가치관의 혁명을 이루는 것이다.

Posted by 망중한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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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학문의 시대, 보편적인 것을 추구했던 시대로부터 이제는 국학의 시대, 주체적 사고를 해야 할 시대가 왔다.

최근에 국내 영화계는 헐리우드 영화에 비해 한국영화의 점유율이 50%를 넘고 있다. 이 것은 세계적으로 유래가 드문 현상이다.

영화 실미도의 두 주인공, 안성기와 설경구 씨를 초대했다.

 

안성기 : 1952년생. 5살 때 김기영 감독의 '황혼열차'에 아역배우로 데뷔한 후 70편이 넘는 영화를 통해 국민배우로 자리잡았다.

설경구 : 1968년생. 한양대학교 연극영화과 출신. 연극배우로 활동하다가 영화 '꽃잎'으로 영화계 입문.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에서부터 강렬한 성격배우로서 이미지가 각인됨. "나는 연기를 잘 모른다. 현장의 팀웤 속에서 나의 연기가 살아 날 뿐이다."

실미도사건 : 1971년 8월 23일, 한국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던 역사적 사실. 현대사의 굴절된 모습들이 이 사건에 얽혀 있다. 684부대는 김신조 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당시 중앙정보부가 만든 특수부대였다. 31명 전원 사망. 실미도사건은 국가권력의 횡포와 역사왜곡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우리 역사에는 영화의 훌륭한 소재가 될만한 사건들이 많다. 하지만 정치적 속박으로 인해 예술가의 상상력이 발휘되지 못했다. 정치적 속박은 예술의 빈곤으로 나타난다. 예술가의 상상력은 억압되어서는 안된다.

예술은 어떠한 경우에도 사회적 기능을 외면할 수 없다. 영화 '실미도'는 왜곡된 역사의 실상을 일깨우는 강렬한 도덕적 기능이 있다. 예술가의 상상력은 민주의 축복이다.

우리의 역사는 세계적인 사상가들이 기라성 같이 포진되어 있는 역사다.

우리가 '위대한 정치가'라고 할 때에 링컨이나 처칠을 떠올리기도 하지만, 우리가 역사에서 위대한 정치가요 사상가로 떠올려야 할 사람은 삼봉 정도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정도전 : 1342~1398. 조선왕조를 건국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대 사상가며 정치가. 본관은 봉화(奉化) 자는 종지(宗支) 호는 삼봉(三峯)

처칠에게는 위대한 정치가라고 생각하면서 우리 민족의 위대한 정치가인 삼봉 정도전은 떠올리지 않고 있다는 것은 우리 역사의 비극이다.

조선왕조의 사상은 방대하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6개월 동안에 다룰 수 있는 조선시대 사상은 '처음'과 '끝' 정도에 국한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우리 역사에서 '변혁'을 떠올리라고 하면 흔히 구한말, 개화기를 거론한다. 하지만 그 시기 만큼, 어쩌면 그보다 훨씬 큰 엄청난 변혁기가 있었다.

바로 '고려말에서 조선초로 넘어 가는 시기'야말로 구한말 개화백경(開化百景)의 격변을 능가하는 시기였다.

국가와 사회와 가족, 친족관계를 비롯하여 종교와 사상과 문화까지 모두 바뀌는 대격변의 시기였던 것이다.

혁명(革命)이라고 할 때의 혁은 간다, 완전히 바꾼다는 의미의 혁(革)으로써 주역의 49번째 괘(卦)를 말하며 정(井)괘의 다음에 온다. 서괘(序卦)는 "우물이 썩으면 물을 퍼내어 갈아야 한다"고 했다.

우리 역사에서 '혁명'이라고 부르는 사건은 무엇이 있을까? 동학혁명(東學革命), 4.19혁명, 5.16 등 세가지 사건 정도가 있는 것 같다.

혁명이라고 할 수 있으려면 첫째 주체가 있어야 하고 둘째 왕조 또는 지배세력이 바뀌어야 한다. 역성혁명(易姓革命)이라고도 부르는 것인데, 왕의 성이 바뀐다는 뜻이다.

일본 역사에는 혁명이 없다. 천황제 하에서 신하의 변화만 있다.

왕의 권력과 비슷한 권력을 가진 막부의 우두머리 조차도 '왕'이라는 칭호를 쓰지 않고 '쇼군(將軍)' 즉 장군이라고 칭했다. 물론 이 쇼군은 우리나라의 '장군'과는 그 쓰임이나 의미가 전혀 달랐다. 일종의 '왕'의 개념이었던 것이다.

역사상 혁명이 없었던 일본은 연속성이라는 특징은 있지만 그만큼 부패하기도 쉬운 나라이다.

동학(東學)은 정치사적으로 명(命)을 갈지 못한 좌절된 운동이었다. 그러나 조산왕조의 가치관을 근원적으로 뒤엎은 사건이었으며, 우리 민족의 근대적 자아(自我)의 출발이었다.

5.16은 혁명이라고 부를 만한 사건이 아니다. 왜냐하면 명(命)을 갈고자 하는 혁명의 주체세력은 바로 4.19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5.15은 4.19의 혁명정신과 주체세력으로부터 정권 만을 강취하였기 때문에 혁명이라고 하지 않고 '군사 쿠데타'라고 하는 것이다.

이색, 정몽주, 정도전, 권근, 하륜, 조준, 남은, 이숭인 등 공민왕 때 득세한 고려말 개혁파 신진유생들은 개혁정책을 주창하고 시도하였으나 계속되는 실패로 좌절하게 되었으며, 이 중 정도전의 주도로 이성계를 옹립하여 조선이 개국하게 된다.

1383년에 정몽주의 주선으로 정도전이 이성계를 만나고 1388년에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1392년에 조선왕조를 개창하게 된다.

조선건국을 혁명이라고 볼 수 있는 뚜렷한 근거는 정권교체 보다도 분명한 개혁의 의지가 있었다는 점이다.

조선건국혁명의 주도세력이었던 정도전은 1398년 태조 7년 8월에 사병혁파에 불만을 품은 이방원에 의해 세자였던 방석과 함께 척살된다. 1차 왕자의 난이라고 한다.

정도전의 고려사회 개혁 프로그램은 1. 토지개혁 2. 종교개혁 3. 군사개혁

3가지로 요약되는데, 이 개혁을 실현해 나가는 과정에서 정도전은 끊임없는 저항에 부딪치게 된다.

이러한 정도전의 개혁사상은 애초에 많은 박해를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삼봉 정도전은 34세 때인 1375년부터 2년간 나주목 회진현 거평부곡 소재동(消災洞)에서 유배생활을 한다(현재의 전라남도 나주시 다시면 운봉리 백동마을). 이 유배생활을 통해 삼봉은 백성들의 삶을 체험하고 사회개혁의 필요성을 통감하게 된다.

또한 '답전보' 같은 유배문학을 남긴다.

답전보(答田父) : 밭 가는 이에게 답함(애칭이나 존칭의 의미로 父를 '보'로 읽는다).

정도전의 이 유배문학은 고려말 우리 민중들의 소리를 알려 주는 귀중한 문헌이다. 600여년 전의 소리를 지금 우리가 이자리에서 생생하게 들을 수 있다는 것은 역사의 진실이요 감격이다.

유배지 생활을 통해 정도전은 지식인의 사명에 대한 통렬한 자기 반성, 민중의 갈망하는 바를 뼈저리게 느끼는 계기가 되었다.

도올 김용옥은 우리 시대와 더룸어 호흡해 온 사상가이자 의사, 극작가, 교육자입니다. 고려대학교, 국립대만대학교, 일본 동경대학교, 미국 하버드대학교에서 동서양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편집자 주>

Posted by 망중한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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