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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7.02.04 도올 김용옥 - 우리는 누구인가 제15강 '죽음과 호적'

노자(老子)강의가 끝날 때 어머니를 EBS에 모셔서 인사를 드린 적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저를 만날 때마다 감동적 이었다고 하면서 안부를 물어주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지난 45일 향년 95세로 유명을 달리 하셨습니다. 1910년생이니까 20세기를 거의 완벽하게 채우신 분입니다. 우리 민족의 모든 고난과 영광을 역사와 함께 하신 분입니다.





어머니께서 운명하시는 순간에 느낀 것 하나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머니는 혼수상태로 계시다가 깨끗하게 돌아가셨습니다. 숨이 딸깍하는 순간에 육신을 보니까 완벽하게 그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그러나 그 딸깍하는 그 순간의 느낌은 너무도 달랐습니다. (한의학에서 말하는) 살아 움직이는 경락이 순간적으로 사라지고 (얼굴 모습은 그대로였지만) 시신의 얼굴(느낌)은 정말 달랐습니다. 가슴에 귀를 대어보니 심장은 안 뛰고 꾸르륵하는 소리가 났습니다. 그 순간에 펑펑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막내인 저는 엄마 젖을 오래 빨았는데, 초등학교 때까지도 나오지도 않는 젖을 빨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제가 막내기 때문에 (어머니의) 정이 깊었습니다. 나오지도 않는 젖을 빨던 때가 생각났습니다.

인간이 태어나서 죽는 순간까지의 변화는 인간의 생애에 있어서 0.001%의 변화도 안되는 것입니다. 바로 딸깍하는 순간의 변화가 99,999%의 변화였습니다. 죽는 순간의 변화는 너무나 큰 것입니다.

 

인간의 생명이라는 것은 손가락 하나를 움직이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과의 사이에 있습니다. (이것이) 기적 같은 사실입니다.

손가락 하나를 움직이려면 생명의 작동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생명이 있고 없고의 차이라는 것은 그게 전부라는 것입니다.

태어나서 죽는 순간까지의 사이에서 변화라는 것은 너무나 미미한 것임에도, 그 안에서 우리는 싸우고 남을 미워합니다.

생명을 보유하고 있는 한, 인간은 더없이 귀하고 소중하며 평등한 존재입니다. 생명이 있는가와 없는가, 그것이 인간의 전부입니다. 생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 사는 것의 고귀함을 한번 생각해 봐야 되겠습니다.

 

돌아가신 자리에서 시신을 옮기지 않고, 전통적인 예식에 따라 그 양반이 사시던 곳, 즉 집에서 했습니다

그대로 백()이 가라앉고 혼()이 날아 갈 수 있다고 믿기에 시신을 옮기지 않았습니다. 빈소는 영안실을 빌렸지만 시신을 옮기지는 않고 집에서 염을 하고 입관을 했습니다.

 

누나가 어머니의 수의가 든 함을 가져왔습니다.

어머니가 생전에 손수 마련하신 수의 보따리 속에는 80년 전 시집 올 때 입었던 다홍치마와 연두색 저고리가 있었습니다. 어머니께서는 그 옷을 입고 가시겠다는 뜻이었습니다. 어머니의 수의 같은 이런 수의가 우리 민족사의 마지막 수의일 것입니다.

장례식 집사자는 이렇게 정성스럽고 아름다운 수의는 처음 보았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운명했었을 때 자기의 삶의 터전이었던 그 자리에서 염()을 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그 삶의 코스모스에서 혼()은 하늘로 가고 백()은 땅으로 스미게 됩니다.

 

코스모스(Cosmos) 질서와 조화의 구현으로서의 우주

 

저는 평생을 기독교신앙으로 살았으면서, 기독교 철학을 공부했으면서, 기독교 울타리 안에서만 인류 운명을 다룰 수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신앙의 영역을 넓혀갑니다. 기독교도 입장에서 본다면 제 행동이나 사상이 이단자 같을 수 있고 기독교를 부정하는 것 같이 보일 수도 있습니다.

빈소에 스님이 찾아오면 저는 염불을 하게 하고 (염불 못할 것이 어디 있어요?!) 교회에서 조문객이 오면 앉아서 찬송가를 부르게 했습니다. 당연한 거지요.

 

어머니는 당신의 아들 김용옥의 사상에 대해서 개입하신 적이 한번도 없었습니다. 제가 대학을 다닐 때 어떤 사상을 깨닫게 되어 어머니께 이야기를 하면 어머니는 참으로 재미있게 들어주셨습니다. ‘칸트헤켈이니, 무슨 이야기 등 제가 나름대로 깨달은 것을 이야기하면 어머니는 몇 시간이건 들어주셨습니다. 어머니처럼 제 강의를 잘 들어 주신 분이 없습니다.

 

우리 사회는 인간에 대한 평등관이 더 필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어머니는 나처럼 공부를 하신 분이 아닙니다. 대단한 교육을 받으신 분이 아니지만, 내가 아무리 어려운 이론을 개발했어도 그것들을 모두 이해해주셨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그러한 제 모습을 통해서 당신이 교화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한 이야기의 상당부분은 어머니의 신앙을 무너뜨리는 이야기였습니다.

형들은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이단이라 할지 몰라도, 우리 어머니는 100% 나의 사상을 이해하시고 한번도 내가 그릇된 길로 가고 있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없습니다.

 

영상 : 도올 김용옥 - 우리는 누구인가 제15'죽음과호적' 1/4

 

 

진짜 기독교 신앙이라 하는 것은 나를 핍박하는 자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나를 죽이려는 원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사랑)이 없으면 기독교가 아닙니다.

나를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하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선거를 앞두고 있는 시점에서 우리는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만 좋아하고 선거의 당락만 생각한다면 우리 사회의 본질과 대의는 잊어버리게 됩니다.

 

기독교는 증오의 종교가 아니고 사랑의 종교입니다.

구약이 인간에게 증오를 가르쳤다면, 신약은 철저하게 사랑, 무조건 적인 사랑을 가르쳤습니다.

인간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모두가 평등합니다. 숨을 딸깍하는 순간까지도 인간의 고귀한 모습입니다.

 

저는 늙어가고 있습니다. 젊은이가 부럽습니다.

벌써 공부도 제대로 못했는데 벌서 이렇게 늙어 가는구나그렇지만, 결국은 이렇게 살아 숨쉬고 있다는 것 자체가 고귀하고, 이것이 기쁘고, 이것이 고귀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앞으로 동학을 강의할텐데, 동학사상은 오늘의 우리 모습을 이해하는데 아주 중요한 우리 민족의 Bible이라고 생각합니다.

동학사상의 모든 가능성은 동학 이전의 최한기(崔漢綺)라는 사상가에 의하여 그 시대적 정신이 구현되어 있었습니다. 최근에 이 최한기라는 걸출한 사상가에 관한 아주 재미나는 문헌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오늘은 그것을 중심으로 그분의 족적을 한번 보기로 하겠습니다.

 

(조선시대) 양반집 호적등본은 어마어마했습니다. 지금 보시는 것은 정확하게 준호구(準戶口)‘라는 것입니다.

조선왕조를 우습게 보는 사람도 있지만, (사실) 조선왕조는 대단한 나라입니다. 조선시대에는 백성(국민)이 누구인지를 알기 위해 3년마다 호구조사를 했는데, 출생자, 이주자, 사망자를 모두 조사했습니다. 그것을 호적중초(戶籍中草)라 하며, 정식 호적을 만들기 위한 전단계의 기초 자료로써 신청자(호주)가 직접 작성합니다.

 

호주(戶主)라는 말은 일제의 산물이고 당시는 주호(主戶)라고 했습니다.

主戶는 그 호()의 주인이라는 호주의 개념이 아니라 그 집에서 부역, 병역 등의 국역(國役)을 담당할 대표적 인물을 말하는데, 호주라는 말 자체가 남성 중심입니다.

 

미국과 일본은 여자가 결혼하면 여자의 성()이 없어지는데 한국은 여자 성이 없어지지는 않습니다.

 

주호(主戶) : 단순한 호주의 개념을 넘어서 국역(國役)을 담당

 

우리나라의 호적제도는 완벽하게 양성 평등, 즉 남녀평등제도입니다.

(이 부분에서 우리나라는) 17세기 중엽까지만 해도 거의 남녀가 평등한, 세계적으로 드문 남녀 평등 사회였기 때문에 남편이 죽으면 부인이 승계했습니다.

19세기 말엽 최한기의 호적에도 남자 쪽 4(四祖)가 나오고 그 다음에 여자 쪽 4(四祖)(함께) 나옵니다.

 

호적중초(戶籍中草)는 집에서 작성해서 향청(鄕廳 지방의 말단 기관=주민센터)에 제출하는데, 최한기는 서울에 살았기 때문에 한성부에 제출합니다.

이 당시의 한성부는 서울의 호적만 관리하는 것이 아니고 전국의 호적을 모두 관리했습니다. 제출된 호적문서는 호적고(戶籍庫 호적을 보관하는 곳)에 보관되었기 때문에 인구가 많은 곳의 호적고는 규모가 컸습니다.

 

호적단자(戶籍單子)를 제출하면 받았다는 (접수) 도장을 찍고 관청에서 보관했습니다. 호적에는 주소가 적혀 있었고, 과거(科擧) 보러 갈 때나 송사(訟事) 등에 초본이 필요하면 관청에 가서 필사본을 발급받을 수 있었습니다.

 

함풍(咸豊 중국의 연호) 2(1852) 모월 한성부에서 발급.

(당시 최한기의 주소지) 한성부 (漢城府) 서부(西部), 양생방(養生坊), 송현계(松峴契), 삼통(三統), 삼호(三戶)에 사는 생원(生員) 최한기(崔漢綺). (() > ())

 

호적단자(戶籍單子)는 호주가 손수 써서 향청(鄕廳)이나 한성부(漢城府)에 제출하는 호적원문입니다.

한성부(漢城府=서울)는 태조 5년에 1396년 정도전이 552방으로 나누고 그 이름도 만들었는데, 조선말까지 유지되었습니다.

 

(과거시험의) 문과에는 대과와 소과가 있었습니다.

소과는 생원시, 진사시로 나뉘었는데, 초시(初試)를 거쳐 회시(會試)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갈 자격을 얻는 자를 생원(生員)이라고 했습니다.

 

崔漢綺 호적 서문

崔漢綺 年五十 癸亥生 本朔寧

通政大夫 昆陽郡守 兼晋州鎭管兵馬同僉()節制使 光鉉

生父 學生致鉉 學生配觀 曾祖 成均生員之嵩

外祖 本安東 娶朴氏 齡五十三 庚申生 籍蕃南 父 學生宗赫 學生經源 曾祖 學生師完

外祖 通訓大夫 行魯城縣監 兼公州鎭管兵馬節制徒尉 李集明 本慶州 率有幼學柄大 年三十四 己卯生 娶申氏 齡三十七 丙子生 籍高齡 率奴婢秩 五月 年庚子生 不知 母婢一分 一所生

최한기는 나이가 50이며, 계해생이고, 본관은 삭녕이다.

아버지는 통정대부이며 곤양군수와 진주진관병마동첨절제사(무관 벼슬)를 겸직한 광현이다.

사조의 생부는 학생 치현이고, 조부는 학생 배관이다. 증조부는 성균관 생원이며 이름은 지숭이다.

외조부는 김박 이고 (이 당시 호적 기록에 사용된 종이는 호적지라고 해서 질이 좋지 않았는데, 특히 이 종이는 질이 나쁜 것이기 때문에 이름의 가운데 자가 없어졌다) 본관은 안동이다.

아내는 박씨이고 나이는 53(최한기 보다 3세 위)인 경신생이며 본관은 반남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학생 종혁, 조부는 학생 경원이다.

 

영상 : 도올 김용옥 - 우리는 누구인가 제15'죽음과호적' 2/4

 

 

증조는 학생 사완이고, 외조는 통훈대부로, 로성 현감과 공주진관병마절제도위를 겸직한 이집명이다. 본관은 경주이며. 슬하에 유학 병대가 있는데 그의 나이는 34로 기묘생이고 아내는 신씨이며, 나이는 37, 병자생이고 본관은 고령이다.

 

노비를 여러 명 거느리고 있는데 차례로 말하면, 여자 노비는 이름이 오월이며, 나이는 경자생이고, 그녀의 아비는 알 수 없으며, 어미의 이름은 일분이고 소생이 하나 있다.

 

기유(己酉 1849) 호구상준자(戶口相準者)

이 호적은 3년 전의 호구와 비교하여 같다는 의미

 

최항(崔恒 1409~1474)

삭녕 최씨(朔寧崔氏) 중 유명인사. 조선 초기의 문신(文臣).

<용비어천가> <동국정운> <훈민정음 해례> <경국대전> 등 찬진.

 

최한기의 호적에 들어있지 않은 아들과 딸들은 반드시 딴 곳에 등재되었을 것입니다. 당시 국가(조선)에서는 호구가 많아야 세수(稅收)가 많았기 때문에 등재하는 쪽에서는 될 수 있는 대로 (호적을) 줄이려 했던 반면에 조정에서는 늘리려 했습니다. 이런 것은 조선조 호적제도의 문제점이엇습니다.

 

조선조의 호적은 양반이라는 신분을 과시하고 과거 때 사용되는 것이기도 하지만,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양반들의 재산인 노비문서도 되었기 때문에 호적에는 노비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적었습니다.

 

노비(奴婢) ()=남자 종, ()=여자 종.

 

양반들은 노비의 숫자를 증가시키기 위하여 천자수모법(賤子隨母法)을 제정했습니다.

고려시대인 1039년 처음 제정된 이 법은 고려시대부터의 풍습이 된 악법(惡法)이었습니다.

어미가 천인이면 비록 아비가 양인이라 할지라도 어미의 신분을 따라 천인이 된 것인데, 노예의 숫자를 늘리려는 데에 이 법의 목적이 있었습니다.

양반들에게는 좋은 법이었으나 국가적으로는 손해였습니다. 노비로부터는 세금을 거두지 않았기 때문에 노비제도는 조선왕조의 큰 문제점이었습니다.

 

노비제도를 폐지하려고 해도 양반들이 반대했습니다.

(조선왕조에서) 노비제도가 없어진 것은 동학농민혁명 때인 갑오경장 이후 부터입니다. 갑오경장(甲午更張) 당시에, 동학혁명의 요구 중 하나는 노비제도의 폐지였는데, 갑오경장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노비제도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17세기 내지 18세기에는 노비의 인구가 확실하게 전체 인구의 절반을 넘었습니다. 오늘 여기에 계신 여러분들 중 절반이 노비의 후손들입니다. 그것은 속일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와서 양반 상놈 따지는 것은 전부 사기입니다.

 

종들은 아버지를 모르고 태어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노비 문서의 성명은 대부분이 이뿐이=, 개똥=, 칠돌=七乭(돌 밑에 을의 음을 따서 씀) 등등 아무렇게나 지은 이름이다.

 

영상 : 영상 : 도올 김용옥 - 우리는 누구인가 제15'죽음과호적' 3/4

 

 

조선시대의 공문서 결재(決裁)는 한성의 당상관(堂上官 정삼품-지금의 국장급 이상)이 수결(手決)로 했습니다. 서양보다 우리가 먼저 수기(사인 私印)을 했던 것입니다. (도장은 일제의 산물)

그러나 한성 같은 데서는 민원이 많아 사인을 도장화(圖章化)하여 사용했습니다. 최한기의 호적에 나오는 결재 사인(私印)은 수결이 아니고 사인을 도장화한 것입니다.

 

사조(四祖)란 부(), (), 증조(曾祖), 고조(高祖)를 말하는데, 호적에는 먼저 남자 쪽 사조(四祖)가 나오고 그 다음 여자 쪽 사조(四祖)가 나옵니다.

호주인 남자 쪽이 사망했을 때, (지금은 아들이 승계하지만) 고려시대를 거쳐 17세기 중엽까지, 즉 장자상속의 유교 종법사회 이전까지는 완전히 남녀평등이었기 때문에 여자가 승계(상속)를 했습니다.

이것은 세계적으로 드문 일입니다.

 

최한기는 44살에 문과에 급제했습니다.

부자간의 연령 차이가 16살이었는데, 16살 연하의 아들이 그의 평생 친구였습니다. 책을 저술하면서 아들과 담소하고 아들이 아버지의 글을 필사하면서 사이 좋게 살았다고 합니다.

 

많은 노비를 거느리고 살았던 최한기의 말년은 엄청나게 가난해져서 저서를 쓰는데 종이가 없어서 쌀을 외상으로 빌려 종이를 사왔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최한기가 망한 이유는 책을 너무 많이 사느라 가산을 탕진했기 때문입니다.

당시에 신간 서적이 나오면 한양(서울)의 모든 서점이 최한기에게 가져갔다고 합니다. 최한기는 이처럼 책을 사기 위해서 집도 팔고 패가망신을 했다고 하는데, 다음의 일화를 읽으면 책에 대한 그의 애착을 알 수 있습니다.

 

或言購書多費者(혹언구서다비자) 惠岡曰(혜강왈) 假令此書中人(가령차서중인) 竝世而居(병세이거) 雖千里(수천리) 今吾不勞以座致之(금오불로이좌치지) 購書雖費(구서수비) 不猶愈於齎而適遠乎(불유유어재리이적원호)

어떤 사람들은 내가 책을 사는데 돈을 많이 쓴다고 하는데, 가령 이 책 속의 사람이 수 천리 떨어져 살고 있다면 그 먼 길을 갔다 와야 할 것인데 책을 사면 돈이 들지언정 나는 지금 힘 안 들이고 앉아서 그 사람을 볼 수 있으니 얼마나 행복한가!

 

구서(購書 책 구입)에 가산을 탕진한 최한기는 말년을 초라하게 보내다가 죽었지만 그는 죽을 때까지 학문에 대한 열정 속에서 살았던 분이며, 이런 분들의 노력으로 우리는 이렇게 개명된 세상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영상 : 영상 : 도올 김용옥 - 우리는 누구인가 제15'죽음과호적' 4/4

Posted by 망중한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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