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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과 민족을 사리사욕의 제물로 삼는 자들이 용인되는 나라

대의를 모르는 정치인은 깡패와 같다

 


 

 

박근혜 탄핵으로 국정이 중단되었다. 현역 대통령이 피의자 신분으로 수사기관에 입건되어 수사를 받는 사상 초유의 일이 벌어졌다.

 

탄핵소추의 이유는 최순실이 표면화된 국정농단 사태인 것으로 되어 있지만, 최순실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정관계와 경제계까지 좌지우지할 수 있었던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래 전, 박정희와 육영수 그리고 박근혜의 이야기로 거슬러 올라가야만 한다.

 

그것은 시골의 빈농에서 태어난 똑똑하고 출세욕이 남달리 강했던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되는 비극이자 국가와 민족이 겪어야만 했던 수난의 역사이며 한 집안의 영화와 참혹한 몰락의 드라마이기도 하다.

 

박정희는 친일인명사전에도 이름이 오른 대표적인 친일파(친일 반민족행위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항일/독립운동가들을 압살할 목적으로 일제가 설립하고 운영한 만주군관학교를 나와 독립군 토벌에 앞장섰던 박정희는 개와 말 같은 충성을 맹세하는 혈서를 써서 일왕에게 바치고 일본 육군사관학교까지 나올 수 있었고, 졸업 후에는 일본 정규 관동군의 장교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광복을 맞아 친일파 단죄의 사회 분위기가 무르익자 박정희는 그의 형과 함께 공산주의자로 변신하여 남노당 간부(군책)로 활동한다.

 

박정희는 반공정부가 수립된 후 체포되어 재판에 넘겨져 사형이 선고된다. 그러나 남노당 조직을 밀고하는 대가로 사형에서 무기로 감형되고 최종 15년 형이 확정된다.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사면되어 군에 복귀한 박정희는 친일파와 연합한 이승만 정권에서 일본군 장교의 경력을 인정 받으며 육군 소장까지 진급, 성장하다가 1961 5 16일에 김종필 등과 함께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으로 군정을 하다가 1963년에 대통령이 된다.

 

박정희는 38년간 장기집권하며 독재를 휘두르다가 재일교포로 알려진 문세광의 흉탄에 아내를 먼저 잃은 다음 본인 자신도 심복인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에 맞아 암살되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다. (처 : 희’)

 

정상적인 것으로 보기 어려운 박정희 일가의 영욕의 과정에서 박정희의 자녀들이 가졌을 삶과 국가와 사회와 정체와 권력 따위에 대한 철학과 가치관이 어땠을 것인지를 짐작하는 것은 독재 장기집권의 과정과 아내와 본인이 사망하는 과정과 그 이후 현재까지 이어져 온 자녀들의 삶의 모습을 보면 어렵지 않다.

 

최순실의 부친인 최태민은 일제 고등계 형사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고등계란 요즘 말로 정보과 또는 공안부를 의미한다. 광복 후 직업을 수십번 바꾸는 중에 무당과 사이비 종교의 교주까지 지낸 것으로 알려진 바와 같이 노련한 최태민이 졸지에 모친을 여의고 실의에 빠진 박근혜에게 접근하여 그녀의 신임을 얻기는 크게 어렵지 않았을 것 같다.

대를 이은 비극, 최순실 사태가 시작되는 배경에 최태민이 있었고, 최태민의 등장에 고 육영수 여사의 죽음이 있었고, 그 죽음에는 변절한 공산주의자가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은 열강의 침략적 제국주의와 자본과 노동의 이데올로기 대립의 세계사적 흐름에 놓여 있었다.

 

탄핵정국에서 나온 동생의 변명은 이 비극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에 대해 인간적인 시각으로 되짚어 보게 한다. 그래서 더 착잡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차가운 비웃음의 안 쪽에 있는 측은지심, 그들은 민중의 그것에 기대어 지탱해왔을지도 모른다.

 

영상 : 박근혜 5촌간 살인사건 의혹 총정리-미디어협동조합

 

 

 

박근령, 탄핵반대 집회서 눈시울 붉히며.. "언니는 억울하다"

 

 

 

박근혜 대통령 여동생 박근령 전 육영재단 이사장이 박 대통령을 두둔했다.

 

박근령은 남편 신동욱 공화당 총재와 지난 4일 서울 중구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열린 '16차 탄핵 반대 집회'에 참석했다. 오는 10일이 유력해 보이는 탄핵심판 선고를 눈앞에 두고 박근령은 박 대통령의 억울함을 토로하고 무죄를 주장했다.

 

박근령은 종합편성채널 채널A와 나눈 인터뷰에서 "탄핵소추를 당할 만한 중대한 헌법위반이 없었다. 태극기 한 사람 한 사람 마음이 재판장님들께 닿았으면 좋겠다"고 주장했다. "최순실에게 속은 것이 죄라면 죄"라고 덧붙이며 "최근 1~2년만 보지 말고 30년 넘게 국민들이 지켜본 박 대통령을 지켜봐달라"고 동정을 구하기도 했다….

파이낸셜뉴스 기사 원문보기

 

 

 

박근혜 탄핵, 신동욱 "1987년 육영재단 분쟁 때 최태민 언급하면 천벌받는다고 감싸…10년 전 노태우에게 탄원서 보내기도 했다" 예고된 논란

 

 

 

박근혜 대통령과 '비선 실세' 최순실의 유착관계가 드러나 논란이 일고 있는 가운데, 박 대통령의 동생 박근령 씨가 10년전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 보낸 탄원서가 재조명되고 있다.

 

박근령 씨의 남편 신동욱 씨는 26 TV조선과의 인터뷰에서 지난 2007년에 있었던 일에 대해 언급했다.

 

신동욱 씨에 따르면 박 대통령과 박근령 씨의 사이가 멀어진 것은 1984년 어린이재단 분규와 1987년 육영재단 분쟁을 거치면서 최순실 씨의 아버지 최태민 씨가 재단 업무에 지나치게 개입했기 때문이다.

 

당시 박근령 씨가 최태민 씨를 내보내야 한다고 했지만, 박 대통령은 "최태민을 언급하면 천벌 받는다"며 그를 감쌌다.

 

이에 박근령 씨는 1990년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 "진정코 저희 언니는 최태민씨에게 철저히 속은 죄 밖에 없습니다. 속고 있는 언니가 너무도 불쌍합니다"라는 내용의 자필 탄원서를 보냈다.

 

박근령 씨는 탄원서에서 "최씨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언니의 청원을 단호히 거절해 주시는 방법 외에는 묘안이 없습니다. 그렇게 해 주셔야 최씨도 다스릴 수 있고, 우리 언니도 최씨에 대한 잘못된 인식과 환상에서 깨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고 부탁했다.

 

하지만 이후 두 사람의 관계는 급격히 소원해졌고, 결국 최순실 씨 PC에서 발견된 파일로 인해 박 대통령 탄핵과 하야, 레임덕 등의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조선닷컴 기사 원문보기

 

 

 

박 대통령 5촌 살인사건, 하드디스크에 담긴 진실은?

 

 

 

5일 방송되는 JTBC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에서는추적 2, ‘VIP 5잔혹사건편이 전파를 탄다.

 

2011 9 6, 북한산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5촌 조카인 박용수·박용철씨가 숨진채 발견됐다. 박용철은 육영재단 폭력사태와 관련한 신동욱 공화당 총재(박근혜 대통령 동생 근령씨의 남편)의 명예훼손 재판의 핵심 증인 가운데 한 명이었다.

 

사건을 수사한 경찰은 박용수가 사촌 형 박용철을 살해한 뒤 범행 현장에서 3km 가량 떨어진 곳에서 목을 매 자살했다고 결론 내렸다.

 

하지만 단순 살인사건 또는 자살로 보기 어려운 정황이 속속 드러나면서 6년여의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 의혹은 가라앉지 않고 있다.

 

 

사건의 실체를 끈질기게 추적해온 취재진은 숨진 박용철의 측근을 통해 그동안 드러나지 않았던컴퓨터 하드디스크를 단독 입수했다. 박용철이 죽기 일주일 전 측근에게 남겼다는 하드디스크. 과연 하드디스크 속에는대통령 5촌 조카살인사건의 진실을 밝혀줄물증이 담겨 있을까?

 

최근 박근혜 대통령의 동생인 박지만 EG 회장 수행비서가 숨진채 발견되면서 ‘5촌 살인사건이 다시 수면위로 떠올랐다. 박근혜 대통령 일가 주변 인물들이 잇따라 석연치 않은 죽음을 맞았기 때문.

 

그러나 ‘5촌 살인사건과 관련한 언론의 의혹 제기에 이철성 경찰청장은재수사는 없다고 못박았다. ‘박용수가 박용철을 살해한 후 자살했다는 구도가 바뀔 여지는 없다는 이유였다.

 

그러나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취재진은 경찰의 이 같은 입장을 흔드는 복수의 증언을 확보해 단독 보도한다. 어렵게 취재진과 만난 제보자. 신변에 위협을 느끼면서 고심 끝에 처음으로 입을 연그들의 증언을 통해 ‘5촌 살인사건진실을 추적한다.

서울경제 기사 원문보기

 

 

 

태극기 수난시대 유감

 

 

 

“미국을 믿지 말고 소련에 속지 마라. 일본이 일어나니 조선은 조심하라

 

해방공간에서 민중들 사이에 떠돌던 이 말이 가진 예언의 힘에 종종 몸이 떨려온다. 자주 자강을 강조하던 이 말은 이후 한국 현대사에서 시간이 지날수록 색깔 짙은 현실이 되어 나타나곤 한다. 여기서 중국이 하나 빠져 있지만 결국 한국 현대사는 주변 강대국들과의 관계를 어떻게 지혜롭게 풀어나가며 우리를 우리답게 지켜나가야 하느냐는 숙제가 늘 함께 해왔다.

 

민중들의 소박한 바람과는 달리 남과 북이 갈라진 채 동족 간 참혹한 전쟁까지 겪었다. 그러고 나니 그 불신은 시간이 지날수록 옅어지기는커녕 갈수록 짙어져만 갔다. 개개인이 겪은 비참했던 전쟁의 기억이 남북간 상호 불신의 토대가 됐지만 그 못지않게 집권세력들은 남이고 북이고 간에 그 적대감을 심화시키는 데 몰두해온 탓이 또한 크다.

 

집권세력은 지지기반이 취약할수록 민중들의 단결을 두려워한다. 지금 광화문에서, 시청앞에서 벌어지는 탄핵 목소리와 반대 목소리를 내는 이들의 갈등도 그 이면에는 국론분열로 이득을 보려는 기득권 세력들의 숨은 손이 뻗치지 않았다고 볼 수 있을까….

서울 기사 원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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