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지섣달 꽃 본 듯이' 바라볼 수 있다면…

 

1년 중 밤이 가장 길고 낮이 가장 짧다는 동짓(冬至)날 경기도 파주시 임진강과 한강 북단이 만나는 지점 스케치 (사진=윤성호 기자/자료사진)

 

해 길이가 '노루 꼬리만 하다'는 동지(冬至)다.

이날은 1년 열 두 달, 삼 백 예순 날 가운데 밤이 가장 길고 낮이 가장 짧다. 이때가 되면 햇살에 윤기가 없고 밝기도 연해 사물에 빛이 닿는다 해도 따사롭기는커녕 밍밍한 것이 생기가 없다.

 

어린 시절 동지 무렵이 되면 몸은 춥고 마음을 우울했다.

해질 무렵 마을로 내려오는 산 그림자는 만화 속의 거인처럼 우람하고, 장독처럼 짙어 몸과 마음이 움츠러들었다. 오후 다섯 시를 지나면 해는 벌써 서산을 넘고, 마을은 회색과 감색이 묘하게 섞여 어둑어둑한 밤을 향해 달려갔다. 태양은 하늘 남쪽 가장자리에 잠시 떠 있다가 불현듯 사라져버렸다. 밤참으로 동치미 국물에 찐 고구마와 홍시를 꺼내 먹고도 밤은 아직 길었다. 새벽녘 오줌이 마려워 눈을 뜨면 창호지 밖은 먹물처럼 검기만 했다. 밤의 세계가 영영 이어져 날이 밝지 않을까 겁이 날 만큼 길고 길었다.

 

전기가 풍족해 거리도, 집도 낮처럼 환하게 사는 요즘이지만, 그렇다고 동짓날 태양이 변한 것은 아니다.

이날은 예나 지금이나 태양이 극점(極點)에 이른 때다. 극에 도달했기 때문에 이제 반전(反轉)하지 않을 수 없는 운명의 날이기도 하다. 더는 갈 수 없는 마지막이기에 반대쪽으로 돌아설 수밖에 없는 날이 동지다. 자연의 이치가 그러하다. 만약 이날 태양이 반대쪽으로 돌아서지 않는다면? 태양이 계속 남쪽하늘로 내려간다면? 우주 운행의 이치가 깨지는 지구 종말의 날이다.

 

그러나 자연은 인간과 달리 이치를 거스르지 않는다.

동지를 분기점으로 태양은 반대편으로 돌아선다. 한껏 내려간 남쪽에서 다시 북쪽으로 방향을 트는 것이다. <물극필반>(物極必反)이다. '사물이 극에 달하면 반드시 전혀 다른 성질의 것으로 돌아간다'는 자연의 이치를 명쾌하게 보여주는 존귀한 절기다. 자연의 오묘한 운행은 이처럼 인간들에게 '선생'이 분명하지만, 우리는 느끼지도, 깨닫지도 못한다. 동지가 오는지도, 가는지도 모르고 허겁지겁 살기만 바쁘다. 동지에 숨겨져 있는 진리가 보석 같은데도 말이다.

 

동지가 담고 있는 우주와 자연의 질서를 들여다보면, 인간들에게 주는 깨달음과 지혜가 많다.

동지가 가장 자명하게 일깨우는 '물극필반'은 한 국가의 대통령부터 주요 부처 장관들, 권력기관의 수장들, 여야 국회의원들, 종교인, 학자는 물론 평범한 직장인에게도 적용된다. 사물과 상황의 전개가 극에 달하면 반드시 반전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모든 것은 영원하지 않다는 것. 차면 반드시 기운다는 것. 극점에 다다르면 반대쪽으로 전환된다는 것. 자연에서는 어느 힘이라도 그 힘 하나가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팥죽 (사진=자료사진)

 

그런데도 동짓날 팥죽 먹는 풍습은 잊지 않으면서도, 극에 달하면 반드시 다른 성질로 바뀐다는 진리는 애써 외면한다.

거의 끝까지 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고집스럽게 버티거나 벽창호처럼 귀를 막거나 오히려 더 나가려고 용을 쓴다.

 

<밀양 아리랑>의 첫 가락을 불러본다.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동지섣달 꽃 본 듯이 날 좀 보소.

 

이 가락에는 극에서 극을 찾는 지혜가 담겨 있다.

 

조상들은 자연의 운행 원리와 이치를 알고 살았다. 막다른 곳, 더는 갈 수 없는 곳, 더는 짧아질 수 없는 '태양의 마지막 날이자 첫날'인 동지에 꽃을 떠올린 것이다.

북풍한설 몰아치는 동지섣달에 연분홍 꽃은 언감생심이다. 그런데도 동짓날 뜨겁고 긴 태양 아래 피어나는 꽃을 보듯 보아달라는 아리랑 가락은 극에서 극을 찾아 해결하려는 혜안의 절정이다.

동지섣달 꽃 본 듯이 나를 보아주는 정성이라면 무엇인들 해결하지 못할까. 그런 지극정성이라면 무슨 일인들 못 해낼까. '동지섣달 꽃 본 듯이' 백성을, 이웃을, 직장 선후배들을, 가족을 바라보는 측은지심이 있다면 '태평성대'라 불릴 것인데, 교수들이 뽑은 올해의 사자성어는 '암흑에 뒤덮인 것처럼 온통 어지럽다'는 뜻의 혼용무도(昏庸無道)라니…

 

동짓날 하루만 내려가면 다시 올라가게 되어 있는 태양의 이치를 생각하면서 겸손해질 수 있기를, 세상 만물을 '동지섣달 꽃 본 듯이' 바라보는 너그러움을 가질 수 있기를….

CBS노컷뉴스

2015-12-21 16:56

조중의 논설위원 jijo@cbs.co.kr

Posted by 망중한담

댓글을 달아 주세요



"); wcs_do();